① 평양교구 소속의 침묵의 본당. 평안남도 강서군 성태면 원당리 마산장(元塘里 馬山場) 소재. 1926년 8월에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녀 안나. 관할 지역은 강서군 성태면, 적송면, 증산면, 쌍룡면, 반석면, 신흥면과 평원군 한천면, 덕산면, 청산면, 대동군 대보면, 김제면이고, 관할 공소는 솔촌, 가풍리, 임성리, 봉오리, 감팔리, 행현, 문촌, 메너머, 보방리, 유은택, 부창리, 팔청리 등 12개소이다. 〔역대 신부〕 초대 부스(W. Booth, 夫) 월리엄(1926. 8~1928. 10), 2대 클리어리(P.Cleary, 吉) 파트리치오(1928. 10~1931. 2), 3대 콘너스(J. Conners, 權) 요셉(1931. 2~1932. 10), 4대 캐롤(G. Carrol, 安) 제오르지오(1932. 10~1937. 4) 5대 보렐(W. Borer, 玉保乙) 월리엄(1937. 4~1940), 6대 화이트(F. White, 元) 펠릭스(1940), 7대 강현홍(康賢洪) 요한(1940. 6~1944. 11), 8대 강영걸(康永杰) 바오로(1944.11~1950.6).
〔공소 시대〕 이곳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현승구(玄昇九)가 1895년 10월 평양 본당에서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한 후 돌아와 지방 유지들과 친척들에게 전교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1901년 봄부터 새로 입교한 신자 36명과 함께 공소 예절을 드림으로써 평양 본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으며, 공소 회장 현승구를 중심으로 최계룡(崔啓龍, 안드레아) 등 여러 신자들이 합심하여 한천(漢川)과 유은택(留恩澤)에도 공소를 신설하였다. 또 1905년에는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유은택과 노동(蘆洞)에 사립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09년 가을에는 신자 상호간의 친목 도모와 공소 운영 보조를 위해 인애회(仁愛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1916년부터는 소속이 영유(永柔) 본당으로 이관되었다.
〔설립 및 폐쇄〕 1923년부터 이곳 평안도 지역에 진출하여 사목을 담당하게 된 메리놀 외방전교회는 1926년 8월 마산 지역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하고 초대 주임으로 부스 신부를 임명하였다. 부임 즉시 원당리 마산장에 소재한 부지 130평에 건평 18평의 사가(私家)를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수리한 부스 신부는, 사제관을 신축하고 빈민 구제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1928년 10월 교구본부로 전임되었다. 이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클리어리 신부는 성당 증축과 공소 강당 개조 등에 힘쓰는 한편 냉담자 권면과 전교에 주력하였는데, 특히 1930년 2월 4~9일 본당과 공소 회장단 및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피정과 지방 공소 개척 등으로 13개 공소와 신자수 850명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클리어리 신부가 부교구장의 중책을 맡아 떠나고 3대 주임으로 부임한 콘너스 신부 때에 이르러 마산 본당의 교세는 크게 증가하였는데, 콘너스 신부가 사목한 1년 반 동안의 영세자만도 300여 명이나 되었다. 가난한 농민들의 자녀들이 취학하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한 콘너스 신부는 1932년에 성 요셉 학원을 개설하여 무료 교육을 실시하고 공소에도 간이 학교(簡易學校)를 세워 이를 전교사들이 관리하게 하였으며, 빈민 구호 사업을 전개하여 일반인들에게 천주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4대 주임 캐롤 신부는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 활동에 힘입어 팔청리 등 3개 공소를 신설하고 1933년부터는 공소 강당 마련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본당에 시약소를 설치하여 무료로 약을 제공하고 양로원도 신설하였다. 특히 교세 확장으로 임시 성당이 협소해지자 현승구가 기증한 대지 2,500평에 길이 92척, 너비 32척, 높이 15척의 한양 절충식 성당을 완공하여 1934년 7월 26일 평양 지목구장 모리스(J. Morris, 睦) 몬시놀 집전으로 성대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신자수 증가로 1935년에는 강서군의 8개 면과 진남포(鎮南浦) 본당 소속의 공소 중 일부를 합쳐 강서(江西) 본당을 분리 · 신설하였다. 또 평원군 한천면 감팔리 공소의 유지 최윤찬(崔允粲, 시몬)과 그의 아들 정수(正洙, 아우구스티노)의 희사로 그 지역의 유치원을 설립하여 어린이 기초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본당에서 운영해 오던 성 요셉 학원은 성모 학원(聖母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일제학무 당국에 의해 폐교당했다가 1939년에 재인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1940년 6월 첫 한국인 사제로 부임한 7대 주임 강현홍 신부는 교회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1942년 2월 평양지목구가 한국인 신부만으로 구성되자 성직자 부족으로 영유 본당과 숙천(肅川) 본당까지 사목하게 됨에 따라 평원군과 강서군 북부 전역을 관장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 상황 속에서 자치 능력이 없어진 일부 공소는 폐쇄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일본 경찰의 감시에 시달려 본당은 더욱 침체되었다. 1944년 11월 8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영걸 신부 때는 강서 본당이 마산 본당과 통합되어 본당 명칭이 강서 · 마산 본당으로 불려졌다. 8 · 15 광복 후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본당 활동은 더욱 위축되었으며, 1949년에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성모 학원 건물의 양도를 거절하자 이를 빌미로 감시와 탄압이 가중되어 미사를 제외한 모든 활동이 마비되었다. 성직자들이 속속 연행 · 납치되자 마산 본당 신자들은 사제를 잃지 않기 위하여 매일 새벽 미사에 180여 명이 참례하면서 신부를 보호하였으나, 1950년 6월 24일 강영걸 신부가 체포됨으로써 침묵의 교회로 남게 되었다.
마산 본당 신심 단체로는 인애회를 비롯하여 가톨릭 청년회, 부인들로 구성된 성부 안나회, 가톨릭 연맹 지회 및 분회, 평신도들의 교회 운영 협의회인 교무위원회가 있으며, 본당 출신 성직자로는 평양교구장이었던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 이경호(李京鎬, 안셀모) 신부, 김몽은(金蒙恩, 요한) 신부 등이 있다. (→ 평양교구;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 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서울대 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가 톨릭 사전》. 〔편찬실〕
② 마산교구 소속 본당. (⇨ 완월동 본당)
마산 본당
馬山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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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