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음

〔히〕לֵבָב ,לֵב · 〔그〕καρδία · 〔라〕cor · 〔영〕he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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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줍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서로 각각이었다(푸생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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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줍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도 서로 각각이었다(푸생 작).

I . 성서에서의 마음
인간의 정신과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통일시키는 중심 기관. 마음은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육체 · 정서· 의지 · 지성적 힘의 원천이다. 또한 인간이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마음 안에 개인의 특징을 결정하는 사상, 계획, 태도, 두려움, 그리고 희망이 머무르는 곳이 마음이며, 하느님은 이 마음에 새로운 생각과 느낌을 불어넣어 변화하도록 은밀하게 활동한다. '마음' 이란 의미의 히브리어로는 '렙' (לֵב)과 '레바브' (לֵבָב)가 있는데 의미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이 단어들은 70인역 성서에서는 카르디아(καρδία), 경우에 따라서는 누스(νοῦς)나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 등으로 번역되었는데, 신약성서에서도 마음의 의미로 이 단어들을 사용하였다.
〔어원 및 용례〕 '렙' 또는 '레바브' 는 어근 리브(לַבב)에서 유래된 듯하다. 바르트(J. Barth)는 자동사에서 유래한 명사가 리바브(לַבָב)라고 하였으며, 쾰러(L. Koehler)는 이 동사가 맥박을 의미하지만 이 동사의 어원은 증명할 수 없다고 하였다. 다른 학자들은 이 어근을 아카디아어 라바부(labābu, 분노하다) 또는 립바투(libbatu, 분노)로 주장하기도 하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히브리어 라바브(לָבַב)의 니팔형은 '이해하게 하다' 로, 피엘형은 '마음을 빼앗기다' , '황홀하게 하다' 로 해석된다. 구약성서에 '렙' 은 599번 나오고 '레바브' 는 252번 나오며, 아람어의 형태로는 렙이 1번, 레바브가 7번 나온다. 렙은 수식어 없이 210번 사용되었고(주로 잠언, 시편, 출애굽기, 신명기 역사서) 복수형 립보트(לִבּוֹת)는 7번 나타나며, 레바브는 수식어 없이 32번 나온다(주로 시편, 역대기 역사서, 욥기). 구약성서에서 렙과 레바브는 유사하게 사용되고 있다. 두 형태가 연대순에 따라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야휘스트는 주로 렙을 사용하고 엘로히스트는이와 반대로 레바브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학파에서 레바브의 사용이 두드러진다. 70인역 성서는 일반적으로 렙과 레바브를 카르디아로 번역하였고(718번), 그 외에 디아노이아(51번), 푸쉬케(ψυχή, 27번), 누스(12번), 프렌(φρήν, 7번), 스테토스(στήθος, 3번), 프로네시스(φρόνησις, 2번) 등으로도 번역하였다.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26번, 바다의 마음으로 11번, 하늘의 마음과 나무의 마음으로 각각 1번씩 사용되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인간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육체적 · 자연적 의미〕 마음이란 단어가 순수하게 육체적인 의미로 쓰여진 경우는 드물다(1사무 25, 37 ; 2열왕 9, 24). 히브리인들은 대개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이 마음에서 오는 것으로 여겼고, 마음을 육체의 중심이고 결정적인 생명 기관이라고 생각하였다. 육체적 생명의 자리인 마음은 병으로 육체가 쇠약해지거나(이사 1, 5 ; 57, 15 ; 시편 37, 15), 피곤한 나그네가 빵으로 원기를 회복할 때(창세 18, 5)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마음이 육체적 생명의 중심이라는 히브리인들의 생각은, 음식을 먹어 힘을 얻고(판관 19, 5) 술을 마시고 즐겁게(시편 104, 15) 된다는 내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구약성서에 동물과 식물의 마음에 대한 언급은 드물다. 레비아단의 마음은 돌처럼 단단하고(욥기 41, 16), 용기에 대한 은유로 사자의 마음이 등장하며(2사무 17, 10),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의 마음속에(בְּלֵבהָאֵלָה)매달려 있다(2사무 18, 14)고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인들은 심장이 육체의 내부에 숨어 있어서 도달하기 어려운 기관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이유에서 '바다의 마음' (בְּלֶב יָם)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출애 15, 8 ; 잠언 23, 34 ; 30, 19 ; 요나 2, 4; 시편 46, 3). 마태오 복음 12장 40절에서 마음은 땅의 내부(καρδία της γης)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하늘의 마음(לֵב הַשָּׁמַיִם)은 호렙에서의 신발현(神發現)과 연결되어 고대 우주론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다(신명 4, 11). 따라서 하늘의 마음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하늘의 높은 곳을 의미한다.
〔영적 의미〕 마음은 외모와 대조되어 나타난다(1사무 16, 7). 인간의 마음은 숨겨져 있지만 모든 삶의 결단은 마음에 달려 있다. 마음을 잠언 24장 12절에서는 알아낼 수 없는 사고의 저장소로 보고, 알아들을 수 있는 말과 대조시켰는데, 이 모든 것은 마음의 해부학적인 지식이나 생리학적인 기능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성서에서 마음의 본질적인 활동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마음은 영적인 기관을 의미하면서 가장 깊은 차원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낸다. 정서 : 마음의 활동은 우선 감수성과 감동에서 비롯되는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감정과 정서, 곧 인간의 비이성적인 측면에 해당된다. 더 나아가 마음은 기쁨과 비애(悲哀)와 같은 중요한 정서적 감각의 원천이다. 성서에 실망 · 비탄 · 슬픔은 80번 이상 언급되었고, 기쁨과 즐거움의 감정은 50번 정도 언급되어 있다.
히브리인은 기분이 좋을 때(판관 18, 20 ; 19, 9 ; 신명 28, 47 ; 잠언 15, 15) 마음이 편안하다고 하고, 기분이 상했을 때(신명 15, 10) 마음이 불편하다고 말한다. 용기와 불안도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나타난다. 용기가 사라지면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떤다"(이사 7, 2). 마음이 약하게 되면 낙심하고 상심하게 되고(이사 7, 4 ; 신명 20, 8) 마음은 밀초같이 녹아 흐르기도 한다(시편 22, 15 ; 여호 2, 11 ; 5, 1; 이사 13, 7 ; 19, 1). 히브리인은 불안이 엄습할 때 '마음이 나갔다' (창세 42, 28), '마음이 떠났다' (시편 40, 13), '마음이 무너져 나갔다' (1사무 17, 32)라고 한다. 용기를 꺾는 것은 마음을 방해하는 것(민수 32, 7. 9)이며, 마음이 그 주인을 떠날 때에 두려움이 생긴다(시편 40, 13). 마음의 떨림은 하느님의 백성이 심판의 선포를 듣고 낙심하는 것으로부터(신명 28, 65 ; 1사무 28, 5) 하느님의 법궤에 대한 엘리의 불안(1사무 4, 13)에 이르기까지의 감정들을 표현한다. 또한, 야훼에게 희망을 건 사람은 '마음을 굳세고 끗끗하게 하는 자' 이다(시편 27, 14).
