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66~160년에 셀레우코스 왕조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대인 혁명. 마카베오가(家)는 다른 말로 '하스모네가(家)' 라고도 불리는데, 마따디아의 선조 이름인 아사모나이오스(Ασαμωναῖος, הַשַּׁמּוֹנָאִים)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마카베오가(또는 하스모네가)는 그 혁명의 지도자였던 유다와 그의 아버지 마따디아와 형제들(요한, 시몬, 엘르아잘, 요나단)이 속해 있는 가문의 이름이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마카베오 혁명의 기간을 유대가 독립된 시기인 기원전 142년까지로 보기도 한다.
〔명 칭〕 '마카베오' 라는 이름은 마따디아의 셋째 아들인 '유다' 의 별명이었다(1마카 2, 4). 이 별명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고, 그 의미에 대한 일치된 견해도 없다. 이 이름은 유대 전승 가운데 《조쉬폰》(Josippon,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을 발췌 번역한 책)에 나타나는데, 그곳에서는 이름을 מכבי로 쓰고 있다. 이 단어는 출애굽기 15장 11절의 "주님, 신들 가운데 누가 당신과 같으리이까?" (מי־כמכה באלם יהוה)라는 말의 앞 철자만으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망치로 치는 자' 또는 '불을 끄는 자' 라는 의미를 가진 '카바' (כָּבָה)를 어원으로 하고 있다. 이 이름은 유대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헬레니즘을 제거하는 사람으로서의 유다를 강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מכבי는 그 근거가 미흡하고 확실하지도 않다. 아마도 아람어 마카바(מַקְבָא) 즉 '망치 머리를 가진' 이란 뜻인 것 같다. 이 말은 732년에 사라센의 침입을 격퇴한 카알(Karl, 688?~741)의 별명인 마르텔(Martel, 망치)과 자주 비교되는데, 이런 경우에 이 이름은 망치가 못을 때리듯이 적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유다의 군사적인 승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이 이름이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하기 이전에 붙여진 것이고 '망치' 와 관계가 있다면, 유다의 머리가 망치와 닮았다는, 즉 그가 신체적으로 특이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카베오'라는 말의 정확한 유래가 무엇이든, 유다의 공적은 그의 별명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으로 항상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비록 해석이나 신빙성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카베오 혁명에 대한 직접적이고 세밀한 자료들은 많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 외에 마카베오 전 · 후서도 그에 관한 자료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곤경의 연속이었다. 이스라엘의 땅이 서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계속되었는데,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으로 그 절정에 달했다. 알렉산더 통치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문화는 헬레니즘이라는 하나의 지배적인 문화와 생활 방식의 영향하에 있게 되었고,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립보가 남긴 업적들을 토대로 아시아 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하였다. 알렉산더는 기원전 334년에 그라니쿠스 전투로 소아시아 지방을 정복하였고, 1년 후에는 시리아 국경 지대의 이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 코도마누스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패배시켰다. 그리고 다리우스 3세는 기원전 331년 결정적으로 패하였다. 기원전 332년에 유대인들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알렉산더에게 내주었으나, 그 후 즉시 사마리아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알렉산더는 사마리아성을 점령한 후 군사적인 식민지로 만든 반면에, 예루살렘에 대해서는 아주 호의적이었다. 그는 성전의 위치로 사마리아의 그리짐 산이 아닌 예루살렘을 지지하였으며, 사마리아의 중요한 몇몇 도시들을 유대 영토에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요세푸스에 의하면(Antiq. XI. viii, 4~6 ; Talmud Yom. 69a) 알렉산더가 띠로에서 이집트로 가던 도중 예루살렘으로 방향을 돌려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성전에 제물을 드렸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거대한 제국을 수천 명에 불과한 마케도니아인으로 지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케도니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한, 각 지방의 지방 자치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팔레스티나에서도 가능한 한 모든 곳에서 지방 자치가 용인되었다.