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

〔그〕Μακεδονία · 〔영〕Macedonia

글자 크기
4
마케도니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알렉산더 대왕.
1 / 3

마케도니아의 영토를 크게 확장한 알렉산더 대왕.

에게해와 아드리아해 사이(지금의 발칸 반도)에 있던 지방. 구성 민족이 복잡하고 지리적으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역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부터 격동의 역사를 겪었다. 마케도니아는 항상 고정된 지역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 영역이 변하였는데,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 시기에는 서쪽으로는 일리리아, 북동쪽으로는 트라키아,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카이아 지방이 그 경계를 이루었다. 지형적으로 대부분이 구릉이나 산악 지대이며 주요 도시들은 에게해 연안에 입지해 있다.
〔마케도니아 왕국〕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에 의하면 마케도니아 왕국은 기원전 7세기 초엽에 페르디카스 1세에 의해 세워져 6명의 후손들이 차례로 계승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5세기경에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어를 받아들이고 통일 왕국을 세웠는데, 페르디카스 1세의 후손들이 통치한 이후로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하였고, 이 기간이 지난 후 아민타스 3세(기원전 393~370/369)의 아들 필립보 2세가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칙령을 고쳐 스스로 왕이 되었고(기원전 359~336) 마케도니아를 그리스내에서 강력한 위치로 부각시켰다. 필립보 2세와 올림피아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3세(기원전 336~323)는 그의 아버지가 피살되자 약관 20세의 나이로 전 왕국의 통치권을 물려받아 단시일 내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마케도니아의 영토를 나일 강과 인더스 강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넓혔다. 성서에 마케도니아인들이 등장하는 것은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로 영토를 확장시키면서부터이다.
비록 직접적인 거명은 아니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다니엘서의 환시들 안에 자주 등장한다. 느부갓네살의 꿈에 그의 제국은 온 천하를 다스리는 '놋쇠로 된 나라' (다니2, 39)로 나오고, 다니엘의 심판의 환시에서는 표범같이 생긴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다(다니 7, 6). 다니엘서 8장 5-8절에서 알렉산더 대왕은 서쪽에서 온 숫염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숫염소의 두 눈 사이에 있는 '외뿔' 로, 또 11장 3절에는 '용감한 왕' 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카베오 상 1장 1-7절에는 그의 경력을 압축하여 요약해 놓았으며, 알렉산더 대왕이 엘리마이스(Elymais)의 신전 안에 무척 많은 보물을 남겨 놓았다고 6장 2절에 기록되어 있다. 에스델서에서 하만은 '마케도니아 사람' (16, 10)으로 소개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자 그를 따르던 장군들이 제국의 각 지방을 분할 통치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제국 전체를 차지하려는 전쟁(기원전 321~301)을 벌였다. 마케도니아 자체는 제국의 중심부로 계속 남아 있었기에 그리스 통치권과 함께 이곳을 쟁취하고자 하는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유럽 지역 섭정인 안티파트로스와 그의 아들 카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가까스로 통치해 나갔으나 기원전 297년 카산드로스가 죽자 마케도니아는 내란을 겪게 되었다. 기원전 294년부터 288년까지 6년 동안 디미트리오스 1세 폴리오케테스가 통치하고 난 후 마케도니아는 다시 내란 상태에 빠졌으며 북쪽의 약탈자인 갈라티아인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기원전 277년 디미트리오스의 유능한 아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가 갈라티아인을 물리쳐 마케도니아 군대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았으며,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는 동안(기원전 277~168) 나라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였다.
필립보 5세(기원전 221~179)와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기원전 179~168) 때에 걸쳐 일어난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에 대패한 마케도니아 왕국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4개의 자치 공화국으로 분리되었다가 점차 이들 지역을 한 행정 단위로 하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4개의 공화국은 정치적 의미를 상실하기는 하였지만 그 후에도 계속 지형적으로 한 나라가 네 지방으로 분할되었다고 한다. 사도 행전 16장 12절에서 필립비가 '마케도니아 첫 지역의 도시' 로 소개되고 있으나, 사실은 마케도니아의 수도이자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은 데살로니카였고 암피폴리스(Amphipolis)가 첫 지역의 주요 도시였다. 다만 필립비는 이 지역에 속하여 있었다.