사람이 지닐 수 있는 감정들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마음은 고통(1사무 1, 8 ; 이사 1, 5 ; 57, 15 ; 예레 4, 18 ; 8, 18 ; 시편 13, 3 ; 34, 19), 기쁨(출애 4, 14 ; 판관 16, 25 ; 이사 24, 7 ; 예레 15, 16 ; 시편 4, 8 ; 잠언 27, 11 ; 사도 14, 17), 걱정(느헤 2, 2), 번뇌(2열왕 6, 11), 용기(2사무 17, 10 ; 시편 40, 13), 절망(전도 2, 20 ; 애가 1, 20), 실망(민수 32, 7), 두려움(신명 20, 3. 8 ; 여호 2, 11 ; 이사 35, 4 ; 시편 25, 17), 부러움(잠언 23, 17), 신뢰(잠언 31, 11)를 지닐 수 있고, 미움(레위 19, 17)이나 연민과 사랑(신명 13, 3)에 의해 움직인다. 마음의 여러 가지 정서들은 때로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마음은 얼이 빠져 떨기도 하고(창세 42, 28) 냉담하고(창세 45, 26) 신음하고(시편 38, 9), 혼란스러워 하고(이사 21, 4) 뜨거워지기도 하고(신명 19, 6 ; 루가 24, 32) 아픔을 겪고(잠언 13, 12), 바수어지기도 한다(시편 62, 20). 또한 마음은 소망(민수 15, 39 ; 시편 21, 3 ; 37, 4), 욕망(로마 1, 24)과 소원(로마 10, 1)이 자리잡는 근원이기도 하다. '다정하게 말하다' 는 '마음에 말하다' , '이야기하다' (창세 34, 3; 50, 21 ; 호세 2, 16)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마음은 힘과 성적인 열망의 장소이기도 하다(이사 4, 1 ; 욥기 31, 9 ; 잠언 6, 25 ; 에제 16, 30).
이성 : 마음은 지성과 이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레바브를 '영혼' (정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가 많다. 성서는 인간에게 마음의 결단을 요구할 때 정신으로 이해하였는데, 특히 지혜 문학에 마음이 가장 많이 나온다. 잠언에 99번, 전도서에 42번, 신명기에 51번 나오는데, 마음의 역할은 '이해하는데' (לַדַעַת) 있고(신명 29, 3) 사고의 장소(신명 8, 5)로 언급되고 있다.
마음이 지니고 있는 지성은 들음(聽)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솔로몬이 하느님에게 청한 '들을 줄 아는 마음' (לֵב שֹׁמֵע)은 선악을 구별하는 슬기롭고 총명한 마음을 말한다(1열왕 3, 9-12). 아울러 깨닫는 이성의 기관으로 '마음'' 과 '귀' 가 병행을 이루고 있다(신명 29, 3 ; 이사 6, 10 : 에제 3, 10 : 40, 4 : 44, 5 ; 잠언 2, 2 ; 18, 15 ; 22, 17 ; 23, 12). 통찰력은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며(이사 42, 25), '마음을 훔친다' 는 말은 '아무도 모르게 속인다' 는 뜻이다(창세 31, 20). 이와 비슷한 의미에서 구약성서는 '마음이 부족하다' (חֲסַר לֵב)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차가운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상실을 의미한다(잠언 10, 13). 또 마음은 지식과 기억의 보고(寶庫)도 되었다. 다니엘은 환상 중에 들은 모든 말씀을 '그의 마음 안에 굳게 간직하였다' (בְּלִבִּי נִטְרֶת)고 하였는데, 이것은 '기억해 두었다' 는 뜻이다(다니 7. 28). 더 나아가 마음속에서는 깊이 생각하고 반성과 명상을 하는 사고(思考)가 이루어진다.
마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감각의 작용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신명 29, 3 ; 전도 7, 21 ; 에제 3, 10). 마음 안에서 모든 인식 활동은 이해되고, 마음은 개인의 전체 지성 활동을 포함한다(신명 8, 5; 잠언 2, 2 ; 전도 7, 2). 예언서에서 마음의 대상은 현시(에제 40, 4 ; 44, 5), 하느님의 말씀(에제 3, 10 ; 말라 2, 2), 혹은 그분의 은총이나 자비(애가 3, 21)가 될 수 있다. 지혜 문학 안에서 마음의 대상은 지혜(잠언 15, 14 ; 전도 7, 25 ; 8, 16 : 집회 6, 32 : 14, 21 ; 50, 28), 자애와 진실(잠언 3, 3), 인간의 운명(전도 7. 2 ; 9, 1)으로 드러난다.
'마음에 둔다' 는 표현은 '인식으로 다가간다' 는 의미를 담고 있다(출애 7, 23 : 9, 21 전도 1, 13. 17). 마음은 식별하고 기억하므로(신명 4, 9 ; 이사 33, 18 ; 65, 17 ; 예레 3, 16 ; 시편 31, 13) 마음 안에서 지혜롭게 일하는 능력(출애 28, 3 31, 6 ; 35, 10), 일의 평가(여호 14, 7 ; 전도2, 1. 3. 15), 분별(1열왕 3, 9 ; 2역대 19, 9)이 이루어진다. 마음은 지혜가 머무르는 자리이고(잠언 2, 10 : 14, 33 ; 16, 23 ; 전도 1, 16 ; 16, 23 : 23, 15), 시간과 사건을 결정한다(전도 1, 16 ; 시편 90, 12). 그래서 마음에 지혜가 부족하면 어리석음에 빠지고 만다. 창조적인 생각은 마음의 기능이다. 이와 같이 히브리인들은 마음이 지성 생활의 중심이라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인식 과정은 마음에서 출발한다(판관 5, 16 ; 마르 2, 6). 생각이 마음에서 생기고(1역대 29, 18), 사람은 마음 안에서 삶에 대한 깊은 묵상을 한다(시편 4, 4 ; 루가 2, 19). 사람은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하며(잠언 16, 9) 지혜와 지식을 구하고(전도 8, 16) 기억을 새긴다(잠언 3, 3 ; 루가 1, 66).
의지(意志) : 히브리어로 인식과 선택의 차이, 이해와 순종의 차이를 구별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마음이 지적인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유대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의지와 도덕적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였다. 마음은 이해의 기관이면서 동시에 의지의 기관이다. 역대기 하 34장 27절에서 부드러워진 마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를 낮춘 것으로 해석되었다. 다윗의 후손에 대해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야훼와 함께 있는지' (לְבָבוֹ שָׁלֵם עִם־יְהוָה)에 따라, 다시 말하면 다윗의 마음과 같은가의 여부에 따라 하느님에게 충실한가 불충실한가를 결정하였다(1열왕 8, 61 ; 11, 4 ; 15, 3. 14; 2열왕 20, 3). 마음은 헌신적인 의지를 드러내기에, 마음의 할례는 야훼에게 돌아와 자신을 위탁하는 의지(依支)의 모습을 명백히 드러낸다(예레 4, 4). 온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며 솔직하게 섬기라고 권고하는 신명기 저자의 선포는 언제나 야훼에게 헌신하고 위탁하라는 부름이다(1사무 12, 24).