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장군들은 자칭 알렉산더의 후계자(diadochi)라고 주장하면서 패권을 다투었는데, 마케도니아의 장군 셀레우코스는 바빌로니아를 장악하였고, 프톨레메우스(Ptolemaeus)는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마케도니아를 차지한 안티고누스(Antigous)는 제국 전체의 수위권을 주장하였으나 다른 장군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기원전 301년 입소스(Ipsos) 전쟁에서 안티고누스가 대패하자 제국은 분할되기 시작하였다. 이 후계자들의 전쟁 동안 팔레스티나에서도 수많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유대는 시리아의 일부로서 셀레우코스 1세의 통치 아래에 있었으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고 판단한 프톨레메우스에 의해 입소스 전쟁 후에 점령되었다. 이로써 유대와 예루살렘은 분할된 제국 중에서 가장 조직이 잘되어 있고 부유한 나라인 이집트의 일부가 되었다. 이 시기는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는데, 유대는 과거 페르시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작고 특수한 행정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프톨레메우스 왕조는 각 지방의 문화적 구조와 사회 · 정치적인 구조를 보존하였고, 조세와 재화의 유입이 보장될 경우에는 지방 자치를 허용하였다. 그런데 유대는 프톨레메우스 왕조에 대해 저항감을 가진 반면에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해서는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에 살았던 유대인들에게서 상당한 후원금을 받고 있었으며, 사제들은 서아시아 전역에 걸친 셀레 우코스의 중앙 집권을 선호했다. 그래서 기원전 249년경 제3차 시리아 전쟁에서 대사제 오니아스 2세는 프톨레메우스 3세를 반대하고 셀레우코스 2세(기원전 246~226) 편을 들었다. 그리고 이 전쟁이 셀레우코스 2세의 승리로 끝나자 이집트 제국에 바치던 공물을 바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이 사건은 요르단 동쪽에 살던 유대의 지주 가문 토비아가(家)의 개입을 초래하였는데, 프톨레메우스 왕조로부터 여러 종족으로 혼합 편성된 식민지 군대의 지휘관직을 맡고 있었던 그들은 느헤미야의 유대 재건 계획을 방해하였다. 토비아 가문의 요셉(오니아스의 조카)과 그의 아버지 토비아는 점점 증가하는 지중해 거래에서 상당한 이익을 얻으며 이집트와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니아스에 반대하였던 것이다. 요셉은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오니아스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알력의 결과로 요셉은 팔레스티나와 페니키아 전 지역의 각종 세금을 대리 징수하는 총 조세임차권자(賃借權者)가 되었으며, 유대의 세속적 권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수입이 좋은 이 세금 청부직은 유대의 부(富)를 증식시켰지만, 그 부는 상류 계층에만 집중적으로 귀속되었다. 토비아가의 책략과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가혹한 팔레스티나 착취는, 200년 전에 느헤미야가 개혁을 통해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던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요셉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히르가누스도 친(親)이집트 정책을 표방하였다.
기원전 220년경 셀레우코스 3세(기원전 226~223)를 이은 안티오쿠스 3세 대왕(기원전 223~187)은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시 한번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 정복을 위해 이집트 국경 지대인 라피아에서 프톨레메우스 4세와 싸움을 하였지만 참패를 당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유대 장로 회의는 기원전 201년경에 이집트를 반대하고 셀레우코스를 지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이집트의 군대는 몇몇 유대 도시들을 점령하고 많은 친(親)셀레우코스 유대인들을 처형하였으며, 예루살렘에서는 프톨레메우스 왕조를 지지하는 파와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지하는 파가 서로 적대시하며 싸웠다. 결국 기원전 200년경에 프톨레메우스 4세가 죽고 그의 뒤를 계승한 프톨레메우스 5세 에피파네스(Ptolemaeus V Epiphanes)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안티오쿠스 3세는 페니키아와 팔레스티나를 공격하여 파니움(Pamim)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를 적극적으로 환영한 유대는 이로써 영원히 프톨레메우스 왕조와 인연을 끊게 되었다. 