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닝, 헨리 에드워드 (1808~1892)

〔영〕Manning, Henry Edward

글자 크기
4
만닝 추기경.

만닝 추기경.

추기경. 영국 웨스트민스터의 대주교. 1808년 7월 15일 하트퍼드셔(Hertfordshire) 주의 코프드 홀(Copped Hall)에서 보수당 국회 의원이며, 영국은행 이사인 월리엄 만닝(William Manning)과 그의 두 번째 아내 사이에서 여덟번째로 태어나 14세 때에 하로우 공립학교(Harow Public School)에 들어갔으며, 1827년에 옥스퍼드에 있는 발리올(Balliol) 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에서 일등급의 탁월한 성적을 보였으나 아버지의 파산으로 충격을 받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그는, 신학 공부를 하여 1833년 성공회의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해 서식스(Sussex)에 있는 라빙톤 그라팜(Lavington Graffham)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었으며, 11월 7일에는 라빙톤의 사르젠트(J. Sargent) 신부의 딸인 케롤린(Caroline Sargent)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1837년 7월 28일 그의 아내가 아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충격을 받았고 그 충격을 이겨내는 데 여러 달이 걸렸다.
〔성공회의 사제 시기〕 아내를 잃어버린 충격 속에서 자신을 깊이 성찰한 만닝은 다시 그의 사목 활동에 전적으로 매달린 결과, 마침내 그의 탁월한 근면성과 열심으로 장상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1841년 33세의 나이로 치체스터(Chichester)의 부주교로 임명된 후 '옥스퍼드 운동' 과 지속적인 관계에 들어간 만닝은, 그 운동의 주역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 시대의 사회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부(富)의 오용과 빈농인(貧農人)들의 가난, 신(新)중산 계층들을 위한 교육 체계의 미비 등을 비난하였으며 끊임없이 이성주의에 대해 경고를 하였다. 1845년 뉴먼(J.H. Newman)이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이후, 만닝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1847년의 두 가지 사건은 결정적으로 그의 진로를 정하게 하였는데, 그 하나가 만닝의 좋지 못한 건강이었다. 그는 병중에서 읽은 뉴먼의 《그리스도교 교의의 발전》(Essay on the Development of Christian Doctrine)을 통해 진정한 교회의 초석은 무류성과의 일치라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건강이 회복된 후, 각국을 여행하는 중에 비오 9세 교황을 직접 만났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는 교부들의 글을 연구하였다. 또한 칼뱅주의 신학자인 고르암(G.Gorham)의 성공회 개종과 관련되어 발생된 '고르암 판결' 은 만닝에게 있어서 성공회 내에는 영성적인 권한보다 세속적인 권한이 우위를 차지함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만닝은 성공회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당시 영국에는 가톨릭 교회의 대목구였던 성 시에즈(S. Siège)가 주교좌로 승격되고, 와이즈만(N. Wiseman)이 웨스트민스터의 대주교이자 추기경으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이에 성공회 성직자들은 왕권의 권한 안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기를 바랐으나 만닝은 그렇지 않았고, 또 성공회 성직자들은 교황의 최고권을 부정하였는데, 만닝은 이것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에 이르는데, 개종 전 6개월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권하였던 친구에게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산길을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같으나, 내가 이성으로 번번이 확신하였던 확실성 그것입니다." 결국 그는 1851년 4월 6일 런던의 예수회 소속 성당에서 비스만 추기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가톨릭 사제 시기〕 같은 해 6월 15일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은 만닝은, 몇 개월 후 로마에서 교황 비오 9세의 뜻에 따라 교황청 아카데미(Accademia dei Nobili Ecclesiastici)에서 3년 동안 지내고, 1854년 1월 25일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만닝은 영국으로 돌아와 주로 아일랜드 이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나 사회적 · 지적인 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사목에 참여하였다. 1856년에는 비스만 추기경이 1851년에 설립한 재속 사제 공동체인 '성 샤를르 보로메오의 헌신회' (Oblats de S. Charles Borromeo) 책임자이면서 교구 학교의 장학관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웨스트민스터 주교좌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활동은 트레비존드(Trebi-zond)의 명의 대주교인 에링톤(Errington)의 눈에 거슬렸고, 또 비스만 추기경을 어려움에 처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만닝은 8년 간 이 공동체의 책임자로 지낸 기간을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회고하였다.
