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 시대의 순교 사적지.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保寧郡 鰲川面 永保里) 소재. 일명 고마수영. 갈매못이란 영보리 앞바다가 좌우의 육지와 섬으로 둘러싸여 마치 연못 같아 보이는 데서 유래하였다. 당시 이곳이 처형지로 사용된 이유는 조선 시대 이웃의 오천항에 충청도 수군 절도사의 영문인 수영(水營)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오메트르(Aumaître, 吳)와 위앵(Huin, 闕)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黃錫斗, 루가)와 회장이요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張周基, 요셉) 등 5명이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중 다블뤼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두 세 차례 신문을 받고 3월 23일(음 2월 7일)에 군문 효수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堤川)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도 신문을 받고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무렵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들의 처형지를 보령 수영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명은 그곳으로 이송되어 성금요일인 3월 30일(음 2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이 중 황석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 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洪山) 남포의 서들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Blanc)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부터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한편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갈매못 순교터는 1975년 9월 대천 본당 주임으로 있던 정용택(鄭鏞澤, 요한) 신부에 의해 확인되어 그 자리에 순교비가 건립되었다. (→ 순교 기념지) 〔車基眞〕
갈매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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