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모 콘페소르 (580~662)

〔라〕Maximus Confessor

글자 크기
4
성인. 동로마 제국의 수도자. 신학자이며 신비주의 저술가. 축일은 8월 13일. 580년경 콘스탄티노플의 유명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30세 때 헤라클리우스 1세(Heraclius I ) 황제의 비서를 역임하였다. 613/614년 콘스탄티노플 근교의 크리소폴리스(Chrysopolis)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자가 되었으며, 625년에 그의 제자 아나스타시오(Anatacsis)와 함께 시지쿠스(Cysicus)로 옮겨 갔다.
〔활 동〕 막시모의 활동은 당시에는 고전적인 것으로 수도자로서의 호교론적 활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정통 교의를 옹호하는 데 그의 전생애를 바쳤다. 그는 그리스도 단성설(monophysitismus)에 반대하였는데, 단성설 교회는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는 위격적 단일성과 본성적으로는 이원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한 결론을 수용하지 않는 몇몇 동방 교회에서 확대되었다. 단성설적 반응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교(離敎)의 근본적 원인들 중의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시리아에서는 야곱 교회가, 이집트에서는 콥트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고 있던 막시모는 그가 확실히 이단이라고 간주한 교리나 교파에 즉각적으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7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인 세르지우스(Sergius)는 단성설적 교회를 공식적인 가톨릭 교회로 환원시키려는 목적에서 그리스도론과 관련 된 문제를 다시 제기하였다. 그는 로마 주교의 명제에서부터 교의적 약속을 제안하였으며,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유일한 하느님의 의지라는 개념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 단의설(單意說, monotheletis-ms)이라는 명칭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638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 인정되었다.
이에 대해 막시모는 가장 먼저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음으로 아프리카와 로마에서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항하였다. 결국 649년에 개최된 라테란 교회 회의는 그리스도 단의설의 배척을 천명하였고, 평범한 수도자였던 막시모가 교황 마르티노 1세(649~653)의 초청으로 그 교회 회의에 참석함으로써 그의 신학적 주장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653년 콘스탄틴 2세(Constantinus II ) 황제에 의해 교황과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이송되어 대역죄 혐의로 기소된 그는, 재판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655년 트라스(Thrace)의 비치아(Bizya)로 유배되었다. 그는 662년 이단적인 그리스도 단의설에 대한 그 이상의 토론을 금지하는 황제의 칙령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여 혀와 오른손을 절단당했다. 결국 제자들과 함께 흑해 연안에 있는 라지카(Lazica)로 추방당한 막시모는, 662년 8월 13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저 서〕 성서와 교부들에 대한 위대한 주석가였던 막시모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저서들은 금욕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저술로부터 신학과 전례에 관련된 논문까지 망라되어 있다. 대략 90여 편의 중요한 저서를 남긴 그는 일찍이 성서 주석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626년에는 성서의 어려운 구절과 교의적 의문점에 관련된 79개의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질문과 의혹》(Ques-tiones et dubia)를 발표하였다. 이후 시편 59편과 주의 기도에 관한 주석을 저술하였으며, 《웅변가 테오펨투스에게 물음》(Questioness ad Theopemptum Scholasticum)에서는 성서에 관한 세 가지 문제를 다루었다. 또 《탈라시우스에게 물음》(Questioness ad Thalassium)은 630~633년 사이에 발표되었는데, 이 책은 성직자이며 수도자였던 리비앙에게 헌정된 것으로 구체적인 교부들의 저서, 특히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azianzenus)와 위(僞)디오니시오(Pesudo-Dionysius)의 비평 등의 도움으로 성서에 관련된 어려움을 해결하는 65개의 답변을 포함하고 있다. 그는 또한 《암비구아》(Ambigua)라는 제목이 붙여진 두 권의 저서를 발표하였다.
