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 실험적 · 경험적 과학 방법의 선구자로 평가됨. 음악가인 빈센조 갈릴레이의 아들로 이탈리아 피사(Pisa)에서 태어나 피렌체 부근의 발롬브로사(Vallombrosa) 수도원에서 시와 음악, 미술과 기술 등의 교육을 받았다. 1581년 피사 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후, 기하학에 심취하여 오스틸리오 리치(Ostilio Ricci)에게서 수학과 과학을 배웠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면서 1586년 유체 정역학(流體靜力學)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여 이탈리아 전역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589년 피사 대학 수학 강사가 된 후 동력학(動力學)을 연구, 무게가 서로 다른 물체는 서로 다른 속도로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그릇된 것임을 밝혔다. 1591/1592년 파도바(Padova) 대학 수학 교수가 되어 18년 간 재직하면서 물리학과 천문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갈릴레이는 계속 동력학을 연구하여 물체가 떨어질 때 일정하게 가속되며 떨어진다는 법칙, 곧 낙체(落體)의 등가속 법칙(等加速法則)을 발견하였다.
한편 갈릴레이는 일찍이 지구를 포함한 행성(行星)들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597년 4월 4일자 케플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세인의 조롱을 받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견해를 공표하지 못하였다. 1609년에는 네덜란드에서 발명된 망원경을 개량, 32배율의 망원경을 제작하여 처음으로 천체 관측에 사용하였는데, 이로써 달 표면은 고르지 않다는 것, 은하수는 성군(星群)이라는 것 등을 발견하였으며, 목성의 위성들을 관측하여 '시데라 메디세아' (메디치의 별들)라 명명하기도 하였다. 또한 태양의 흑점과 수성의 위상(位相), 그리고 토성의 고리를 관측하였다. 일련의 천체 관측을 통해 그는 지동설(地動說)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으며, 1610년 천체 관측 결과를 《별들의 사자(使者)》(The Starry Messenger)라는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그의 연구 발표는 철학자들과 천문학자들에게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그는 곧 파도바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고 피렌체로 돌아가 더욱 연구에 몰두하였다.
1611년 로마를 방문한 갈릴레이는 교황청의 쟁쟁한 명사들에게 자신의 망원경을 선보였다. 그들의 칭찬으로 용기를 얻은 그는 1613년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지지하는 자신의 입장을 더욱 명백히 밝히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피사 대학 학장인 델치와 철학자 콜롬베를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성서(여호 10, 12 ; 집회 1, 4)를 근거로 하여 그를 비난하였는데, 특히 콜롬베는 <지동설에 대한 반대>라는 논문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한 구절을 인용하여 그의 지동설을 논박하였다. 한편 갈릴레이는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인 자신의 제자 카스텔리(B. Castelil)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서의 말씀은 절대적이고 확고한 진리이다. 그러나 어리석을 수 있는 것은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 특히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이들이다. ··· 인간에게 이성과 이해의 능력을 선물로 주신 하느님께서 진리가 아닌 다른 어떤 길을 우리에게 지시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할 의무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하여 콜롬베를 논박하였다. 교황청의 검사성성(檢邪聖省)은 사정을 상세히 조사한 뒤 1616년 교령을 반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천체 궤도 운행에 관하여》(Derevolutionibus orbium caelestium)를 금서 처분하고,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이 어리석고 이단적이며 성서에 모순되므로 이 학설의 주장이나 전파를 불허한다고 선언하였다.
갈릴레이는 그 후 7년간 피렌체 부근 벨로스과르도(Bellosguardo)의 자택에서 은거하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는 교령이 해제되리라고 믿고 1624년 다시 로마에 갔으나 교황으로부터 교령의 해제 대신 편파적 토론을 안한다는 조건으로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에 대한 집필을 허가받았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수년의 각고 끝에 1632년 두 학설을 비교한 《두 주요 우주관에 대한 대화 -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 tolemaico ecopermicao)를 발표하여 실질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설을 옹호하였다. 그 결과 갈릴레이는 다시 소환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었고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는 선서를 한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석방될 때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위의 책은 1633년에 금서 처분되었다가 1822년 해제되었다.
갈릴레이는 1642년 1월 8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피렌체 교외의 자택에서 엄중한 감시 속에 여생을 보냈으며, 이때 파도바 시대의 연구를 집대성한 《두 개의 신(新)과학에 관한 대화》(Discorsi e dimostrazioni mathematiche intomo adue nuove scienze attenenti alla meccanica)를 완성하고 감시의 눈을 피해 1638년 네덜란드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1636년 시력을 잃었으나, 죽는 날까지도 자신의 이론을 제자들에게 대필시키며 연구를 계속하였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사건을 조사할 위원회의 설치를 지시하였고,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92년 10월 31일 교황은 이 특별위원회의 최종 보고를 교황청 과학원 회의에서 청취한 후, 갈릴레이에 대한 교적 회복을 공식으로 선언하고, 지난날의 유죄 판결은 "고통스러운 오해와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가톨릭 교회와 과학 사이의 비극적인 상호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로써 신앙과 과학 사이에 벌어졌던 역사적 분쟁은 359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 참고문헌 살림 편집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살림> 38, 1992, pp. 69~79/ 金明子 외, 《과학과 신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3/ J.J. Langford, 《NCE》 6/ R. Ravindra, 《ER》 5/ S. Drace, 《EP》3. 〔李官春〕
갈릴레이, 갈릴레오 (1564~1642)
Galilei, Galil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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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왼쪽)와 갈릴레이 망원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