〔웨스트민스터의 대주교〕 1865년 2월 비스만 대주교가 사망하자 비오 9세는 만닝을 그의 계승자로 임명하여 그 해 4월 30일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27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관구의 탁월한 지도자로서 최선을 다한 그는 교회를 보다 사회에로 관심을 가지게 하였으며, 영국 가톨릭을 일반인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뉴먼과의 관계 : 만닝은 교회에 새로운 학문의 자유주의를 결합시켜서 그 자유주의를 그리스도교화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목적은 뉴먼과의 싸움, 즉 결코 해결될 수 없을 싸움으로 그를 이끌고 갔다. 런던 대학이나 형이상학회와 더불어 하는 것에 대한 뉴먼의 거부, 그의 학문적인 교육의 불신뢰, 옛 특권층의 가톨릭인들에 대한 그의 연민 등은 만닝과 사이를 벌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 사이의 공감의 결여는 단순히 개성의 차이로 설명될 수는 없으며, 그것은 그들 사이를 구별시키는 보다 깊고 기본적인 철학적 대립에 기인한다. 그러나 튀로당쟁(P. Thureau-Dangin)은 《19세기 영국 르네상스》(Larenaissance catholique en Anglette au XIX)에서 만닝과 뉴먼을 역사상에서 그들 각자의 특성에 알맞게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사회적 영역에서의 사도적 활동 : 만닝은 교회의 훌륭한 장상으로서 행동하기 위하여 항상 침묵과 기다림으로 여러 가지 이념들과 맞서 싸워야 하였다. 그가 돌보는 신자들이 확대되자, 그는 사제들이 신자들과 직접 접촉을 할 수 있도록 대교구를 분할시켰으며, 사제 지원자들을 위하여 올바른 사제상을 제시해 주려는 의도에서 《영원한 사제직》(The Eternal Priesthood)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회적 병폐를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부도덕한 생활 속에서 살아감을 직시하였다. 특히 최선의 사회 개선책은 교육 개선이라고 보아 절대 금주와 더 나은 교육, 개선된 노동 관계, 그리고 아일랜드인들의 사회 복지를 증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만닝은1869년에 형이상학회, 1871년에는 파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구조회, 1872년에는 아일랜드 이주자들 가운데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십자가 협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875년 3월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그의 활동은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되었다.
만닝은 삶 안에 두 가지의 위기가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는 종교적인 불순종과 배반의 위기이며, 또 하나는 사회 조직의 위기였다. 그는 전자의 위기에 대해서는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으로 대항하려 하였고, 후자의 위기는 교회가 노동자 계급을 인도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당시까지 가톨릭이 배제하였던 사회 운동에 자주 참여하였다. 1884년에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였고, 1885년에는 어린이 보호 협회와 결성을 맺었으며, 1889년에는 '대(大)부두 노동자의 파업' 이라는 기나긴 투쟁에 관여하여 노동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협상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1891년 1월 25일 알베르 드 망(Albert de Mun)에게 "이 세기는 자본주의에도 부르주아에게도 속해 있지 않으며, 오직 민중에게 속해 있습니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1890년 리에주(Liège) 회의에서, 그는 노동자들과 귀족들 사이의 관계는 평화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그 때문에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임금을 조절하는 올바르고 알맞은 척도, 즉 자본과 노동 사이에 있는 모든 계약들을 지배하는 척도를 확립시키지도 않으며,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고 하였다.
