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정치 사상가. 근대 정치학의 창시자. 1469년 다수의 고위 행정관들을 배출한 피렌체(Firenze)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나, 1512년 메디치(Medici) 가문이 복귀할 때까지 피렌체 공화국 정부 관리로 근무했는데 29세의 나이로 제2 서기관직에 올랐으며,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 행정관의 비서로 일했다. 그가 피렌체 공화국 정부에서 근무한 것으로 보아 고전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실하나 학교보다는 집에서 독학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쟁에 참가하기도 하였고 외교 사절로서 각국을 왕래하였는데, 이때에 그는 당시 일반적이었던 용병제를 폐지하고 충성심이 강한 징병에 의한 민병제를 주장하였고, 유럽 각국에 근무하면서 적나라한 정치 권력의 현실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이와 같은 당시의 정치 권력의 현실적 전개와 관련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까지의 이탈리아는 정치적 혼란의 시대였고, 낡은 질서가 부정되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질서가 창조되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탈리아는 외부적으로 프랑스 · 스페인 · 오스트리아 등의 왕권 확장의 각축장으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나폴리 · 밀라노 · 베네치아 · 피렌체 · 교황령 등의 세력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내부적 분열은 과거와는 그 양상이 달랐다. 각국은 외국 세력과 결탁하지 않고서는 독립 유지가 불가능하였다. 교황령이 세속화해서 최강의 국가였으나 그것도 프랑스의 지원으로 가능했으며, 따라서 교황령의 독립도 외형상의 것에 불과하였다. 또한 각국 내부에 있어서도 당파적 대립이 격화되었으며 급격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외교 사절로서의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 내의 많은 통치자들과 접촉하였으며, 피렌체를 위협하고 있던 체자레 보르지아(C. Borgia)와도 수주일 간을 같이 지내기도 하였다. 프랑스에 4번, 독일에 2번 파견되었던 그는, 이를 바탕으로 정치 제도와 정치 권력의 신장과 상호 관계에 관한 예리한 분석이 포함된 보고서를 집필하였다. 1512년 메디치 가문이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정치 권력을 다시 장악하게 되자, 마키아벨리는 반(反)메디치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를 받았고 출감 후에도 많은 제약에 시달려야 했다. 메디치가문으로부터 자비를 얻으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외의 사유지에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이었으나 추방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그는 운명적으로 쇠퇴해 가는 이탈리아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그가 경험했던 정치적 사실을 토대로 자기의 사상을 심화 · 발전시키게 되었기 때문이다. 1527년 메디치 가문이 쫓겨 난 후 옛 관직을 되찾을 희망을 갖기도 하였으나, 결국 무산되어 마지막 좌절을 맛본 마키아벨리는 1개월 후 병사하고 말았다.
〔사 상〕 그의 사상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저작들이 대변해 주고 있다. 대부분 1512년 이후 집필되었는데, 《전술론》(Dell'arte della guerra, 1521), 1492년까지의 피렌체의 역사를 인본주의적인 관점으로 다룬 《피렌체의 역사》(Istorie fiorentine, 1532) , 일반적으로 《로마사론》이라 불리는 《티투스 리비우스의 처음 10년에 관한 논문》(Discorsi soprala prima decade di Tito Livio, 1531), <군주론>(II Principe, 1532)등이 그것이다. 《전술론》은 군대 조직은 징병제이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며, 그것을 입증하는 데 고대 로마의 군대 조직이 이용되었다. 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저작은 1513년에 집필한 《군주론》과 1519년에 완성된 《로마사론》이다. 전자는 《로마사론》의 일부분으로 구상된 것이었으나 메디치에 대한 구직(求職) 논문이며, 따라서 《로마사론》과는 분리시켜 저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주론》은 새로운 국가의 건설과 정치 권력의 유지에 대하여 정치적 지배자인 군주(pnincipe)에게 권고하는 성격이다. 그러나 《군주론》과 《로마사론》은 정치적 지배자가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정치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법칙은 정치 외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 내적 가치인 정치 기술임을 밝히고 있다. 즉 《군주론》은 정치 기술론인 것이다. 실제로 이탈리아에서는 개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그 생존이 가능한 불신과 불안이 혼미하고 있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 있어서도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일상적이었으므로 국가의 존속을 위한 권모 술수가 정상적인 정치 기술이었다.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 정치 권력의 현실에 정통하였던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정치는 종교나 윤리와 관계없는 것이었고, 가톨릭이나 도덕에 따르는 정치는 자멸을 초래하는 것이며, 종교 또한 국가의 요구에 부응하는 권력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종교나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고 정치 자체가 윤리성을 갖는 것이었는데, 여기서 정치의 이론은 과학적인 것이었고 이로써 그는 근대 정치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군주론》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에서 정치의 법칙을 찾으려고 한 것이고, 《로마사론》에서는 로마의 역사에서 찾으려고 한 것이었다. 