마음은 사악한 행동을 계획할 수 있고(잠언 6, 18), 온전한 길을 벗어나게 할 수도 있으며(잠언 11, 20 ; 히브 3, 12), 악한 생각들이 나오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마태 15, 19). 또 마음은 교만(신명 8, 14), 완고(σκληροκαρδία, 즈가 7, 12 ; 마태 19, 8), 비만(肥滿, 시편 119, 70), 고집(שְׁרְרוּת לִבָּם, 예레 3, 17), 불경(욥기 36, 13)으로 나아갈 수 있고, 혹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게도(1열왕 11, 2)한다. 완고하고 고집 센 마음은 때때로 '할례받지 않은'(이방인의) 것으로 기술된다(예레 9, 25 ; 사도 7, 51).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더 의존하고(민수 15, 39) 현혹에 이끌리고(이사 44, 20) 위선적인 이중의 마음(시편 12, 3)을 지니고 있다. 선한 마음에는 완전함(1열왕 8, 61), 흠 없음(시편 119, 80), 깨끗함(시편 51, 10 ; 마태 5, 8), 곧음(시편 32, 11), 선함(루가 8, 15), 순수(에페 6, 5), 할례(예레 4, 4; 로마 2, 29)나 부서짐(시편 34, 18)이 있는 것이다. 관용구 '온 마음으로' (בְּכָל־לְבָבְ, 신명 6, 5)에는 가장 포괄적인 전체성과 완전성의 의미가 있다. 의로움은 마음의 온전함과 연관되어 있으며(창세 20, 5), 새로운 삶은 마음을 곧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욥기 11, 13). 사람이 원한다면, 그 마음은 깨끗해지고(시편 73, 13) 새로워진다(에제 18, 31). 사람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2역대 12, 14) 율법을 찾는다(에즈 7,10).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타락하기 쉽고(예레 17, 9) 의지할 수 없으며(잠언 28, 26) , 악에 기울어지기 마련이다(창세 8, 21 ; 전도 9, 3).
마음의 이성적 기능과 의지의 활동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마음은 추진력이 있으며 상상력을 키우고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2사무 7, 3 ; 1열왕 8, 17 ; 이사 10, 7 ; 예레 22, 17 : 시편 20, 5 ; 21, 3). 또한 마음은 군인의 용맹(1사무 10, 26 ; 2사무 17, 10 ; 1역대 12, 34 ; 다니 11, 25), 왕에 대한 저항(에스 7, 5), 종교 개혁(2역대 17, 6)등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용기를 함축하고 있으나, 이 용기는 야훼의 힘있는 활동에 직면하여 무력화되기도 한다(에제 22, 14 ; 아모 2, 16 ; 시편 76, 6).
〔하느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 구약성서에는 사람의 마음뿐 아니라 하느님의 마음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하느님의 마음은 모두 26번 나온다. 야훼의 마음은 깊은 정서(창세 6, 6 ; 호세 11, 8), 인식과 기억(1열왕 9, 3; 예레 44, 21), 의지와 계획(창세 8, 21 ; 예레 7, 31)을 드러내고 있다. 하느님의 마음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매우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으며, 하느님의 명확한 의지가 가장 많이 담겨 있고 아울러 하느님의 미래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이사 63, 4). 야훼는 당신의 마음속에서 결심한 것을 실천한다(예레 23, 20 ; 30, 24).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인간의 악함은 하느님의 마음을 슬프게 하고(창세 6, 6), 하느님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마음속에 내리고 있다(창세 8, 21). 하느님 마음의 현존은 하느님의 참여와 친절, 가장 깊고 완전한 사랑의 자발적인 돌보심까지 약속하는 것이다. 호세 아서 11장 8절 이하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이 생명을 일으키는 장소라고 언급되어 있다. 조건 없는 하느님의 자비는 심판의 결의(決意)를 바꾸게 하므로 하느님의 마음을 알 때 인간의 현실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빚으시고 모든 행동을 헤아리시는 분이다(시편 33, 15).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을 주시하고(1사무 16, 7), 마음의 비밀을 알고(καρδιογνώστης, 2 역대 6, 30 ; 시편 44, 22 : 139, 23 ; 사도 1, 24), 마음을 시험하고(시편 17, 3 ; 잠언 17, 3 ; 21, 2) 궁극적으로 마음을 이끄신다(잠언 16, 1. 9 ; 19, 21 ; 21, 1). 하느님은 신비스런 목적을 위하여 마음을 완고하게 하시지만(출애 4, 21), 또한 선으로 돌릴 수도 있다(에즈 6, 22). 그분은 마음에 경외심을 심어 주어(예레 32, 40) 새로운 목적을 느끼게 한다(느헤 2, 12 ; 묵시 17, 17). 신약성서에서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비추고(2고린 4, 6) 성령의 보증을 주며(2고린 1, 22), 또한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의 마음 속에 부어져 있다(로마 5, 5).
마음은 하느님과 사람의 관계를 결정한다. 사람의 마음은 직접적으로 하느님에게 열려 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마음은 하느님께 말하고(시편 27, 3) 그분을 의지한다(시편 28, 7).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거주하고(신명 30, 14), 거기에서 신앙은 일어난다(로마 10, 10). 순수하게 기도하는 개념과 연결된 마음에는 곧은 마음(시편 7, 11 ; 11, 2), 깨끗한 마음(시편 24, 4 ; 73, 1), 또는 잘못을 고백하는 마음이 있다.
마음의 완고에 대한 모티브는 출애굽 전승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야훼가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자(출애 9, 12 ; 10, 20. 27 : 11, 10) 파라오의 마음은 완고하게 변한다(출애 7, 13. 22 ; 8, 15). 이렇듯 마음의 완고에 대한 신학적 의미는 야훼의 영광을 드러내어 야훼를 알게 하는 데 있다(출애 14, 4). 출애굽의 배경은 역사 안에서 야훼의 주도권을 풍부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모티브는 강조된 형태로 예언자들에게서 재발견되는데, 예레미야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존하고 경청하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면서(예레 3, 10 ; 4, 4 ; 29, 13) 여전히 마음의 완고함을 언급하였으며(3, 17 ; 7, 24 ; 9, 13 ; 11, 8), 에제키엘은 돌처럼 굳은 마음을 대신하여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에제 36, 26). 굳건한 마음은 모든 공포에 저항하고 경외하는 태도를 가리킨다(시편 27, 14 ; 31, 25 ; 112, 7. 8). 그런데 마음의 완고함이나 얼굴의 경직은 인간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의지를 믿고 순종하지 않는 것을 표현한다. 마음의 완고는 하느님을 향한 경건한 관계의 결핍과 두려움의 부족에서 유래한다.
야훼의 의지의 자리로서 야훼의 마음은 인간 행동의 표준으로 작용한다. 충실한 사제는 야훼의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1사무 2, 35), 임금은 야훼의 계명을 지킬 때 야훼의 마음에 따라 존재하게 된다(1사무 13, 14). 야훼의 마음은 백성들의 우상 숭배를 기억하고 아신다(예레 44, 21). 놀랍게도 욥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 5 ; 144, 3)를,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의 마음을 기울이십니까' (욥기 7, 17)라고 더욱 내적으로 확장하여 질문하고 있다. 하느님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을 두시고 돌보아 주신다. 하느님 의 마음은 피조물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활동하는데 욥기 10장 13절만이 숨어 계신 하느님의 마음을 말한다. 신명기학파는 숨어 계신 하느님이 성전에 현존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야훼의 눈과 마음은 예루살렘 성전에 거주한다는 신앙 고백으로 나타난다(1열왕 9, 3 ; 2역대 7, 16). 후기 신명기학파의 해석은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의 가장 깊은 호의와 함께 하느님의 바람과 친절의 현존으로서 성전에 거주한다는 생각에까지 미쳤다(시편 78, 72). 야훼의 마음이 성전에 거주한다는 진술은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한 탁월한 표현이다.
