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자랭, 쥘 (1602~1661)

〔영〕Mazarin, Ju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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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랭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한 프롱드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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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랭을 최대의 위기에 직면하게 한 프롱드의 난.

프랑스의 추기경. 정치가. 1602년 7월 14일 로마 근처 아브루치의 페시나 교황령에서 줄리오 라이몬도 마차리노(Giulio Raimondo Mazzarino)란 이름으로 태어나 로마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훗날 추기경이 된 예로니모 콜론나(J. Colonna)를 따라 스페인으로 가 알칼라 대학(지금의 마드리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622년경 로마로 다시 돌아와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624년에는 콜론나 가문 소속으로 교황청 군대에서 지휘관직을 맡았다. 1626년 3월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덕분에 교황청 외교관으로 발탁된 마자랭은, 발렌티노 전쟁에서 스페인과의 협상을 맡게 되었는데, 그때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여 교황 우르바노 8세(1623~1644)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 결과 1629년 만투아 공국의 상속권 문제로 발생한 전쟁을 종식시키라는 어려운 임무를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마자랭은, 이듬해 1월 프랑스에 파견되어 리슐리외(Richelieu) 추기경과 협상을 벌였다. 이때 리슐리외는 뛰어난 지성과 낙천적이면서도 놀라운 유연성을 지닌 마자랭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630년 10월 26일 몬페라토의 카살레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전투가 시작되려고 할 때, 마자랭은 말을 타고 양쪽 진영을 오가며 "평화, 평화!"를 외치고 다님으로써 전투를 중단시켰으며, 이로 인해 그는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마자랭의 중재로 1631년 6월 19일 케라스코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가 만투아 공국의 주인이 되었다.
1634년 교황 특사로 임명되어 프랑스 궁정에 파견된 마자랭은 그곳에서 리슐리외 추기경의 편에 서 실권자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며, 아비뇽으로 소환되어서는 프랑스의 권익을 열렬히 옹호하였다. 1636년 12월 다시 로마로 소환된 후 바르베리니 추기경, 니콜라스 바니 추기경 등과 함께 교황청 내에서 친(親)프랑스파를 이끌었고, 리슐리외 및 그의 고문 조제프 신부와 서신 왕래를 하면서 프랑스 정치에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마자랭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프랑스의 루이 13세는 그를 추기경으로 천거하고 그에게 교회록과 연금을 지급하였다. 1639년 프랑스인으로 귀화하여 프랑스 정부의 관리가 되기로 결심한 마자랭은 이듬해 1월 5일 파리에 도착하였으며, 1941년 12월 16일에는 리슐리외의 도움으로 추기경에 임명되었다.
프랑스 재상 : 가톨릭을 믿는 유럽 열강들 사이의 적대 관계를 청산하려는 야망을 간직한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사망(1642. 12. 4) 이후, 특히 루이 13세의 사망(1643. 5. 14) 이후 섭정이었던 스페인 출신의 왕비 안 도트리슈(Anne d'Autiche)에 의해 능력과 경험을 인정받아 어린 국왕 루이 14세를 대신해 재상(宰相)에 임명되었다. 리슐리외보다는 유연하였지만 그의 재능과 국가관은 물론 욕심까지 물려받은 마자랭은 리슐리외의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으며 그때부터 죽을 때까지 사실상 프랑스 제1의 실력자로 군림하였다. 프랑스는 당시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와 한창 전쟁 중이었는데, 뛰어난 자질을 갖춘 외교관들의 도움과 콩데 공(公)과 앙리 드 튀렌느 같은 뛰어난 군인들의 눈부신 승리에 힘입어 그는 1648년 10월에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에 평화를 확립시켰고, 이로써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나긴 싸움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이 났다. 마자랭은 또한 스페인과의 전쟁을 계속 승리로 이끈 결과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을 확보하였으며, 1659년 11월 7일에는 피레네 조약을 성공적으로 체결하였다. 