〔마케도니아 속주〕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거대한 군사 도로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냐시아 국도이다. 이 국도는 아드리아해 연안에 있는 도시 디라키움과 아폴로니아를 경유하여 암피폴리스, 필립비, 네아폴리스(Neapolis, 오늘날의 카발라), 그리고 그 너머까지 계속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 길을 따라서 네아폴리스로부터 필립비, 암피폴리스, 그리고 데살로니카를 여행하였음이 틀림없다(사도 16, 11-12 : 17, 1).
마케도니아 속주는 로마가 서아시아로 세력을 팽창하는 데 전초 기지 역할을 하였다. 로마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1마카 8, 1-5). 기원전 1세기경 로마 역사에 나타난 많은 전투들은 마케도니아 땅에서 벌어졌다.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체사르 사이의 교전이 기원전 48년에 마케도니아의 디라키움과 파르살루스에서 벌어졌으며, 기원전 42년 필립비 전투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를 무찔렀다.
〔마케도니아의 교회들〕 설립 : 신약성서의 편지들 중에서 마케도니아에 보낸 세 통의 편지 가운데 둘은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그리고 하나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외에 바오로의 다른 편지들 안에도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2고린 8, 1-5 ; 11, 9 ;로마 15, 26), 여기서 바오로는 이들 교회의 너그러운 처사를 칭찬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에는 사도 시대 초기에 복음이 전해졌다. 바오로와 그의 동료들은 처음으로 이곳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복음 선포를 시작할 무렵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났을 때" (필립 4, 15)라는 말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바오로는 그의 사도 활동 초기에 마케도니아에 복음을 전한 듯하다. 그렇다면 바오로의 '복음선포를 시작할 무렵' 이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 라기보다는 '여러분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사도 행전은 마케도니아에 복음이 선포된 때가 50년 경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바오로와 두 명의 동료들(실라와 디모테오)은 미시아(Mysia)에서 비티니아(Bithynia)로 가려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들에게 허락하지 않아서 트로아스(Troas)로 갔다. 그날 밤 바오로에게 현시가 나타나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그에게 청하기를,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즉각 마케도니아로 떠나려고 했다" (사도 16, 6-10). 그들은 배를 타고 에냐시아 국도의 동쪽 끝에 있는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았다. 그 후 바오로와 일행은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km 내륙의 도시 필립비에서 전도하여 어느 정도의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반 시민 및 치안관들과 마찰을 빚게 되어 필립비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들은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서쪽에 있는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갔다. 바오로는 습관대로 유대인들 회당에 들어가서 세 번의 안식일에 걸쳐 설교하여 많은 시민들을 입교시켰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는 바람에 바오로 일행은 데살로니카에서 서쪽으로 80km 가량 떨어진 도시 베레아(Beroea)로 피신하였다(사도 17, 1-10 ; 1데살 2, 13-16). 그러나 데살로니카의 유대인들이 그곳까지 와서 군중들을 선동하고 들볶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떠나야 했다(사도 17, 10-15).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첫 방문하고 큰 실망을 안고 돌아왔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마케도니아에 복음을 전파하러 갔다고 믿었던 그는, 가는 도시마다 매도(罵倒)와 위협으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바오로의 전도로 개종한 사람들 또한 그곳의 과격한 사람들에 의해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나는 허약하고 두려웠으며 무척 떨기도 하였습니다"(1고린 2, 3)라는 바오로의 고백을 능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의 필립비와 데살로니카에 세운 교회들은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발전 :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비록 작고 미약해 보였으나 바오로가 급작스럽게 떠나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해갔다. 그들은 반대자들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믿음을 고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고도 설득력 있는 증언을 통해 믿음을 키워 나갔다. 바오로 일행이 데살로니카의 개종자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눈 지 불과 몇 주일 후 바오로는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에 메아리쳤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는 여러분의 신앙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1데살 1, 8)라고 전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여교우들도 남자들과 동등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리디아, 유오디아 그리고 신디케의 활약(사도 16, 13-15 ; 필립 4, 2-3)은 데살로니카 교회 창립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는데, 사도 행전의 저자는 여교우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며' (사도 17, 4) 베레아의 '유력한 헬라 부인들이' (사도 17, 12) 믿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여자들이 특별한 역할을 한 것은 어느 정도 독립적인 위치를 누렸던 마케도니아의 전통적인 관습과 일치한다. 