〔신약의 관점〕 신약성서에서 히브리어 '렙' 의 의미로 사용된 '카르디아' 와 '누스' 는 행동의 원천으로서 인간의 내면을 함축하고 있다. 카르디아가 주로 의지나 감정을 더 많이 의미하고 있는 반면에, 누스는 지성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마음이 중심 기관이며 신체적 활력의 중심이라는 사상은 루가 복음 21장 34절과 야고보서 5장 5절에만 나온다. 카르디아는 감정 · 욕망 · 열정의 중심(요한 16, 6 ; 사도 2, 26 : 로마 10, 1 ; 1, 24 : 2고린 7, 3), 사고와 이해의 중심(마르 11, 23 ; 요한 12, 40 ; 사도 8, 22 ; 로마 1, 21 ; 묵시 18, 7), 의지의 중심(루가 21, 14 ; 사도 11, 23 ; 2고린 9, 7)이며,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종교 생활의 근거이고 도덕적 행위를 결정한다(루가 16, 15 ; 로마 5, 5 ; 8, 27 ; 에페 3, 17 ; 히브 8, 10 ; 2베드 1, 19). 여기에 회개하는 마음(마르 7, 21 ; 요한 12, 40 : 에페 4, 18 : 야고 1, 26)과 구원을 바라는 마음(마태 11, 29 1디모 1, 5 ; 1데살 3, 13; 골로 3, 22 ; 1베드 3, 15 ; 야고 4, 8)이 나타난다. 즉 카르디아는 이해하고(마태 13, 15 ; 고린 4, 6) 기꺼이 하는데(루가 21, 14 ; 2고린 9, 7)에도 사용되었다. 인간의 가장 내적인 부분인 마음은 자아와 인격을 나타내고(골로 2, 2 ; 1요한 3, 19 ; 1베드 3, 4), 마음을 하느님이 변하게 하여 종교 생활의 토대를 이루고, 윤리적 행동을 결정하도록 한다. 마음을 아시는 하느님을 가리키는 '카디온노스테스 (καρδιογνώστης, 사도 1, 24 ; 15, 8)는 가장 내밀한 존재를 안다는 표현이다(루가 16, 15 ; 로마 8, 27 ; 1데살 2, 4 ; 묵시 2, 23).
신약성서 안에서 누스 는 루가 복음 24장 45절, 요한 묵시록 13장 18절과 17장 9절을 제외하고는 바오로서한에서 '렙' 을 대신하여 사용되었다. 누스는 내적 인간' 과 병행하면서 인간의 가장 정신적인 부분을 의미하였으며(로마 7, 23), 세례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변화되기도 하였다(로마 12, 2 ; 에페 4, 23). 바오로에게 있어서 마음이란 인간의 의식이 사고하며 추론하고 반성하는 면을 가리킨다. 마음이 하는 일은 순전히 인간적인 요소이지만, 또한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를 이해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인간 본질의 중요한 부분이다. 바오로에게 마음이란 전(全) 인간을 뜻하며, 때로는 성격을 나타내기도 한다(로마 1, 28 ; 11, 34 ; 2디모 3, 8).
〔의 미〕 이스라엘은 마음을 넓은 의미로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정신 생활 전반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면 마음이라 하는 말에는 인간의 감정(2사무 15, 13 ; 시편 21, 3 : 이사 65, 14), 기억, 이념, 계획, 결정 등이 포함된다. 마음은 여러 가지 정신 작용을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거나(창세 17, 17 ; 신명 7, 17), 자기의 책임을 지거나, 하느님께 내면을 털어놓거나 닫아 버리거나 하는 자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성서는 인간을 구체적이고 전체적인 인간학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이러한 성서의 인간관에 의하면, 마음은 의식과 지성과 자유를 구비한 인격의 원천인 동시에 인간이 결단을 내리는 곳, 양심의 율법이 기록되는 곳(로마 2, 15), 그리고 하느님께서 신비하게 작용하시는 곳이다. 성서에서의 마음은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이 만남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의 마음속에서 완전하게 실현된다. 마음은 이성을 통해서 소명을받았고,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깨닫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약속된 새 마음은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며, 그 계획의 선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가 된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고, 예수는 하느님이 넓은 마음을 원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넓은 마음이란 잘 준비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루가 8, 15), 마음을 기울여 하느님을 사랑하고(마태 22, 37 ; 마르 12, 30; 루가 10, 27), 형제를 마음속으로부터 용서하는 것이다. 마음의 쇄신은 그리스도께 돌아오는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 참고문헌  H.J. Fabry, לֵב, 《TWAT》 4, pp. 413~451/ R.C. Dentan, 《IDB》 2, pp. 549 550/ F. Stolz, לֵב leb Cuore, Dizionario Teologico dell' Antico Testamento, pp. 743 ~748/H.L. Ginsberg, 《EJ》 8, pp. 7 ~8/ W.E. Lynch, 《NCE》 6, p. 965/ Behn, καρδία, καρδιογνώστης, σκληροκαρδία, 《TDNT》, pp. 605 ~614/ B. Costacurta, La Vita Minacciata, 《AnBib》 119, 1988/ J. de Fraine · A. Vanhoye, 《성서 신학 사전》, 광주 가톨릭대학, pp. 140~ 142/ H.W. Wolff, 문희석 역, 《舊約聖書의 人間學》, 분도출 판사, 1976, pp. 82~116. 〔孫淑敬〕
II . 유교에서의 마음
의식(意識) 또는 지각(知覺) 작용을 가리키는 유교의 핵심 개념중 하나.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으니, 출입에 일정한 때가 없어 그 있는 곳을 알 수 없다. 마음이야말로 바로 그것이다"라는 공자의 말처럼 유교에서는 마음이란 알기 어려운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공자가 "삼군(三軍)의 장수는 빼앗을 수 있어도 필부(匹夫)의 뜻〔志〕은 빼앗을 수 없다"고 하였듯이 사람에게는 확고한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유교에서는 마음을 뚜렷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따로 떼어서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마음이 실제로 나타나는 관계 양상과 그 지향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중요성은 공자에 이르러 인격적 각성(覺醒)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평에서 강조되고 있다.
〔공자의 사상과 마음의 문제〕 참나(眞我)의 주체적 확인과 어진 마음 : 마음은 통상적으로 인간의 육신과 구별되는 의식 또는 지각 작용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한층 더 깊어진 인격 주체로서의 진실된 마음이야말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자에게 있어서 인격은 인간 존재의 본래적 실상과 고귀성에 대한 주체적 각성을 바탕으로 하는데, 그는 이러한 덕성을 갖춘 원숙한 인간상을 군자(君子), 대인(大人), 성인(聖人)이라 하고 이들의 심성을 어질다〔仁〕고 표현하였다.