반면에 안티오쿠스의 딸과 결혼한 프톨레메우스 5세는 팔레스티나의 공물이 자기 왕조의 금고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이 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친이집트 가문인 토비아의 요셉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는 유대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안티오쿠스 3세는 유대 공동체의 옛 특권을 보장할 것을 확약하였고 조상의 율법에 따라 사는 것도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유대의 세금을 3년 동안 면제해 주었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들의 복구를 약속하였으며, 사제와 서기관 등의 인두세와 왕실세를 면제해 주었다. 또 예루살렘의 성벽들과 성전을 재건하도록 목재를 면세로 제공해 주었으며 제물구입을 위한 기금을 마련해 주었고 유대인 포로들도 해방시켜 주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셀레우코스 왕조의 운명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팔레스티나를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준 이후로 계속해서 위협을 느낀 프톨레메우스 왕조가 로마와 연합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맞서서 안티오쿠스 3세는 마케도니아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그 무렵 마케도니아의 필립보는 로마와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의 전쟁에 개입하여 한니발을 지원하고 있었다. 결국 안티오쿠스 3세도 이 싸움에 개입하였으나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00~197)에서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필립보를 굴복시켰고 기원전 190년에 안티오쿠스 3세는 마그네시아(Magnesia) 전투에서 로마의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Schipio Asiaticus)에게 패배하였다. 그래서 안티오쿠스는 기원전 188년 아파메아(Apamea)에서 굴욕적인 평화 조약을 맺음으로써 소아시아 지역의 영토를 포기하고, 중요한 전쟁 준비지였던 엘레판틴도 넘겨주어야 했다. 또한 전쟁용 코끼리들과 함대를 전부 넘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12년에 걸쳐 갚아야 할 전쟁 배상금도 지불하여야만 했다. 이로써 부유했던 셀레우코스 왕가는 망하게 되었고, 유대에게 약속했던 세금 감면도 환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안티오쿠스 3세는 로마인들에게 지불할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엘람(Elam)의 한 신전을 약탈하다가 살해되었고(다니 11, 19 참조), 왕국의 엄청난 전쟁 부채는 그의 아들 셀레우코스 4세(기원전 187~175)가 떠맡게 되었다. 당시의 성전 재산은 이집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던 토비아가의 히르카누스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셀레우코스 4세는 부유한 예루살렘 성전 재산을 탐내어 그 재산을 몰수하려고 하였다. 결국 그는 마그네시아 전쟁 이후 로마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기원전 175~164)의 지원을 받기 위하여 자기 아들 데메트리우스(Demetrius)를 인질로 보내고 동생을 로마에서 돌아오도록 한 일 때문에 헬리오도루스에게 살해당하였다.
〔유대 종교 의식 금지〕 왕조를 일으키기 위하여 서둘러 왕좌에 오른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그의 선왕(先王) 안티오쿠스 3세의 정치 성향을 이어받았다. 이는 그의 헬레니즘적인 기질에 맞았지만 서아시아를 지배하고자 하는 로마의 야심을 알고 있었기에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쇠퇴일로에 놓인 이집트 정복을 일차적인 목표로 정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원정을 떠나기 전에 이미 프톨레메우스 왕조의 성전 영지였던 유대를 헬레니즘화시키려고 하였다. 보수적인 사독(Sadok) 계열의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의 동생 야손(Jason)은 진보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유대는 정치적으로 친셀레우코스파와 친이집트파로 구분되었지만 헬레니즘 문화를 모방하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손은 왕에게 헬레니즘화를 위한 조치들을 제안하였고, 기원전 174년에는 유능한 협력자로서 대사제의 지위를 인계받았다. 그 후 야손은 예루살렘과 성전 성곽 아래에 체육 교육과 예술적이며 군사적인 훈련을 위하여 체육장(gymmasium)을 세웠으며, 헬레니즘 문화권에 속했던 도시들은 모두 이 시설들을 갖추게 하였다. 한편 공격적인 안티오쿠스의 정책을 충족시키지 못한 야손은 기원전 171년 성전 경비대장의 형제요 사제 가문인지 의심스러운 메넬라우스(Menelaus)에 의해 축출되었다. 메넬라우스는 정치에 많은 관심이 있었으므로 토비아 가문의 후원을 입어 전쟁 자금이 필요한 안티오쿠스로부터 대사제직을 사들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야손의 지지자들이 저항하였지만, 안티오쿠스가 예루살렘에 군대를 보냈기 때문에 저지당하였다. 그러나 안티오쿠스의 독단적인 행동과 메넬라우스의 분별없는 행동은 헬레니즘으로 하나였던 사람들을 갈라놓고 말았다.
