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소설가. 시인. 극작가. 사상가. 1785년 3월 7일 밀라노에서 태어나 6세 때 부모가 이혼하여 수도원에서 경영하는 학교에서 소아베 신부의 지도를 받았다. 귀족 출신의 아버지 피에트로(Pietro)는 보수주의자였으나, 어머니 줄리아(Giulia)는 《죄와 벌에 대하여》라는 유명한 저서를 남긴 베카리아(C. Beccaria)의 딸로 프랑스 계몽주의와 백과전서파(Encyclopédistes)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 신여성이었기에 이들의 가정 생활은 처음부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아베 신부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꼈던 만초니는, 24세에 밀라노에 있는 다른 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수업을 시작하였는데, 그의 삶은 고달프고 불행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1807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많은 유산을 물려받아 경제적 여유가 생긴 만초니는 연구와 창작에 전념하면서, 아버지와 이혼한 뒤 파리에 가서 새 생활을 누리고 있는 어머니를 가끔 찾아가기도 하였다. 만초니는 완고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자유 사상을 가진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아울러 파리의 문학계 인사들과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으면서 볼테르(Voltaire)풍의 회의 사상에 기울어지기도 하였다. 1808년 제네바 출신의 칼뱅교도 앙리에트와 결혼하였는데, 1810년에 그녀가 가톨릭 신자가 되면서 만초니 역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부인과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다시 받을 만큼 열성적이 된 만초니에게 이 개종은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였다. 삶 자체는 물론이려니와 사상, 예술 등 모든 것이 철저하게 가톨릭적이 되었고, 그는 이 가톨릭 정신 안에서 시대적 요청 사항인 조국의 통일 운동을 주도해 나갈 애국심의 함양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애국심은 투쟁적이라기보다는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차원의 국민 교육에 바탕을 둔 내적인 것이었다.
1833년 첫 부인 앙리에트를 잃고 1837년 데레사 보리 백작 부인과 재혼하였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새 부인과 자식들 사이의 불화로 행복할 수 없었다. 1848년 혁명이 일어나자 만초니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그 혁명에 가담하라고 권장하였는데, 아들 가운데 하나인 필리포(Fillippo)가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자 전 이탈리아 국민과 군주들에게 밀라노인들을 구원해 달라는 청원을 보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물러간 뒤에도 만초니는 공개적으로 그들을 반대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그의 창작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어 괴테(J.W. von Goethe)를 비롯한 유럽의 유명 시인들로부터 존경과 호평을 받았으며, 탁월한 종교 사상 덕분으로 로스미니(Rosmin)와 깊은 우정을 나눌 수 있었다. 만초니는 사실상 동시대의 지도급 사상가로 인정받았는데, 1860년 이탈리아가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운동의 결실로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마침내 이탈리아 왕국이 되자 만초니는 그때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말년에는 은퇴하여 롬바르디아의 브루술라오에 있는 저택에서 창작과 언어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의 문학 활동과 국어 정화 운동은 그의 애국심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이탈리아 국민을 내적으로 결속시켜 줄 수 있는 언어가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청되었기에 만초니는 직접적으로 국어 정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주옥 같은 문학 작품으로 미래의 통일된 이탈리아 국민이 공통으로 사용할 언어를 개발해 내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1873년 5월 22일 밀라노에서 사망하자 이 위대한 작가의 공적을 기리고 명복을 비는 의미에서 베르디(G.F.F.Verdi)는 <레퀴엠>(Requiem)을 작곡해 헌정하였다.
〔사상과 작품〕 만초니는 사상적 측면에서 볼 때 이탈리아 낭만주의 운동의 대표적 인물로 초월적 관념주의에 대한 열망을 갖고서 무신론적 유물 사상에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그와 거의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는 알피에리(V. Alfieri)나 포스콜로(U.Foscolo) 같은 시인들은 위대하고 자유로운 이탈리아를 염원하면서 관념주의를 추구하였고, 몬티(V. Monti)는 신비적 감상주의에 기울어져 있었으며 최고의 서정시인 레오파르디(G. Leopardi)는 회의주의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만초니는 그리스도교 사상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이러한 사상은 새로운 정신의 문화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비판적이고 의식적이며 철학적이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섭리로, 하느님은 인류의 역사를 은밀하게 주관하고 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악이라든가 고통이라는 것도 인간의 삶 속에 있기 마련이라고 간파하였다. 만초니의 작품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과 그 이후의 것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앞선 시기의 것으로는 <자유의 승리>(Trionfo della Libertà, 1801)와 <아다>(Adda, 1803)라는 서정시를 비롯하여 <임보나티의 죽음에 부쳐>(Inmorte di Carlo Imbonati, 1806) , <파르테네이데에게>(1808) ,신화적 소재를 다른 <우라니아>(Urania, 1809) 등이 있다. 정치적 성격을 띤 서정시 〈리미니 선언>(1815)에서는 조국의 통일을 염두에 두면서 페트라르카풍의 애국심을 노래했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식들, 억압하는 사람도 억압당하는 사람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저항시 <1821년 3월>(1821)은 피에몬테인들의 저항 운동을 바탕으로 조국의 독립과 부활을
노래했다. 이러한 작품들에 비해서 후기에 이어지는 작품인 <5월 5일>(II cinque maggio, 1822)은 나폴레옹의 죽음에 즈음해서 쓴 시로 "세기의 찬가" 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울러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난 다음 성탄, 수난, 부활, 성령 강림 등을 주제로 <성가>(Inni sacri, 聖歌)라는종교적 서정시와 성모 마리아께 바치는 찬가를 발표하였다(1812~1822).
만초니는 한동안 희곡에 관심을 가져 셰익스피어(W.Shakespeare)의 작품들을 탐독하고 독일의 슐레겔(J.E.Schlegel)이 남긴 《극작론》에 심취한 끝에 《카르마놀라 백작》(Ⅱ conte di Carmagnola, 1820)과 《아델키》(Adelchi, 1822)라는 비극을 남겼다. 르네상스 시대의 알피에리가 고전적 극작법의 전형이라면 만초니는 다분히 낭만주의적 성격을 가진 극작가로서 자유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인간의 감정을 단순한 감상주의에서 탈피시켜 무게 있게 처리하였는데, 그의 희곡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초니는 희곡론과 역사 소설론, 이탈리아 국어의 순화를 위한 활동, 기타 여러 분야에 관한 저술 작업 등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만초니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은 《약혼자》(IPromessi Sposi)이다. 역사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확립하였다는 평가를 받은 이 소설은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단테의 《신곡》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다. 1827년 초판이 나온 이래 여러 차례의 교정과 수정을 거쳐 1844년에 결정본이 출간된 이 역사 소설은 17세기의 북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17세기의 밀라노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평 가〕 만초니는 문학을 통해 수많은 비극적 사건들을 소개하고 각계 각층의 인간들을 그리면서 편견 없이 선과 악의 표상을 담담하게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독자를 신의 섭리가 지배하는 세계로 이끌어 가고 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불행한 일이 우리에게 닥쳐올 때, 그 불행을 경감시켜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앙뿐이며, 그 신앙은 보람 있는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톨릭 문학, 이탈리아의)
※ 참고문헌 P. Zavatto, 《DS》 10, pp. 235~238/ G. Zananiri, 《cath》 8, pp. 357~362/ R. Montano, 《NCE》 9 pp. 182~184. 〔韓炯坤〕
((Referen end))
만초니, 알레산드로 Manzoni, Alessandro(1785~1873)
글자 크기
4권

알레산드로 만초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