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전동 본당

麻田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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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교구 소속의 침묵의 본당. 평안북도 신의주시 마전동 소재. 1939년 신의주(新義州)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으나 1942년 6월에 신의주 본당으로 다시 통합되었다. 관할 지역은 마전동을 중심으로 한 인근 외곽 지대. 〔역대 신부〕 초대 마컴(R. Markham, 馬) 레지날 드(1939~1940. 4), 2대 기본스(J. Gibbons, 盧) 요셉(1940. 4~?), 3대 크레이그(H. Craig, 奇) 후고(1940. ?~1941. 12), 임시 오기선(吳基先) 요셉(1942.2~6).
신의주 본당은 1937년 마전동에 초등 교육 기관인 성심학교(聖心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는데, 총 5학급 350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초기부터 인근 주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 학생수가 계속 증가하였으며, 이 일대의 거주 인구수도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신의주 본당 관할 공소였던 마전동 공소의 교세도 급격히 신장되자 평양교구에서는, 1939년 북하동 공소를 제외한 나머지 공소와 마전동 일대를 관할하도록 하기 위해 마전동 본당을 신설하였다.
신설 당시의 교세는 신자수 600명에 예비자수가 200여 명 정도였는데, 신의주 본당 보좌로 있던 메리놀회의 마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본당의 기반을 닦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성심학교의 운영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학생수도 450여 명으로 늘어났고, 교세도 계속 증가하여 점차 본당 규모가 확대되자 신의주 본당의 메리놀회 수녀들이 매주일 마전동 본당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1940년 7월에 메리놀회 수녀들이 철수하고 대신 같은 해 8월 13일에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가 분원을 설치하고 본당 사목 및 성심학교 서무(庶務)를 담당하였다.
성심학교의 발전과 함께 본당의 기틀이 잡혀 갈 무렵, 마컴 신부는 서포(西浦)의 교구 본부로 전임되고 기본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신자수는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여 1,000여 명 가량에 이르렀으나 기본스 신부는 몇 개월 만에 서포의 교구 본부로 전임되었고, 그 후임으로 신의주 본당 5대 주임으로 사목하던 크레이그 신부가 부임하였다. 크레이그 신부는 부임 직후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을 개설하였고, 일제 치하의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마전동 외곽 지대의 전교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41년 12월 8일 크레이그 신부를 비롯하여 신의주 · 마전동 일대에서 사목하던 메리놀회 소속 신부 및 수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수녀 2명이 모두 신의주 경찰서에 연행되어 감금됨에 따라 마전동 본당은 담당 신부가 없는 공석 본당이 되고 말았다.
1942년 2월 평양교구의 사목권이 임시로 서울교구로 이양되면서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가 신의주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당시 신의주 본당 사제관에는 평안북도에서 사목하고 있던 메리놀회 신부 전원이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오기선 신부는 임시로 마전동 본당에 거주하며 신의주 일대와 압록강 너머 안동(安東) 시내를 사목하였다. 그 해 4월 28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이 마전동 본당에서 신의주 본당으로 이전하였고, 6월에는 오기선 신부도 신의주 본당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로써 마전동 본당은 설립된 지 2년여 만에 신의주 본당으로 통합되었다. 한편 마전동 본당에서 운영하던 성심학교는 1942년 8월, 여름 방학을 맞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5년 9월에 다시 문을 열어 빈민층 자녀들을 대상으로 교육하였으나 1947년 가을, 북한 공산 정권에 의해 몰수당하였다. (→ 평양교구 ; 침묵의 교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평양교구사 편찬위원회 편, 《천주교평양교구사》, 분도출판사, 198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