안티오쿠스는 기원전 170~168년 사이에 두 번이나 이집트와 전쟁을 일으켰는데, 기원전 170~169년의 제 1차 공격에서 동부 국경의 요새 도시인 펠루시움과 옛 수도인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한 이집트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려는 지나친 모험을 원하지 않았던 그는 야손이 메넬라우스를 축출하려 한다는 전갈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와서 야손을 쫓아내고 성전 재물을 몰수했으며, 메넬라우스를 원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과 그리짐 산 위에 감독관들을 파견하였다. 로마가 마케도니아와 전쟁 중이던 기원전 168년에는 제2차 이집트 원정에 나서 알렉산드리아로 진격하였으나, 프톨레메우스 왕가의 강력한 저항과 로마의 회군 강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리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인 위상이 약화된 안티오쿠스 4세는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 유대를 제의적(祭儀的)으로 헬레니즘화시킴으로써 팔레스티나를 완전히 자신에게 예속시키려 하였는데, 이러한 조치는 선왕인 안티오쿠스 3세에 의해 보장되었던 종교의 자유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인생의 예술로서 시작되었던 헬레니즘 운동이 이제는 소수의 교육받은 헬라주의자들과 외세(外勢)의 독점으로 전락하였고, 수많은 백성들은 무자비하게 착취당하였고 재산마저 약탈당하였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안티오쿠스 4세는 성벽을 헐어 버리고 그곳에 더 큰 요새 아크라(Acra, 훗날 안토니아로 불림)를 세우고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비대를 배치하여 헬라주의 성향을 가진 소수파를 보호하였다. 이 소수의 헬라주의자들과 함께 안티오쿠스는 기원전 167년에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을 억압하기 위해 헬레니즘적인 제의 의식을 도입하였다. 아테네 출신의 원로(2마카 6, 1)를 앞세워 시작한 이 정책으로 예루살렘의 번제 제단 위에는 제우스 신의 제단이 세워졌고, 기원전 167년 12월(기슬레우 월 : 1마카 1, 54. 59)이래로 매달 25일에는 이곳에서 희생 제사가 거행되었다. 유대의 다른 지역에도 헬레니즘적인 제단들이 세워져 제물들이 봉헌되었고(1마카 1, 47. 54), 사마리아의 그리짐 성전은 제우스에게 봉헌되었으며(2마카 6, 2), 시리아의 도시들에 거주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국가 제의에 참여하도록 강요받았다(2마카 6, 8). 이러한 조처에는 유대교의 전통 의식과 신성한 문헌들에 대한 억압이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다(2마카 6장). 성전 희생 제사와 안식일 준수, 그리고 할례 의식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의 사본을 폐기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였다.
〔마카베오 혁명〕 이러한 조치에 대한 반발은 지방에서 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왕의 헬레니즘화에 반발하는 유대인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군사 식민지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분배하였으므로(1마카 3, 36), 본래의 토지 소유자들은 자기 땅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는 거류민이 되어 광야로 떠나갔다(2마카 5, 27). 그런데 이것은 동시에 세금 거부와 수동적인 저항의 형태로 나타난 혁명의 시작이었다(1마카 2, 29-30).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행동주의자들도 나타났다. 그들 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모데인(Modein)에서 살던 사제인 마따디아와 그의 가족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신성모독이 범해지는 것을 본 마따디아는 탄식하면서 다섯 아들과 함께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버린 다음, 몸에 삼베옷을 두르고 슬피 통곡하였다"(1마카 2, 14). 왕의 관리들이 이교 제사를 드리게 하려고 모데인에 왔을 때 마따디아는 그들과 이교 제사를 드리려고 한 유대인을 죽인 후, 그 제단을 헐어 버리고 거리에 나서서 "율법에 대한 열성이 있고,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나를 따라 나서시오"(1마카 2, 27) 하고 외쳤다. 마따디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산으로 도망감으로써 드디어 반란의 횃불은 점화되었다. 마따디아는 곧 많은 유대인들과 합세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열심이었던 하시딤(Hasidim)파도 있었는데(1마카 2. 42), 이들은 본래 인간의 노력을 믿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 신뢰하고 있었지만(다니 11, 34) 싸워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따디아와 그를 따르는 이들은 게릴라전을 펴며 헬라 세력에 동조하는 주민들을 기습공격하였고, 이방신의 제단들을 파괴하였으며 어린이들에게 할례를 실시하였다.