인간의 마음에는 지(知) · 인(仁) · 용(勇) 등 각종의 단편적 덕목이 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사람의 마음은 개별적 덕목 가운데 어떤 특정한 덕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보다 전폭적(全幅的)으로 모든 덕을 갖출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럼으로써 공자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식의 차원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켰고, 여기에서 모든 덕을 갖춘 마음의 상태를 '인' 이라고 하였다. 유교에서 '인'은 사람의 마음이 구유(具有)한 최고의 덕성이며, 어진 사람[仁人]이 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하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의 몫 : 공자는 "인을 행함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 하여 근본적으로 개인의 주체적 각성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각성된 인간 주체는 높이와 넓이, 또는 안과 밖의 양면을 모두 포괄한다. 이를테면, 공자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배워 위에 도달하였으니 나를 아는 것은 하늘이시리라!"라고 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인자의 마음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하나는 '하늘'' 을 향하는 것으로 안으로 깊어져서 도달된 높은 경지이다. 그리하여 인인(仁人)은 군자 · 대인 · 성인을 거쳐 하늘〔天〕에 가 닿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자의 마음은 '사람' 을 향하여 있으니 이는 밖으로 벌어진 인간의 세계이며, 인인은 의(義)를 매개로 예법〔禮〕이 준행되는 사회 현실에 관여한다. 이렇게 초월적 존재와 인간의 현실은 참된 자아로서의 어진 마음이 관여하여야 할 본질적 대상인 것이다. 즉 위로 천(天) 또는 천명(天命)을 숭경(崇敬)하며, 아래로 인간 사회의 도리와 예법을 존중하는 일은 매우 소중하며 필요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초월적 존재를 존숭(尊崇)하며,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만 한갓 피동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즉 공자가 "신(神)에게 제사드릴 때에는 신이 계시듯이 하며 ··나 자신이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제사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라고 하였듯이 천명을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주체적 각성과 참여를 떠나서 천인(天人)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천명에 순응하되 초월적 세계에 침잠(沈潛)하여 스스로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의미가 심화되는 것이며, 여기에서 어진 마음〔仁〕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인간의 주체적 확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어진 마음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도 기본 원리가 된다. 유교에서는 사회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이것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정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즉 인간 주체의 자율적 참여가 결여된 사회 현상은 무가치하고 맹목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 따라서 문물 제도와 사회 환경은 사람의 어진 마음과 연관되어 있어야만 그 존재 이유를 갖는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마음은 하늘 및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성장 · 성숙하여 원만 구족(具足)한 본래적 심성을 성취하여야 한다. 나아가 하늘 및 사람과의 관계를 심화시킬 뿐 아니라, 인간의 심성을 매개로 하여 하늘과 사람이 인간의 삶 속에서 연결될 수 있도록 주체성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 닦음의 길 : 유교에서 인인(仁人)과 성인(聖人)은 사람이 성취하여야 할 목표로서, 인을 밝히는 것은 곧 인간 본연의 마음을 밝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공자는 인에 대해 물었을 때, "자기 자신을 이겨 예를 회복하는 것”(克己復禮)이라고 하였으며, "공(恭) · 관(寬) · 신(信) · 민(敏) · 혜(惠)를 천하에 행하는 것"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이 어진 마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소인(小人)스러움으로부터 군자다움으로, 나아가 대인과 성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육신의 안일과 세속적 욕망을 높은 가치로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음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가치가 없거나 경멸스럽게 보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에 얽매이면 소인스럽게 된다는 것이다. 몸 자체는 지각이 없으므로 선악으로 규정할 수 없고, 마음에 대해서만 선악을 책임지울 수 있다. 이렇게 마음과 몸의 관계는 서로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여기서 군자의 마음과 소인의 마음, 인심(人心)과 도심(道心) 등 마음의 문제가 복잡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유교에서 사람의 마음은 완성태가 아니며, 보다 완전해지기 위하여 부단히 수련하고 보완하여야 할 대상이다. 공자는 수많은 덕목이 있지만 바르게 알아서 시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원리와 표준에 맞아야 한다고 하였다. 배움과 예법을 강조한 것도 마음의 균형과 조화를 중시한 까닭이었다. 이를테면 공자는 육언육폐(六言六蔽)라 하여, 인(仁) · 지(知) · 신(信) · 직(直) · 용(勇) 등의 덕이 있더라도 학(學)이 없으면 그 폐단이 각기 어리석음〔愚〕 · 헤벌어짐〔蕩〕 · 해침〔賊〕 · 박절함〔絞〕 · 문란함〔亂〕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예로서 공(恭) · 신(愼) · 용(勇) · 직(直) 등이 있더라도 예(禮)가 없으면 수고로움〔勞〕 · 두려움〔葸〕 · 난폭함〔亂〕 · 융통 없음〔絞〕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원리와 표준에서 벗어난 행위는 균형과 조화를 잃어 아무리 훌륭한 덕목이라 하더라도 단점으로 작용하여 폐단을 빚어 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덕성을 원만하게 함양하기 위해서는 자기 수련의 과정을 쌓아야 한다.
공자의 경우, 마음을 닦아 인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두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아래에서 배워서 위에까지 도달하는 방법(下學而上達)으로, 이는 가장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사(日常事)로부터 출발하여 천명 · 대인 · 성인과 같은 초월적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사색〔思〕과 학습〔學〕의 병행을 강조하고 있다. 공자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 고 하였다. 크게 보아 전자는 경험적 · 객관적인 것이며, 후자는 관념적 · 주관적인 것이다. 이러한 양면성에 대한 사려 깊은 인식은 공자의 전인적 인간관을 일관되게 반영하는 것으로, 인간의 주체적 심성〔心〕이 추상적 원리와 구체적 사실 모두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마음의 성숙과 보람 : 유교에 있어서의 마음은 모든 것에 관여하면서도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통일적 인격 주체이다. 비록 마음이 천(天)의 절대적 권위에 승복하며 천명을 경외함에는 변화가 없지만, 하늘에 귀의를 표시하는 언행을 나타내 보이거나 어떤 특정한 행사와 의식을 치르지는 않는다. 인간이 어진 마음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그대로 하늘을 모시는 것이며 하늘의 뜻〔天命〕에 응답함이 되는 것이다. 또한 유교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충실히 하고자 할 뿐, 죽은 다음 인간의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이탈하여 영생하거나 다시 환생하기를 기약하지도 않는다. 공자는 "지사(志士) · 인인(仁人)은 살기 위해 인을 해치지 않고, 제 몸을 죽여 인을 이룬다(殺身成仁)" 고 하였고, 맹자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을 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며, 일찍 죽거나 오래 살거나 의심치 않아 몸을 닦고 기다림은 천명을 온전히 행함이다" 라고 하였다.
〔마음에 대한 역사적 성찰〕 공자에게 있어서 어진 마음은 내외 · 상하로 모든 덕을 포괄하는(統攝諸德) 진실된 인간 주체였다. 이후 이러한 마음의 문제는 공자 사상에 뿌리를 두면서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적응 · 변천하고 있다.