특히 로마사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려고 했었다. 여기서 그가 일반화한 정치는 사랑받는 것이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어야 하며 신앙에 따르는 것이 불리한 경우에는 종교적 규범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서는 현실적 효과에 대한 냉철한 합리적 책략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비합리적 요소도 중요시하였다. 이것이 소위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운명과 정치적 덕목(德目)의 투쟁이었다. 즉 운명은 인력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시대적 조류를 의미하였다. 또한 역사는 순환하는 것이며, 인간의 이기성은 역사를 초월하는 불변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이기성은 정치에 있어서 일정한 한계 내에서 변용이 가능하며 여기에 정치 기술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운명보다는 정치 기술에 의한 인간성의 변용, 즉 정치적 덕목의 창조를 중요시하였다. 로마의 영광은 로마 시민이 정치적 덕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으며,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정치적 덕목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데 그 쇠퇴의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덕목을 시민들이 갖게 함으로써 인간을 사회적으로 존재하는 강력한 정치 권력의 주체가 되도록 하며, 아울러 절대 군주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정치적 효과는 물리적 강제력을 배경으로 가능하고, 권력을 피지배자에게 내면화시킴으로써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념적 일체감을 이루는 것이 정치적 실효를 거두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피렌체의 공화제적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정치 사상은 17세기까지 별로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17세기의 절대 왕정에 이르러 그의 정치 사상의 타당성이 인정되기 시작하였고 19세기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당시 양국에서는 국가적 통일이 최대 과업이었으므로 그의 사상은 국가적 통일을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각광을 받았다. 또한 최근에는 권위주의가 대두함으로써 그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치학의 과학화가 주장됨에 따라 그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평 가〕 《군주론》으로 대변되는 그의 사상은 마키아벨리즘으로 불려지고 권모 술수 또는 현실 정책 등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여지고 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도덕적인 행위도 결과에 따라 정당화된다는 정치적 사고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또 현재 그 본래의 뜻에서 이탈하여 직업화한 정치가의 정치 기술 · 정치 술책을 말하고 정치 권력의 동태에 압도된 도학자(道學者)나 소심한 지식인이 정치를 비판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올바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정치 사상의 특색은 국가 자체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국가 보존에 관한 이론이었다. 또한, 당위로서의 정치를 논한 것이 아니라 현실 정치에 대한 상식적 또는 실제적 통찰인 것이며 현실적 정치 행동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즘은 《군주론》에 나타난 사상이며, 《군주론》은 위기의 원리, 즉 새로운 국가 건설의 술책을 다른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은 마키아벨리 정치 사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은 1559년 반종교적 · 반도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 교황청 금서 목록에 수록되었고, 프리드리히(Friedrich) 대왕은 스피노자와 함께 《마키아벨리 군주론 비판)(I' Anti-Machiavel, ou Examen du Prince de Machiavel, 1740)에서 마키아벨리즘은 '독약' 이라는 악평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 자체는 현실적인 정치적 사유에 의해서 애국적 군주에 의한 새로운 국민 국가 건설이며, 권력의 악마성의 발견이었다. 그러므로 파렴치하고 추악한 권모 술수나 정치 술책은 그의 사상과는 다른 것이다. 그의 정치 술책론은 그의 조국의 숙명적 권력 상황과 관련해서 인식되어야 하며 정치 술책만을 고집해서 다루는 것은 무의미하다. (→ 정치 ; 역사)
※ 참고문헌 W. Ebenstein, Great Political Thinkers, New York, Rinehart & Co., 1960/ 李用熙, 《政治와 思想》, 一潮閣, 1960/Machiaveli, Il Pricipe, 1532(임명방 역, 《군주론》, 세계 사상 전집 9, 삼성출판사, 1994). 〔洪淳鎬〕
마키아벨리, 니콜로 디 베르나르도 데이 (1469~1527)
Machiavelli, Niccolo di Bernardo d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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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로 마키아벨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