마따디아가 죽은 다음 기원전 166년에 지휘권을 인수한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는 여러 면에서 다윗과 비슷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용감하고 건장한 그는 이제까지 산발적이었던 모든 행동들을 조직화하여 저항 세력을 형성하였고, 유대인들의 저항을 전면적인 독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이 투쟁이 성공하였기 때문에 그의 별명을 따서 이 저항을 일반적으로 '마카베오 전쟁' 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다는 사마리아의 통치자 아폴로니우스가 그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아폴로니우스를 죽이고 그들을 패주시켰으며, 세론 장군이 지휘하는 시리아의 군대도 벳-호른(Beth-horn)에서 패배시켰다. 안티오쿠스는 이때 처음으로 유대의 반란이 심각함을 알게 되었으나 이 무렵 그는 국고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파르티아(Parthia, 카스피해 남동쪽에 살던 민족)인들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리시아(Lysia)를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유대의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리시아는 기원전 165년에 유다 마카베오의 군대를 진압하였으나, 곧 유다 마카베오는 다시 리시아에게 대항하여 엠마오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1마카 3, 27-4, 25) 수많은 무기들을 노획하였다. 리시아의 군대가 또다시 진격해 왔지만 유대 남부의 벳-수르(Beth-Zur)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그들에게 전투에서의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강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이 성공을 감사드리고, 하느님의 일에 봉사하겠다는 신앙도 굳게 해주었다.
〔하누카〕 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아크라의 주민들을 포위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든 이방적인 것들을 없애고 정화하였다. 제우스 신을 위한 제의에 쓰이던 것을 모두 제거하고 더럽혀진 제단도 부수어 버리고 "예언자가 나타나 그 처리 방법을 지시할 때까지"(1마카 4, 46) 구석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율법에 충실하고 흠이 없는 사제들' 을 뽑았고, 거룩한 제물들을 새로 마련하였다. 성전이 모독된 지 3년이 되는 해인 기원전 164년 12월에는 축제의 환희 속에서 8일 동안 장엄한 성전 봉헌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전 재봉헌식을 하누카(Hanukkah, חֲנֻכָּה)라고 하는데 유대인들은 이 봉헌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 후 해마다 이 예식을 거행하고 있다. 유다 마카베오는 성전을 더 잘 보호하기 위하여 시온 산과 남쪽의 경계선 지역에 있는 벳-수르에 튼튼한 요새를 만들었다(1마카 4, 60-61). 이로써 종교적 독립을 위한 유대인들의 투쟁은 성공적인 출발을 한 셈이다.
〔독립 전쟁〕 이들의 혁명은 이제 박해받는 사람들의 방어전에서 정복을 하는 공격전으로 전환되었다. 유다는 비참한 상황에 있던 이두메아(ldumaea)의 유대인들에게로 출전하였고, 동쪽의 길르앗에는 자기 아우인 요나단과 함께 출전하였으며 북쪽의 갈릴레아에는 그의 형 시몬이 출전하였다. 이들은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을 쫓아내거나 무력하게 만들고 그 지역의 세력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유다 마카베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아크라 지역을 포위한 사이에 안티오쿠스 4세가 기원전 164년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는 아직 나이가 어린 안티오쿠스 5세 유파토르(Antiochus V Eupator)의 후견인으로 필립을 임명하였는데, 안티오쿠스 5세의 스승인 리시아와는 경쟁 관계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리시아는 두번째로 유대 원정에 나서게 되었다. 유다 마카베오는 리시아의 군대를 당해 낼 수가 없어 예루살렘으로 후퇴하였다. 벳-수르는 리시아의 수중에 들어갔고, 예루살렘도 포위되어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절호의 기회에 자기의 경쟁자인 필립이 왕위를 획득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리시아는 할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기원전 162년에 유다 마카베오와 평화 협상을 맺었다. 성전 구역의 성벽은 붕괴되었고 아크라는 계속 남아 있었으나 유대인들은 조상들의 율법에 따라 자유롭게 종교 행사를 거행할 수 있도록 보장되었다.