이로써 마자랭은 그리스도교 세계에 평화를 안겨다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프롱드의 난 :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1648년에 마자랭은 대내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위기의 최대 원인은 전쟁 비용으로 인한 재정난이었다. 관직의 창설, 기채, 연금의 부분적인 폐지, 무효화된 조세의 부활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국고 수입을 올리려는 그의 노력은 전반적인 불만을 초래하였고, 특히 파리의 유력 인사에게 부과한 새로운 세금은 불만을 야기했으며 이는 프롱드의 난(Fronde, 1648~1653)을 촉진하는 결과를 낳았다. 5년 이상 지속된 프롱드의 난은 처음에는 파리 고등 법원 내의 과두(寡頭) 권력 독점 세력들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그 위세는 상층 귀족 계층으로 확산되어 이내 지방의 일반 대중들로부터도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 주요 원인은 마자랭을 공격하는 선동적 내용이 담긴 팸플릿 <마자리나드>(Mazarinades)의 영향 때문이었다. 마자랭은 두 차례나 궁정을 떠나야 했지만 자신이 세심하게 가르쳤던 어린 루이 14세와 안 도트리슈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간신히 재상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1653년 마침내 프롱드의 난이 진압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루이 14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린 루이 14세를 점차적으로 국정에 관여시켜 의회에 맞서 단호한 입장을 취하도록 장려하였으며 또한 콜베르(J.B. Colbert), 푸케(N. Fouquet), 텔리에(M.leTellier) 등 이후 루이 14세의 치세 동안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행정 참모들을 육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국왕 휘하의 감독관직을 부활하였고 온건한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질서 유지에 성공하였다. 1658년 솔로뉴 농민 반란과 같은 대중 봉기에 대처할 때에도 유화 정책을 취하였다.
〔명성과 성격〕 마자랭의 적들은 그의 탐욕을 비난하였다. 그는 메츠(Metz) 주교좌와 수많은 대수도원들을 손에 넣고 있었는데, 여기서 나오는 모든 수입은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가 재정이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에는 자신의 재산으로 국고를 충당하기도 하였다. 예술을 애호하였던 그는 훌륭한 예술품들을 많이 수집하였고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작품으로 파리에 있는 자신의 저택(현재는 국립 도서관)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또 그가 총리직을 수행하던 시기에 프랑스 영토로 편입된 4개 지역 출신의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4개 국가 대학' (Collège des Quatre-Nation)을 세웠으며, 1648년에는 왕립 회화 · 조각 아카데미를 세웠다.
마자랭은 자신의 적 레츠(Retz)를 파리 대주교좌에 복직시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교황과 오랜 기간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위그노파에 대해서는 화해 정책을 모색하여 그들에게 호의적인 칙령을 선포하였으며, 그들 가운데 뛰어난 사람들을 프랑스의 관리로 채용하기도 하였다. 안센주의자들과의 논쟁에서 그는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 교황의 교서 <쿰 오카시오네>(Cum Occasione, 1653)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이단적인 성격의 얀센주의에 맞서 정통 교리를 옹호하였으나, 얀센주의를 박해하는 것은 반대하였다. 루이 14세 집권 초 유럽 열강들 가운데 프랑스의 우위를 확립하고, 국내적으로는 절대 군주정을 확립하려 하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의 과업을 완수한 마자랭은 루이 14세에게 평화롭고 영광스러운 국가를 넘겨주고, 1661년 3월 9일 파리 근교 뱅센느(Vincenne)에서 5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 프랑스)

※ 참고문헌  A. Chéruel, Histoire de France SOUS le ministère de Mazarin, vol. 3, Paris, Hachette, 1882/ G. Dethan, Mazarin, un homme de paix, Paris, Imprimerie Nationale, 1981/P Goubert, Mazarin, Paris, Fayard, 1990/ M.N. Grand Mesnil, Mazarin, la Fronde et la presse 1647~1649, Paris, A. Collin, 1967/ P. Guth, Mazarin, Paris, Flammarion, 1972. 〔白仁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