교황권의 옹호자 : 만닝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지상주의를 다른 어느 주교들보다도 더욱 강조하여 '공의회의 사탄' 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가장 확신에 넘친 무류성의 수호자라고도 불렸다. 만닝은 《그리스도교 계의 재일치》(The Reunion in Christendom, 1866)에서, 로마 교황은 각 왕의 수행원일 수도, 왕과 적(敵)일 수도 없는데 이는 교황이 지상 통치권의 권리를 지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영국 가톨릭 교회 내부에서는 서로 맞선 세 가지 이념의 흐름이 있었다. 첫째, 바르드(William Ward)는 무류성이란 교황청의 활동과 지시 그리고 의미를 해석해 주는 데에 한정된다고 하였고 둘째, 뉴먼은 무류성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엄격한 조건에 따라 서 성립되는 것이라고 한 반면 만닝은 무류성의 범위는 매우 넓은 것이나 어떠한 한계 안에 고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1867년에 만닝은 《성 베드로의 세기와 보편 공의회》(The Centenary of St. Peter and the GeneralCouncil)를 발행하여 세 가지 문제를 분석하였는데, 즉 교회와 주교들과 교황의 무류성, 오류표(Syllabus)에 대한 주교들의 동의, 로마 교회의 성격과 속성들이 하느님의 왕국을 특징짓기에 타교회들이 로마 교회와의 일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닝이 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을 지키지 위해 노력할 때, 액턴(J.E.E.D. Action, 1834~1902) 경은 무류성과 교황의 수위권을 반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만닝은 명백하게 진리와 일치의 유일한 원천인 교황의 권위를 설명하면서 보편 교회의 초월성의 필요성을 선언하였다. 만닝은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은 피렌체 공의회(1439)에서 형성되고 명시화되었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약간 소홀히 하였지만, 교회와 교황의 무류성은 오랫동안 신앙인들에 의해 인정되었고 공식적으로 선언되어 교회의 일치와 불변성을 보증한다고 하였다. 반면에 액턴은 《바티칸 공의회》(The Vatican Council, 1870)를, 만닝의 옛 친구이자 영국 가톨릭 자유주의의 지지자인 글래드스톤은 《시민적 성실성과의 관련 속에 있는 바티칸 공의회의 정치적인 선언들》(The Vatican Decrees in their Bearing on Civil Allegiance, a Political Expostulation, 1874)을 발행하여 각각 영국과의 관계에서 공의회의 영향들을 비판하였는데, 만닝은 이 작품들에 대항하여 《바티칸 공의회와 그것의 정의들》(The Vatican Council and its Definitions, 1870) 《체사르주의와 교황 지상주의》(Caesaisim and Ultramon-tanism, 1874), 《시민적 성실성과 관련 속에 있는 바티칸 선언들》(The Vatican Decrees in their Bearing on Civil Allegiance, 1875)을 발행하였다. 또한 그는 1892년 1월 14일 런던에서 사망하기까지 《일간지》(Journal)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의 사도직과 사상에 기본을 둔 중요한 문서로 여겨지고 있다.
〔평가와 영향〕 만닝의 행정자적 자질은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한 방대한 그의 저술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도 여러 언어로 번역될 정도로 인기를 얻었는데, 특히 사목자의 의미와권리를 다루고 있는 《영원한 사제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널리 읽혀지고 있다. 스트라치(Lytton Strachey)는 만닝을 차갑고 무정한 조직가이자 엄격한 고행자라고 하였지만, 그의 따뜻한 마음과 책임자로서의 성향 등은 러스킨(Ruskin)에 의해 증명된 바 있다. 그는 영국 사회 내에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더욱 강화시켰으며, 그의 교황 지상주의와 교회의 확장을 위한 강력한 입장은 그의 사후에 후계자인 보간(Herbert Vaughan) 추기경에 의해 확립되었다. 물론 보간은 만닝의 사회적인 활동과 그의 금주 운동 등을 더 잇지는 못하였으나, 만닝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만닝의 그러한 사회적 운동은 가톨릭 자유주의자들과 뉴먼의 추종자들 내부에서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와 반종교적 해방주의자들로부터도 많은 호응을 얻었다. (→ 옥스퍼드 운동)
※ 참고문헌  V.A. McClelland, 《NCE》 9, pp. 168~170/ S. Gillley, 《TRE》 22, pp. 60~63/ G. Zananiri, 《Cath》8, pp. 339~345/ A. Boland, 10, pp. 222~2271 R.P. McBrien ed., The HarperCo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San Francisco, Harper Co., 1995, pp. 811~812/ G. Biemer, 《LThK》 6,p. 1364. 〔梁蕙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