《신학과 논쟁 소논문》(Opuscula theologica et polemica)이라는 책에서 28편이 막시모의 저술이라 여겨지는데, 이 저술은 그리스도 단성설에 대한 반박 및 그리스도 단의 설파에 대한 반박뿐만 아니라 다른 교의적 질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에 관한 그의 저서 <소논문>(Opuscula)은 626~634년 사이에 쓰여졌다. 이후 그는 그리스도와 일치의 12가지 유형, 그리스도론에서 몇 가지 일탈한 정의를 포함하는 이론적인 문제들을 다루었으며, 마지막으로 성직자인 테오도로에게 헌정된 저서에서 삼위 일체론의 위격적 결합에서 질(質), 소유와 차이의 개념을 다루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지와 관련되는 단의설적 논의에 반박하는 소논문을 저술하였다. 640년경 쓰여진 《마리누스를 위한 책》(Tome to Marinus)에서 단의설적 입장을 견지하였던 존 필로포누스에 반대하였던 안티오키아의 대주교인 아타나시오에 집중하면서 단의설적 입장이 강하게 나타나는 교부들을 어느 정도 열거하였다. 게다가 그는 교황 호노리오 1세(625~638)가 정통 교의적 입장에서 세르지우스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해석하기도 하였다. 막시모의 가장 유명한 금욕주의 도덕적 저서는 대화체 저서인 《수덕서》(Liber asceticus), 《사랑의 400가지》(400 Capita de caritate), 《신학과 섭리 200가지》(200 Capita theologica et oeconomica)와 《신학과 특별한 경륜에 대한 500가지》(500 Diversa capita ad theologiam et oeconomiam spectantia)의 첫 15장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전례에 관한 저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신비 안내서》(Masogoging)으로, 전례의 신비적 의미에 대한 안내서인데 수 차례에 걸쳐 인쇄되었으며, 1799년에는 터키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더구나 100편이 넘는 그의 서한도 편집되었는데, 그 서한 중 많은 것이 신학적 소논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교 의〕 막시모의 신학적 체계는 고전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원칙들과의 종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단성설과 단의설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그는 한 위격 안에 두 가지의 완전하고 구별되는 본성-하나는 인성이고 다른 하나는 신성-의 존재를 주장하였다.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중심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강생까지 우주의 역사는 사람이 된 하느님을 위한 준비이며, 그래서 그리스도 이후의 역사는 성서의 육화 내에서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신성을 갖추려는 사람의 역사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남으로써 본질적으로 삼위 일체 중 한 위격인 하느님을 나타내 보였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세례를 통한 사람과 그리스도와의 초자연적인 일치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하는 사람의 본성적 경향을 자유롭게 실현시킬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영성적 생활은 도덕적으로뿐만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성장한다. 이렇게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 기질은 지적인 행위보다 우위에 있다. 그것은 사랑에서 태어나는 금욕주의적 경험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사랑은 절대적으로 지고(至高)한 하느님을 받아들이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적으로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개별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의지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웃에 대한 실제적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다. 막시모의 저서는 신비적인 사색, 낭만적 사실주의, 그리고 교회의 본질을 깊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잔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막시모의 영성적 견해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를 계승하였다. 그는 세 가지 단계, 즉 금욕을 통한 실천(praxis) 혹은 자기 통제,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이론(theoria) 혹은 묵상, 그리고 신성(神性)을 가진 신학 혹은 묵상을 통한 일치를 계발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과정을 오리제네스의 우주 창조론으로부터 분리시켜 발전시켰다. 막시모는 사랑의 지도하에서 선을 실행하는 것은 묵상을 통해 완벽함에 이르는 단계들을 수반해야만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동정심을 주장하였으며, 마침내 영성적 완벽함에 이르는 두 가지 접근법, 즉 실천을 통한 것과 이론이나 묵상을 통한 방법 모두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묵상은 사랑에 의해 채워지고 완성되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평 가〕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681)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의지, 즉 하느님의 의지는 그 절대적 우위권을 인간의 의지 위에서 보존한다는 이원성을 재확인하면서, 막시모의 순교를 정당화하였다. 또한 그의 신비주의적 사고는 영성적 가르침에 있어서 깊이와 균형을 제공하는 인간주의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되기도한다. (→ 그리스도 단성설 ; 그리스도 단의설 ; 동방 교회)
※ 참고문헌  M. Hermaniuk, 《NCE》 9, pp. 514~516/ J. Deschamps, Dictiomaire des philosophes, Paris, P.U.F. 1991/ I.H. Dalmais, 《Dsp》 10, pp. 836~847. 〔邊宗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