이로써 마카베오 일가가 일으킨 혁명의 근본적인 목적은 성취되었으나 셀레우코스 제국 안에서 일어난 내란때문에 또다시 위험에 빠지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의 조카이자 로마에 인질로 있던 데메트리우스가 역사가 폴리비우스의 도움으로 도망쳐 트리폴리에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안티오키아에서 안티오쿠스 5세와 리시아를 체포하여 처형한 데메트리우스는 기원전 162년에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Demetius I Soter)가 되어 왕좌에 올랐다. 그는 유대인의 종교 자유까지 보장하여 주었지만, 유대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유대의 완전한 독립을 마카베오 혁명의 목표로 삼았다. 데메트리우스는 사령관 바키데스(Bacchides)를 시켜서 알키모스(Alcimus)를 대사제로 삼고, 유다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을 처형하도록 이들을 파견하였다. 하시딤을 포함한 유대 학자들은 시리아와의 평화를 희망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자유에 만족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독립까지 원했던 유다의 소망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알키모스와 바키데스로부터 종교적 자유를 보장하는 약속을 받아들였던 바로 그날, 그들 가운데 60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1마카 7, 12-18), 유다 마카베오와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았다. 알키모스는 유다 마카베오의 활동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안티오키아로 되돌아갔고, 데메트리우스는 "명성 높은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인 니가노르(Nicanor)를 유대 땅으로 보내어 그 민족을 없애 버리라고 명령하였다. 니가노르는 이스라엘을 미워할 뿐 아니라 적대시해 오던 사람이다" (1마카 7. 26). 그러나 니가노르의 군대는 카파르살라마에서 유다 마카베오 군대에게 패주하였고, 그 후 곧 예루살렘 북쪽 7km 지점에 있는 아다사(Adasa)에서 기습을 받아 격파당하였다. 그런데 유다 마카베오는 "로마인들은 누구나 그들과 동맹을 맺는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말을 듣고 로마와의 우호 협정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로마 원로원은 유다의 이 제안을 수락하였다. 아직 통치권을 확립하지 못한 데메트리우스는 마카베오 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기원전 160년에 다시 바키데스와 알키모스가 이끄는 대군을 유대에 파견하였다. 이번에는 그들의 병력이 너무도 우세하였기 때문에 유다 마카베오가 당해 낼 수 없었으며, 더구나 적군이 우세하다고 판단한 그의 심복들이 많이 도망가 버려 엘라사(Elasa)에서 유다 마카베오가 대적하였을 때는 겨우 800명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이 전투에서 유다 마카베오는 전사하였고, 그의 동생 요나단이 형인 시몬의 도움을 받아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1마카 9, 1).
〔하스모네 가문〕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후에도 예루살렘 제사 공동체의 회복된 특권은 제한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다를 추종하던 사람들과 가족들은 심한 박해를 받게 되었고, 바키데스는 유다의 계승자로 임명된 그의 동생 요나단을 체포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유다가 죽은 다음의 상황은 처음 혁명이 일어날 때의 상황과 비슷하였는데, 전우들은 사막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게릴라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데메트리우스 1세가 로마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안티오쿠스 왕가 출신의 알렉산더 발라스(Alexander Balas)와 경쟁 관계에 놓이자 유대에 대한 시리아의 압력은 점차로 완화되었다. 이에 요나단이 발라스 편으로 전향하자, 두 경쟁자들은 모두 지나칠 정도로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둘 다 요나단의 도움을 받으려고 노력하였다. 요나단은 아주 노련하면서도 주저 없이 이 둘을 서로 이용하였다. 한편 요나단을 체포하려고 찾던 바키데스는 요나단의 화평 제의를 받아들여 예루살렘 동북방 10km 지점에 있는 미그맛(Michmash)에 가서 살도록 허락하였으며 옛 판관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 백성들을 살게 하였다(1마카 9, 70-73). 미그맛에서 요나단은 판관의 역할을 하였고, 그는 의식적으로 이스라엘의 고대 전통과 자신을 연결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곳에서 하스몬(Hasmon) 일가의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이스라엘-유대의 국가와 왕권이 놀라울 정도로 빨리 이룩되었다.
한편, 데메트리우스로부터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요나단은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그곳의 합법적인 통치자로 행동하면서, 시온을 요새로 만들고 아크라의 시민들을 위협하였다. 그 후 프톨레메우스 왕조에게서 왕으로 임명된 알렉산더 발라스는 요나단을 대사제로 임명하고 '왕의 친구 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발라스와 경쟁 관계에 있던 데메트리우스는 예루살렘을 거룩한 도시로 해방시키고 유대인들의 많은 세금을 면제해 주었으며, 이전에 사마리아에 속해 있었던 세 지역들을 예루살렘으로 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사제를 온 유대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하는 등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또 발라스와 프톨레메우스 6세는 요나단에게 진홍색 사제복과 왕관을 보내어 하스모네 가문이 요구한 왕의 권위를 인정하였는데, 이 때문에 마카베오 혁명을 지원하던 사람들은 실망하여 분리되어 나가기도 했다.
