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부의 속칭으로 현재의 동삼성(東三省, 즉 遼寧省, 吉林省, 黑龍省) 지역을 일컫는다. 면적은 129만 3,341k㎡이고, 주민은 19세기까지 만주족이 대부분이었으나 19세기 말 이후 한족(漢族)의 유입으로 현재는 한족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 길림성 지역에 연변 자치주(延邊自治州)를 형성하고 있는 조선족과 주로 요녕성에 거주하는 만주족 등 많은 소수 민족들이 있다. 이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1838년에 처음으로 교구가 설립되었다.
〔교구 설정 배경〕 처음에 요동(遼東) 대목구로 불렸던 만주 대목구는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선교 정책의 일환으로 설정되었다. 1831년 포르투갈의 보호권(保護權, padroado)에 속하는 북경교구로부터 조선 지역이 분리되어 대목구로 설정되고 동시에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되자 초대 조선 대목인 브뤼기에르(B. Bruguière, 蘇) 주교는 즉시 조선 입국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요동 지방에 이르러 보호권을 주장하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방해에 부딪혀 입국이 여의치 않자, 그는 요동 지역을 북경교구로부터 분리 · 신설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해 주도록 포교성성에 건의하였다.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요동 대목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으며, 이어 사천(四川)의 선교사이던 베롤(E.Verolles) 주교가 초대 대목으로 부임하였다.
〔만주교구의 발전〕 요동성 외에 만주 전역과 몽고까지 포함하는 요동 대목구가 1838년 4월에 설정되었으며, 이어 1840년에는 몽고 지역이 따로 분리되어 라자로회(Lazaristae)에 위임됨에 따라 요동 대목구는 만주 대목구로 개칭되었다. 만주 대목구는 초기에 그 선교사수가 마
카오에서 1842년 최양업 신학생과 함께 요동까지 동행하며 그에게 신학을 가르쳤던 브뤼니에르(Brulley de la Brunière) 신부를 비롯하여, 후에 조선교구장이 된 베르뇌 등 10여 명에 불과하였다. 그나마도 주민들의 저항으로 선교사들이 살해되고 납치되는 등 많은 위험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862년에 이르러서는 신자수가 6,000명으로 증가하였다.
1898년에는 만주 대목구가 길림을 중심으로 한 북만주 대목구와 봉천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대목구로 양분되었는데, 1900년에 일어난 의화단(義和團) 사건으로 도처에서 성당이 파괴되거나 불에 타버리고 또 많은 선교사와 수녀, 수천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순교하는 등 발전하던 만주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다. 그 후 선교사들은 폐허 속에서 다시 교회를 재건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기용(Guillon) 주교에 이어 1901년에 대목으로 임명된 슐레(Choulet) 주교는 파괴된 교회의 재건에 착수하여 신학교를 봉천으로 옮기고 주교좌 성당을 재건하는 등 교회 재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24년에는 남만주 대목구가 봉천 대목구로, 북만주 대목구는 길림 대목구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두 대목구는 계속 새로운 교구를 분리 독립시켜 나갔다. 먼저 봉천 대목구에서는 1929년에 사평가(四平街) 지목구가 독립되어 퀘백 외방전교회(Quebec Foreign Mission Society)에 위임되었고, 1932년에는 무순(撫順)이 지목구로 독립되어 메리놀회에 위임되었으며, 1937년에는 임동(林東)이 지목구로 독립되어 퀘백 외방전교회에 위임되었다. 한편 길림 대목구에서는 1920년에 연길(延吉)과 의란(依蘭)이 지목구로 독립되어 조선의 원산 대목구의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회에 위임되었고, 1928년에는 치치하얼(齊齊哈爾)이 지목구로 독립되어 스위스의 베들레헴 외방전교회(Foreign Mission Society of Bethlehem)에 위임되었으며, 같은 해 의란은 연길에서 분리되어 독립 포교지가 되었다가 1934년에 오스트리아의 티롤(Tirol) 카푸친회에 위임되었는데 1937년에 가목사(佳木斯)로 개칭되고 1940년에는 지목구로 승격되었다.
한편 몽고 대목구에서도 1883년에 동몽고 포교구가 분리 · 독립되었는데 1924년에 열하(熱河) 대목구로 개칭되었다. 또한 1932년에는 적봉(赤峯)이 지목구로 독립되면서 처음으로 만주 현지인 사제에게 위임되었다. 이러한 만주 지역 교구들의 신자수는 1938년 통계에 의
하면 185,140명이었다.
1946년 중국에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큰 변화가 예고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에서는 봉천이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동시에 무순 · 열하 · 길림 · 사평가 · 연길 대목구가 정식 교구로 승격되면서 봉천 관구의 소속 교구가 됨으로써 그때까지 조선 교회에 속하였던 연길교구는 중국 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교계 제도의 설정은 발전의 새로운 계기가 될 수 있었으나,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교회의 발전보다는 그 존재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공산화 이후의 만주〕 만주의 공산화는 1948년 국민정부군을 패배시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만주 교회는 이미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한 소련 공산군으로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의 선교사들, 특히 연길의 베네딕도회 선교사들은 이로 인해 많은 수난을 겪어야 하였다.
1949년 중국의 완전 공산화는 중국 교회와 함께 만주교회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였다. 1951년 삼자 운동(三自運動)과 더불어 수 년 동안 정부 주도의 준비로 1957년에 정식 발족된 '중국 가톨릭 애국 협회' (일명 애국 교회)는 독자적으로 주교들을 성성함으로써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이로써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애국 협회에 반대하는 주교와 신부들은 투옥 또는 추방되었다. 이어 10년 간에 걸친 문화 혁명(1966~1976)은 모든 교회를 파괴 또는 폐쇄하고 남은 성직자마저 살해 또는 추방하는 등 종교 활동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이에 교회는 지하로 숨어 들어가 종교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1976년 이래 시작된 중국의 개방 정책은 종교 정책에도 변화를 가져와 부분적으로 종교 자유가 허용되기에 이르렀다.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고 공개적으로 종교 의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며 신학교들도 다시 문을 열고 신학생을 받아들였다. (⇦ 만주교구 ; 요동교구 ; → 중국; 의화단 사건 ; 애국 교회)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이원순, 〈朝鮮教區 설정의 역사적 계,《교회사 연구》 4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3/ 최석우, 〈朝鮮教區 설정의 교회사적 의미>, 《교회사 연구》 4집, 1983/ 上智大學 편, <滿泸州>, 《カトリック大辞典》 5, 東京, 富山房, 1954/ J. Schmidlin, Das gegemärtige Heidenapostolat im Fernen Osten, Bd. 1, 1929/ A. Launay, Mgr. Verrolles et la Missions de Chine, Peking, 1895. 〔房相根〕
만주
滿洲
〔영〕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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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교구의 중심인 봉천 전경(왼쪽)과 의화단 사건으로 폐허가 된 봉천 주교좌 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