지배 계층에 있는 여자들은 남편들로부터 독립되어 특사, 성전 건축, 도시 건설, 군대 및 요새 소유, 때에 따라서는 섭정 등의 역할을 하였으며, 하위 계층의 여자 자유민들에게도 이러한 관례가 적용되었다.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협력 : 사도 바오로의 선교에 힘입어 개종한 마케도니아 그리스도인들의 친절한 행위가 성서에서 자주 발견된다.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필립비를 떠나 데살로니카로 갔을 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고(필립 4, 16), 고린토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바오로에게 아쉬운 것을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 (2고린 11, 9)이 채워 주었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의 형제들이란 필립비 교회의 신자들로서, 바오로는 필립비 교회 이외에는 도움을 받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바오로는 선교할 때 스스로 생계비와 선교비를 조달하여 신자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였고 무엇보다도 수입을 노려 선교한다는 오해를 피하려 했다(1데살 2, 9 ; 1고린 9, 4-18).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떠나 온 후 5년 동안 그곳 교회를 방문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를 떠나 온 후 고린토에서 18개월 간 머물렀으며 그 후 고린토에서 에게해를 건너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에서 3년 가량 사도직을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이방인 교우들을 상대로 예루살렘 모(母) 교회를 위한 자선 모금 운동을 벌였다.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디모테오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케도니아로 보냈을 때(사도 19, 22),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이러한 모금 운동 계획을 알리는 것도 그들의 임무 중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바오로의 요청에 성심껏 호응하였다. 후에 바오로는 이들 교회의 호의에 의해 고린토 교회가 고무되도록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베풀어진 하느님의 은총을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고 싶습니다. 혹심한 환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그들의 밑바닥 가난은 그들의 풍부한 너그러움으로 바뀌어 넘쳐흘렀습니다. 그들은 힘이 닿는 데까지, 아니 내가 증언합니다마는, 능력 이상으로 온전히 자발적으로, 은혜로운 선행 곧 성도들을 위한 봉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우리에게 간절히 거듭거듭 요청하였습니다" (2고린 8, 1-4).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 교회들을 둘러보았고 고린토로 가서 석달 가량 머물렀다(1고린 16, 5 ; 2고린 1, 16 ; 2, 13 ; 7, 5 ; 사도 20, 1-3). 그 후 바오로는 필립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 모 교회를 위한 모금 운동에 협력한 교회 지도자들로는 베레아 사람 소바드로(Sopa-ter), 데살로니카 사람 아리스다르코(Aristarchus)와 세군도(Secundus) 등이 있다(사도 20, 4).
사도 이후 시대 :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마케도니아 교회들은 사도 이후 시대에 특별한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으나 사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충실히 실천하였다. 에냐시아 국도에 위치한 교회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동서로 여행할 때에 편의를 제공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훌륭한 예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형을 받고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의 경우이다. 이냐시오는 115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가는 도중에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났다. 그는 소아시아를 거쳐 트로아스에서 배를 타고 네아폴리스로 간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아드리아해에 도착하였다. 마케도니아 지방에 도착한 그는 65년 전 바오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처음으로 필립비를 방문하였다. 이냐시오가 필립비에 체류했다는 상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필립비 신자들은 성심껏 그를 도왔으며 이냐시오가 출발한 후에도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에게 이냐시오의 편지 사본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폴리카르포의 답장은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는 필립비 신자들이 진정한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사슬에 매여 압송되어 가는 이냐시오와 그의 일행에게 호의를 베풀었음을 알고 기뻐하였다. 그는 "일찍이 뿌리깊고 평판 좋은 여러분의 신앙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열매를 맺는 것을 보니 기쁘다"라고 자신의 편지에 쓰고 있다(Polyc, Eph. 1, 1-2). 이는 바오로와그의 동료들이 뿌렸던 신앙의 씨가 자라나 결실을 맺은 증거이다.
※ 참고문헌  G. Bornkamm, trans. by M.G. Stalker, Paul, New York, Harper & Row, 1971/ F.F. Bruce, 《ABD》 4, pp. 454~4571 E.H. Maly, 《NCE》 9,p. 14/ 《NEB》7, pp. 621 ~622. 〔全崇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