데메트리우스와의 싸움에서 발라스가 승리하고 왕이 되자(기원전 150~145) 요나단은 발라스의 지원을 받는 정책을 취하였으며, 발라스는 결혼 동맹을 통해 이집트 왕가를 얻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가는 지속적으로 내부의 혼란을 겪어야만 했고, 이러한 상황은 요나단의 세력을 형성하도록 촉진하였다. 기원전 147년 시리아에 상륙한 데메트리우스 1세의 아들인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에 의해 기원전 145년에 안티오키아에서 발라스가 살해되자, 요나단은 새 통치자가 된 니카토르의 호의를 얻어 사마리아의 남부 지역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라스의 아들 안티오쿠스 6세는 곧 이어 데메트리우스 2세에 대항하였는데, 이때 요나단은 다시 외교 전략을 펴 아크라를 넘겨주지 않은 데메트리우스를 버리고 왕의 직무를 대행하였던 트리폰(Trphon)의 편에 섰다. 그리고 로마와의 우호적인 결속을 새롭게 하기 위해 사절을 로마로 보냈고 처음으로 스파르타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으며, 예루살렘과 그 주변을 요새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요나단은 이러한 상황에 오히려 위협을 느낀 트리폰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데메트리우스에게서 유대인들의 '대사제요 종족장' 으로 인정받은(1마카 13, 35-42 ; 15, 1-9) 요나단의 형 시몬(기원전 143~134)은, 예루살렘과 주변의 요새들을 재건하고 식량을 비축하였으며, 트리폰의 행위들이 약탈적이라는 이유로 데메트리우스 2세 편에 서서 트리폰에 대한 공동 투쟁에 나섰다. 그러자 데메트리우스는 시몬과의 협정에 동의하고 유대에 대한 시리아의 모든 요구를 전적으로 단념하였다. 170년 만에 이방인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의 공문서와 계약서에 "유대인의 새 사제이며 사령관이며 지도자인 시몬 제1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1마카 13, 36-42). 그리고 증오의 대상이었던 아크라도 점령하였다.
〔의 의〕 마카베오 가문의 독립 전쟁은 유대 역사뿐만 아니라 모든 점에서 영향을 주었다. 팔레스티나의 유대인들은 주변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자치적인 나라 형태를 지니게 되었고, 하스모네가의 독립 전쟁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박해를 극복하고 그들의 종교를 계속유지하여 당시의 그리스 · 로마 문화와 역사 안에서 결정적으로 유일신의 영향을 보존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결과는 유대 지역을 넘어 영향을 미쳤고, 독립 전쟁 이후의 하스모네가 정책을 통하여 유대인들은 역사 안에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 마카베오서)
※ 참고문헌 U. Rappaport · P.L. Redditt, Maccabeus, 《ABD》4, p. 4541/ U. Rappaport, Maccabean Revolt, 《ABD》 4, pp. 433~439/ Moshe Stern, Hasmoneans, 《EJ》 7, pp. 1455~1457/ P.F. Ellis, History of the Machabees, 《NCE》 9, pp. 24~27/ H.M. Orlinsky, 《IDB》 3, pp. 197~201/ 존 브라이트, 김윤주 역, 《이스라엘의 歷史》 下, 분도출판사, pp. 264~291/ E. Caveignac · P. Grelot · J. Briend, 서인석 역, 《성서의 역사적 배경》 3, 성바오로출판사, pp. 129~148/ B.W. Anderson, 이성배 역, 《구약성서의 이해》 3, 성바오로출판사, 1983/ N.K. Gottwald, 김상기 역, 《히브리 성서》 2, 한국신학연구소, 1987/ A.H.J. Guneweg, 문희석 역, 《이스라엘 역사》, 한국신학연구소, 1975. 〔李忠熙〕
마카베오가 독립 전쟁
家 獨立戰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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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마카베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