맹자와 순자의 마음 : 전국 시대의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는 당시에 숭상되던 패도적 부국 강병주의를 배격하고 인도(仁義)를 근본으로 하는 왕도(王道) 정치를 행할 것을 주창하였다. 현실적으로 전쟁으로 얼룩지고 가치관이 전도된 세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인간성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밝히고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이 본심을 회복할 것을 역설하였다. 맹자는 인간의 마음에는 천부적으로 인 · 의 · 예 · 지의 사덕(四德)이 들어 있으며 그것의 발단인 사단(四端), 즉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의 마음을 확충할 것과 도(道) · 의(義)가 배합된 '호연지기' (浩然之氣)를 배양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정신과 신체를 대체(大體)와 소체(小體)로 나누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心之官]을 따르면 대인이 되고, 보고 들을 뿐 생각할 수 없는 이목〔耳目之官〕을 따르면 물욕에 덮여 소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대체인 마음은 "하늘이 내게 주신 것으로 먼저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이 빼앗을 수 없다. 대인이란 바로 이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맹자의 사상은 정신 우위의 선험주의적 성향을 보인다 하겠으나 마음이 몸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인성의 선함을 천명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였다.
맹자보다 다소 늦은 시기의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는 같은 유가이면서도 맹자와는 대조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순자의 사상은 인본주의적이며 자연주의적이다. 순자는 인성이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주장을 부정하며 천(天)에 대해서도 주재적 운명적으로 보지 않고 우주 자연으로 생각한다. 인공(人工)이 가해지지 않은 미개척의 원질(原質)은 그 자체만으로는 가치가 없고 주어진 재료일 뿐이다. 인간의 본성도 이욕(利欲)으로 된 것이며, 그대로 방치하면 쟁탈과 혼란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인간은 주어진 자연을 능동적으로 개척하여 쓸모 있게 만들고, 문란한 이욕을 다스려서 질서 있게 하여야 한다. 그러나 순자가 말하는 마음은 인간이 갖춘 능력일 뿐이지 어떠한 선천적 이법(理法)을 구유한 완성태가 아니다. 다만 마음에는 사려〔慮〕와 지능〔知〕이 있어서 이욕(利欲)을 조절할 수 있으며, 의거하여야 할 객관적 기준이 이른바 성인이 제시한 '예의문리' (禮儀文理)와 '인의법정' (仁義法正)이다. 순자도 사람은 누구나 '인의법정'을 알 수 있는 자질[質]이 있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具〕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경험적 축적과 숙련을 요구한다. 순자는 인간의 심리 현상과 사회 현실의 실상을 근접하여 파악함으로써 유교 사상을 경험주의적 측면에서 보완하였으며, 인간의 위상을 뚜렷이 하고 능동적 사고 방식과 자율적 정신을 고양시켰다.
동중서와 한유의 마음 : 한대(漢代) 동중서(董仲舒, 기원전 179~104)는 당시 유도(儒道)의 권위를 확보하는데 공헌한 인물로 공 · 리(功利)가 아니라 도 · 의(道誼) , 사리(私利)가 아니라 공의(公義)의 순정성(醇正性)을 추구함으로써 후세의 유가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심성설은 당시의 흐름이었던 음양 오행설에 입각하여 전개되었다. 동중서에 의하면, 하늘에는 음양(陰陽)이 있듯이 사람의 품성에는 인(仁)과 탐(貪)이 있다. 인의 품성을 발전시켜 선(善)이 되고 탐의 품성을 나타내면 악(惡)이 된다고 하여 맹자와 같이 성선(性善) 일변이거나 순자와 같이 성악(性惡) 일변인 경우와는 다르다. 그리고 '인' 은 하늘에서 타고난 품성이지만 가능성이기에, 후천적으로 성인의 교화에 의해 계발됨으로써 선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품성을 오행(五行) 사상에 의해 인 · 의 · 예 · 지 이외에 토(土)에 해당하는 신(信)을 추가하여 오상(五常)이 되게 한 것도 한대(漢代) 학풍의 특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당대(唐代)의 한유(韓愈, 768~824)는 '원도'(原道), '원성' (原性) 등의 논설을 펴서 요 · 순으로부터 공 · 맹에 이르는 유교의 도통 정신을 뚜렷이 하였다. 한유에 의하면, 유교의 인의 도덕이야말로 인륜대도(人倫大道)로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며 한갓 평범한 선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유교에서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은 내면적으로 마음 닦음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천하 국가를 위해 이바지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그는 또한 인성에 대해서도 자질에 따라 상 · 중 · 하로 나누어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송명이학에서의 마음 : 유교에서 마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이론화하여 다룬 것은 송명이학(宋明理學)에 이르러서이다. 정주학(程朱學)과 육왕학(陸王學) 또는 주자학과 양명학은 마음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래서 송대(宋代)에는 마음을 한 · 당대와 같이 음양론 또는 현상론적 차원에서 선과 악을 혼합하여 설명하는 것은 천명을 받들고 천명이 내재한 절대적으로 존엄한 인간 존재의 위상[大本]을 정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북송(北宋)의 주렴계(濂溪, 周敦, 1017~1073)는 만유(萬有)의 궁극적 원리를 재래의 태극(太極)과 함께 무극(無極)이라 부르고, 특히 인도〔人之道〕의 극치를 '인극' (人極)이라 하여 그 표준을 중정인의(中正仁義)로 삼아 성인 · 군자의 천인 합일론을 폈다. 즉 '인극' 이 곧 무극 · 태극이었다. 마음을 수련하여 성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군자이며, 그 완성자가 성인이다. '인극' 이란 맹자의 성선설을 단적으로 재천명하는 용어라 할 수 있다. 후일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육심통성정도>(諸肉心通주情圖)의 풀이에서 "자사의 천명의 성〔天命之性〕, 맹자의 성선의 성〔性善之性〕, 장자(橫渠, 張載, 1020~1077)의 천지의 성〔天地之性〕 그리고 정자(伊川, 程頤, 1033~1108)의 성이 이치라는 성〔卽理之性〕"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맹자의 '호연지기' 는 장재 · 정호 등과 같이 송학에 있어서 '만물 일체 사상' 의 근원이 되었다. 정호(明道, 程顥, 1032~1085)는 의예지(義禮智)는 모두 '인' 이라 하고, 인을 통하여 만물과 한 몸〔同體〕이 될 수 있으며, 오직 주체적으로 성경(誠敬)을 보존함이 인을 체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마음은 이기(理氣) 또는 성정(性情)으로 되어 있다고 보며, 따라서 '성즉리' (性卽理)인 불멸의 인간 본성과 더불어 청탁수박(清濁粹駁)한 기운이 혼합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 (氣質之性)이 구별되며, 맹자의 성선설을 대본(大本)으로 하되 순자의 성악설이 보완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수양론으로서의 기질 변화론이 필요하며, 이를 위하여 주희(晦庵, 朱熹, 1130~1200)는 정이의 사상을 이어서 경(敬) 사상을 중시하였다. '경' 은 마음이 고요할 때 존양(存養)하고, 움직일 때 성찰(省察)하여, 인간이 주체적으로 자기 위상을 뚜렷이 하여 성인에 이르는 길이요 힘이다. 그러므로 마음 공부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으며, 본성〔性命〕에 근원하는 도심(道心)이 주가 되고, 육신(形氣)에서 생기는 인심(人心)이 좇아서 마음이 제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 요·순 · 우가 서로 전한 심법(堯舜禹相傳之心法)이라고 하였다.
