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 문학가. 수필가. 본관은 목천(木川). 아명이 창록(昌祿)이었으나 후에 상규(湘圭)로 개명하였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해송은 그의 호이다. 1905년 1월 8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마응휘(馬應輝)의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나 1919년 개성 제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개성 간이상업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그 후 다시 보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으나 1920년 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였고, 당시 개성에 거주하는 문인들이 문예지 《여광》(麗光)을 창간하자 동인으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日本) 대학의 예술과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도쿄 유학생 김우진(金祐鎭) 홍난파(洪蘭坡) 등이 조직한 '동우회 순회 연극단' (同友會巡廻演劇團)에 가입하였다. 이 극단은 도쿄에서 조직된 노동자 및 고학생의 친선 모임인 동우회와, 1920년에 조직된 도쿄 유학생들의 연극 연구 단체인 극예술 협회가 제휴하여 만든 단체로서 주로 여름 방학을 이용해 전국 주요 도시 순회 공연을 실시하였다. 그는 비회원이면서도 각종 문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연극 공연을 통해 재일(在前) 유학생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에는 동료 문인 공진항(孔鎭恒) , 김영보(金泳付), 고한승(高漢承), 진장섭(秦長燮) 등과 문학 모임의 성격을 띤 '녹파회' (綠波會)를 조직함으로써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동인지 성격의 《성군》(星群)을 책임 맡아 직접 편집을 담당하였고, 그해에 '조선 소년단' 창립 사무소 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전문 잡지《어린이》가 창간되자 창작 동화 <바위나리와 아기 별>을 발표하여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하였으며, 이후 <어머님의 선물>, <복남이와 네 동무> 등을 발표함으로써 '창작동화의 개척자' 라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송도 소녀 가극단' (松都少女歌劇團)의 지방 순회 공연에 협조하여 자신이 창작한 동화를 직접 구연(口演)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방정환(方定煥)이 중심이 되어 발족한 소년 운동과 아동 문학을 위한 동인 단체인 '색동회' 에 가입하여 아동 예술 강습회, 가극 공연, 강연회, 동화회, 동요회 및 민속 공연 등 어린이를 위한 다채로운 행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색동회 활동은 1930년대에 접어들어 일제의 탄압과 방정환의 사망으로 침체되었고, 《어린이》도 1934년에 폐간되었다. 하지만 그의 동화 창작 열의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토끼와 원숭이>, <호랑이>, <어머님 생각>, <키다리 김 선생> 등 여러 편의 동화를 발표하였다. 또한 그는 우수한 아동 문학가를 배출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는데, 당시 이 잡지의 애독자였던 윤석중(尹石重), 이원수(李元壽), 서덕출(徐德出), 박목월(朴木月) 등이 모두 이 잡지를 통해 활동하고 육성되었다. 광복 후에 그를 비롯한 몇몇 색동회 회원들이 《어린이》를 복간시켰으나 몇 달 만에 폐간되었다.
한편 니혼 대학을 졸업한 직후인 1924년, 마해송은 20대 초반의 나이로 기쿠치간(菊池寬)이 주재하는 문예 춘추사(文藝春秋社)에 입사하여 당시 일본 최고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종합 교양지 《문예 춘추》의 초대 편집장으로 근무하였으며, 26세 때인 1930년에는 《모던 니혼》을 창간하여 발행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거주하면서 받는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언제나 성실하게 생활함으로써 일본인들로부터 보기 드문 문재(文才)이면서 탁월한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45년 1월에 귀국하여 송도 학술 연구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50년에는 국방부 한국 문화 연구소 소장을, 6 · 25 동란 중에는 국방부 정훈국 편집실 및 승리일보사 고문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951년에는 공군 종군 문인단(창공 구락부) 단장으로 임명되어 평안북도 영변(寧邊)까지 종군하기도 하였는데, 그때의 체험을 엮은 수필집이 《전진(戰塵)과 인생》이다. 1954년에는 전쟁의 상흔(傷痕)을 씻고 아동 문학계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한정동(韓晶東) 이원수, 강소천(美小泉), 김영일(金英一) , 이종항(李鍾恒) , 방기환(方基煥) , 장수철(張壽哲), 박홍근(朴弘根) 등과 함께 '한국 아동 문학회' 를 창립하였으며, 작품 활동도 꾸준히 전개하여 〈앙그리께>, 〈멍멍 나그네>, <모래알 고금> 등과 같은 장편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그는 아동 문화 운동에도 크게 관심을 가져 1957년에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 을 기초하였으며 1958년에는 대구에 최초의 '어린이 헌장비' 를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10월에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최민순(崔珉順, 요한)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959년 처음 '마을 문고 보급회' 의 명예 회장을 맡은 이후 여러 차례 역임하면서 농촌 독서 계몽 운동에 기여하였으며, 그 해 <모래알 고금>으로 아시아 재단의 제6회 자유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듬해 대한 소년단 이사로 취임하였고, 1962년에는 '서울특별시 시민 헌장 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1964년에는 학원사에서 발행한 동화집《떡배 단배》로 한국 문인 협회에서 주관하는 제1회 한국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서울 교육 대학에서 주관한 고마우신 선생님' 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또 1965년에는 회갑 기념으로 아동 문학 작품집인 《마해송 할아버지》가 출간되었다. 한편, 1967년 1월 새싹회 주관으로 '해송 동화상' 이 제정되었으나 2회로 중단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소설 《홍길동》(1927)과 《아름다운 새벽》(1961)을 비롯하여 동화집 《해송 동화집》(1934), 《토끼와 원숭이》(1946), 《떡배 단배》(1953), 《모래알 고금》(1958), 《비둘기가 돌아오면》(1960), 《멍멍 나그네》(1961), 《마해송 아동 문학 독본》(1962)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편편상》(片片想, 1948), 《속(續) 편편상》(1948), 《전진과 인생》(1953), 《사회와 인간》(1953), , 《씩씩한 사람들》, 《요설록》(饒舌錄, 1958), 《오후의 좌석》(1962) 등이 있다.
그의 초기 작품은 주로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기 위한 목적에서 환상적 · 탐미적 경향을 띠었는데, 점차 후기로 가면서 현실 풍자와 세태 고발적인 경향으로 바뀌었으며, 특히 말기에는 맑고 깨끗한 아동 세계의 순화(醇化)와 보호를 표현함으로써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표출하였다. 또한 그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정신으로 어린이들의 지위와 인격 향상 및 복지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했다. 격조 높은 문학 정신으로 자신의 한평생을 아동 문학에 바친 마해송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깊은 믿음으로 참된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 주어 창작 동화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실천했다. 62세 때인 1966년 11월 6일 뇌일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楊州郡)의 금곡(金谷) 천주교회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시보> 543호(1966. 11. 13) 3면, 544호(1966. 11. 20) 3면/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p. 595/ 《韓國人名大事典》, 신구문화사, 1967, p. 2321 李在徹, 《韓國現代兒童文學史》, 일지사, 1978/ 李在徹, 《韓國兒童文學作家論》, 개문사, 1983/ 박홍근, <난 죽을 때 웃고 죽어 요 -마해송 프란치 스코>, 《경향잡지》 1463호(1990. 2),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pp. 88~91/ 《소년》 77호(1966. 5), pp. 19~22 ; 84호(1966. 12), pp. 31~41/ <평화 신문>, 172~175호(1992. 3. 1~1992. 3. 22) 15면. 〔李裕林〕
마해송 (1905~1966)
馬海松
글자 크기
4권

마해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