한편 상산(象山, 陸九淵, 1139~1193)과 양명(陽明, 王守仁, 1472~1528)은 정호에게서 인의 체득과 성경의 보존이 중시되었듯이 분열되지 않고 흐트러지지 않은 인간 본래의 마음을 집중적으로 논술하였다. 따라서 정주학에서 '성은 이치이다' 〔性卽理〕라 함에 만족하지 않고, '마음이 곧 이치이다' 〔心卽理〕라고 주장하였다. '성즉리' 가 되면 마음과 이치가 둘로 갈라진다는 것이다. 주자학에서는 '성즉리' 라 하여 마음에 있어서 만고 불역(萬古不易)의 대본(大本)을 밝히는 데 본래의 뜻이 있었다. 그러나 상산과 양명은 그러한 논리적 · 분석적 태도는 마음과 이치가 하나인 실질적 대본처(大本處)에서 벗어나며, 실질적 대본처에서만 일체의 것이 확인되고 성립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양명의 치양지설(致良知說)과 지행 합일설(知行合一說)이 나오는데, 양지(良知)는 천리(天理)이며 진오(眞吾)이다. 학문의 도는 언어 문자의 번쇄한 논술과 천착에 있지 않고 바로 마음과 이치가 하나인 실존적 사실 그 자리에 입각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의 문제와 한국 유학 : 한국 유학에 있어서도 마음의 문제는 커다란 관심의 대상이었다. 특히 퇴계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를 비조(鼻祖)로 하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는 마음의 문제인 심성론을 끊임없이 논의의 주제로 삼았다. 퇴계 · 율곡에 있어서도 심성론은 매우 중요한 논제였으며, 이기 심성론, 사칠 성정론(四七性情論) 그리고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의 정치한 논술은 수많은 서신과 저술에 담겨 있다. 또한 후일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霞谷, 鄭齊斗, 1649~1736)의 양명학적 심성설은 실학 · 서학과 관련한 한국 근대 사상의 전개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 후기 실학의 대종(大宗)인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경학〔經典〕, 도학[心經] 그리고 서학(西學)에 연관된 독특한 심설(心說)을 전개하여 동서 사상의 관계와 실학 사상을 연결시키려 하였다.
※ 참고문헌  《論語》/ 《孟子》/ 《中庸》/ 《大學》/ 《性理大全》/ 《退溪全書》/ 《栗谷全書》/ 《霞谷集》/ 《與猶堂全書》/ 《象山集》/ 《王陽明全書》. 〔李東俊〕
Ⅲ . 불교에서의 마음
일체의 정신 작용을 총칭하는 말. 의(意) ·식(識) 등의 관념과 서로 통한다.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에서는 만법 유식(萬法唯識)이라 하여 마음〔心〕을 교리의 근본으로 중시하였다.
〔분 류〕 경전에 의하면 마음의 체성(體性, 本質)은 하나이지만 범부(凡夫)의 마음은 진리적인 마음과 비진리적인 마음으로 구분된다. 진리적인 마음을 진여심(眞如心)이라 하고 비진리적인 마음을 생멸심(生滅心)이라 하는데, 진여심은 불심(佛心) · 청정심(淸淨心) · 지혜심(智慧心) 등으로, 생멸심은 번뇌심(煩惱心) · 염오심(染汚心) · 범부심(凡夫心) 등으로 표현한다. 진여심은 본래 청정하며 항상 지혜로움을 나타내는 마음으로서 누구에 의하여 창조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진리의 본체로서 영원히 존재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진여심은 생사를 초월하고 시공을 초월하였으며 증감이 없는 마음이다. 반대로 생멸심은 무지와 탐욕과 진심(嗔心)의 번뇌를 발생하여 선악(善惡)의 업(業)을 조성하고 생멸의 무상함을 조성하며 지옥과 천당에 윤회할 수 있는 과보(果報)를 조성하는 마음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하나이지만 내용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이는 《기신론》(起信論)에서 일심(一心)을 심진여문(心眞如門)과 심생멸문(心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과 같다. 한 마음에 두 가지 성질의 마음이 있게 된 것은 마음 스스로 진여심에서 진리를 망각하여 번뇌심을 야기한 데서 비롯된다. 그 번뇌심은 지혜와 불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데, 이처럼 번뇌를 동반하면서도 불성을 내장한 마음을 여래장심(如來藏心)이라고 한다. 여래장심은 진여심을 보존하고 있으며 범부들에게 희망을 주는 마음이다. 이는 마치 황금이 흙 속에 묻혀서 그 빛을 밖으로 발하지 못하는 것처럼, 불성도 번뇌에 묻혀서 지혜 광명을 밖으로 발생하지 못하는 것뿐이지 번뇌를 정화하면 지혜를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여래장심은 여래성(如來性) 또는 불성(佛性)이 포장되어 있는 상태의 마음을 뜻한다. 불성은 만법의 본성이며 특히 마음의 본성으로서 깨달음을 발생하는 성질〔覺性〕을 뜻하고 만물의 진리를 올바로 관찰할 수 있는 지혜의 성질〔智性〕을 뜻한다. 인간은 이러한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불성에 의하여 진리를 관찰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그리고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고 모든 중생들의 불성을 일깨워 주며, 모든 생명체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는 마음을 이타심(利他心) 또는 보살심(菩薩心)이라 하는데, 대승 불교에서는 이를 대심(大心)이라고 한다. 이 대심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은 이기심이 없으며 상대를 자신과 같이 사랑하고 아끼는 무아(無我)의 마음을 갖는다. 이러한 마음은 한계가 없어서 전 우주를 감싸고도 남음이 있으며 무엇이든지 관찰하면 바로 깨닫고 진리를 즉시 실천하게 된다. 대심은 대도를 실천하며 일정한 대상만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깨닫게 되고, 한 구석을 깨달음의 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깨달음의 문으로 삼는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진리의 문으로 삼기 때문에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고 한다. 이는 무애(無碍)하고 자재(自在)한 진여심의 경지를 뜻하며 부처의 마음을 뜻하기도 한다.
〔심 · 의 · 식〕 모든 경전과 논전(論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은 심(心) 또는 의(意) 그리고 식(識)이라고 설명하였다. 심 · 의 · 식은 여러 교리 가운데 마음을 설명하는 가장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단어이다. 이러한 심 · 의 · 식 사상은 소승 불교 시대부터 정신 생활의 현실에 맞춰 설명되었으며, 대승 불교에 이르러서는 8종의 마음〔八識〕으로 확대되었다.
첫째, 심(心)은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vijnāna)을 말한다. 아라야((Ālaya)는 포장(包藏)과 함장(含藏)의 뜻이 있다.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業力)을 보존하고 미래의 과보를 받게 하는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여러 마음들이 보고, 듣고, 냄새 맡으며, 맛보고, 촉감을 느끼며 생각하고 추측하면서 행동한 악업과 선업이 하나도 상실되지 않고 아뢰야식에 잘 보존되었다가 이것이 정신과 육체의 행동을 야기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러한 인과를 논전에서는 "현재의 행동은 종자(種子)를 조성하고 종자는 현재의 행동을 발생한다"라고 하였다. 이같이 아뢰야식 안의 업력은 여타의 마음과 몸을 활동하게 하고 주변의 환경까지도 유지시켜 주는 힘을 발휘한다. 이 마음은 본래 번뇌를 야기하지 않고 선성과 악성에 치우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무부무기성(無覆無記性)이라고 하며 선업과 악업을 보존할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한다. 아뢰야식은 모든 업력을 보존하였다가 지옥과 천당 그리고 극락 세계에 태어나게 하는 윤회의 주체이기도 하다.
둘째, 의(意)는 말나식(末那識, Manas-vijnāna)라고 칭하며, 진리를 망각하고 최초로 무명(無明)을 야기하여 마음을 어둡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 마음은 마음의 안정을 파괴하는 번뇌장(煩障)과 마음의 지혜를 방해하는 소지장(所知障)을 야기한다. 이들 번뇌는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하는데 아치는 참나〔眞我〕를 망각한 번뇌를 말하고, 아견도 역시 참나에 대한 망견(妄見)을 말하며, 아만은 자기를 과신하고 남을 낮추는 번뇌이고, 아애는 자기만을 탐애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이 말나식은 진리를 착각하고 비진리를 조작하여 인식한다는 뜻으로 사량심(思量心)이라고도 한다. 이 마음은 아뢰야식의 실상을 망각하여 아집(我執)을 야기하며, 만법이 인연법임을 망각하여 법집(法執)의 번뇌를 야기한다. 이들 번뇌를 근본 번뇌라고 하는데 의식(意識) 등 여러 마음을 혼탁하게 하는 근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평소의 의식이 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말나식의 번뇌가 정화되지 않은 한의식은 번뇌를 다시 야기하게 된다.
셋째, 식(識)은 식별 또는 요별(了別, vijnāna)을 뜻하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종의 마음으로 분류된다. 안식은 눈에 의지하여〔眼根〕 색깔을 분별하는 마음이며, 이식은 귀에 의지하여〔耳根〕 소리를 듣는 마음이고, 비식은 코에 의지하여〔鼻根〕 냄새를 맡는 마음이다. 설식은 혀에 의지하여〔舌根〕 맛을 분별하는 마음이고, 신식은 몸에 의지하여〔身根〕 촉감을 분별하는 마음이다. 이상의 다섯 마음은 외부의 대상을 반영하여 선과 악을 구별하고 진리를 깨닫는다. 그러나 의식은 순수한 마음의 의지처인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위에서 말한 5식과 함께 보고 듣고 촉감을 느끼고 깨닫는 작용을 한다. 이것은 또한 5식에 가담하여 선 · 악 · 고 · 락(善惡苦樂)의 성질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오구 의식(五俱意識)이라고 한다. 단독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여 행동으로 옮길 수 있으므로 독두(獨頭) 의식이라고도 한다. 때로는 의식이 산란하고 안정을 잃었을 때가 있는데 이러한 때를 산란(散亂) 의식이라고 하며 의식 불명에 처할 때는 무심(無心)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마음이 안정되고 사물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며 지혜로움이 발생할 때 정중(定中) 의식이라고 한다. 따라서 의식은 내외의 대상을 광범위하게 인식하면서 선과 악을 결정하며 모든 행동을 발생하는 성질을 갖는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심 · 의 · 식의 작용이 발생하여 모든 정신 생활을 유지시키게 된다. 소승 불교는 이들 세 가지 마음이 비록 작용은 각각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체성은 하나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 후 대승 불교에서는 소승 불교와는 달리 심 · 의 · 식은 작용이 각각 다를뿐 아니라 체성도 각각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심 · 의 · 식을 8식(八識)으로 나누어 정신계를 설명하고 있다.
〔8식〕 8식은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으로 각각을 심왕(心王)이라고도 부른다. 심왕이란 마음이 결정하여 모든 행동을 발생하게 하는 것이 마치 국왕이 법을 마음대로 결정하여 시행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들의 심체(心體)에는 51종의 작용이 있으며, 작용은 심체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우치(愚痴), 탐욕, 진심(鎭心), 아만(我慢), 의심, 악견, 한탄, 고뇌, 질투, 아첨 등 많은 번뇌 작용을 야기한다. 그리고 사물과 남을 신뢰하고 반성하며, 참회하고 비진리적 탐욕을 없애며, 성내지 않고 근면하고 방일(放逸)하지 않으며, 자비를 베풀고 보시를 하며,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면서 이익을 주는 선의 작용을 발생시킨다.
이렇게 8식은 각각 체성과 작용을 지니며 인연을 만나면 즉각 발생한다. 선의 작용을 선업이라 하고 악의 작용을 악업이라 한다. 업은 종자(種子)라 이름하며 종자는 미래의 열매를 반드시 맺듯이 과보를 받게 하는 씨앗을 뜻한다. 여기에 인과응보의 진리가 전개되며 자업자득의 논리가 성립한다. 이러한 인과응보의 논리를 살펴보면 8식 가운데 아뢰야식을 제외한 말나식과 의식 등 7식은 찰나도 쉬지 않고 선과 악의 작용을 나타내며 업을 조성한다. 그 업력은 즉각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현재의 지식과 행동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근원이 된다. 업력은 미래의 인격을 형성해 주며 내세의 지옥과 천당 그리고 극락 세계로 이끄는 힘이 된다. 이와 같이 아뢰야식은 업력을 보존하기도 하지만 그 업력에 끌려 미래의 생을 받는 윤회를 한다. 모든 중생은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윤회하며, 윤회에서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려면 먼저 말나식과 의식 등의 마음을 정화해야 한다. 번뇌를 야기하지 않고 악업을 짓지 않으며 선행만을 행한다면 필연적으로 선업만이 아뢰야식에 보존되어 악도에서 해탈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며 마음이 정화되면 본래 지니고 있는 불성이 발휘되고 지혜의 마음도 발생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등 다섯 마음이 정화되면 성소작지(成所作智)를 발생하고, 의식이 정화되면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발생하며, 말나식이 정화되면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발생하고, 아뢰야식이 정화되면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발생하게 된다. 이 사지(四智)를 아마라식(阿摩羅識)이라고 하는데, 아마라식은 청정심을 뜻하며 무구식(無垢識)이라고 번역한다. 무구식은 불성 또는 진여성을 뜻하며 무루심(無漏心)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의 바탕은 불성 또는 진여성이기 때문에 시작과 종말이 없는 영원한 성질이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말나식과 의식 등이 번뇌심을 야기하여 망심(妄心)을 이루고, 망심을 8식으로 분류하여 중생의 정신 생활을 설명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성과 사지(四智) 등은 마음의 본성이며 실상이지만 8식과 같은 망심도 마음인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에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라고 한다. 청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모두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뜻인데, 이를 만법 유식' (萬法唯識)이라고도 표현한다. 인간의 정신계는 물론 물질계까지도 마음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논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니며, 《기신론》에서는 이를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하였다. 마음 외에 물질이 따로 없고 물질 외에 마음이 따로 없으며, 물질과 정신은 항상 평등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심왕이라고 하며 심왕에 의하여 선과 악이 결정되기 때문에 이를 유심(唯心) 또는 유식(唯識)이라고 한다. 마음이 고뇌하면 중생도 고뇌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중생도 청정하다. 그리고 마음이 생(生)하면 여러 법이 생하고 마음이 멸(滅)하면 여러 법이 멸한다는 설법들도 모두 유심 사상을 이르는 것들이다.
※ 참고문헌  《阿含經》/ 《華嚴經》/ 《解深密經》/ 《瑜伽師地論》/ 《起信論》/ 《唯唯論》/ 《俱舍論》/ 《攝大乘論》 . 〔吳亨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