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교구 산하 매일신문사에서 발간하는 종합 일간신문. 1946년 3월 1일 창간된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이 그 전신이다.
〔<남선경제신문>의 창간〕 광복 후 건국 도상에 있어서 민족의 발전은 경제적 지위 향상에 있음을 인식한 우병진(禹炳進)에 의해 조선 경제계의 자각과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창간된 경제지 <남선경제신문>은, 창간한 지 19일 만에 자본 인력 · 경영 능력의 부족으로 휴간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특히 그 해 10월 1일에 있었던 사옥 피습 사건은 신문사를 거의 파산 지경에까지 몰고 갈 정도였다. 그 후 <남선경제신문>은 1946년 11월 이경용(李慶容)을 사장으로 맞이하고 이듬해 4월에는 사옥을 태평로(太平路) 1가 8번지로 옮기면서 새 출발을 꾀하였으나, 경영난과 사옥 피습의 후유증을 감당하지 못하고 1948년 9월부터 1년 5개월 사이에 김홍식(金洪植), 이경희(李慶熙), 조룡해(趙龍海)로 사장이 교체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사장의 잦은 교체로 신문사는 일관성 있는 경영이 이루어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신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까지 작용하였다.
1949년 1월 11일부터 지면이 배대판으로 확대되었으며, 1950년 2월 사장으로 취임한 이상조(李相祚)는 같은 해 3월 21일 제호(題號)를 <경제신문>으로 바꾸면서 분위기 일신을 꾀하던 중 6 · 25 동란이 발발하여 타블로이드판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경제 신문이라는 여건으로는 전시(戰時)의 보도 사명을 다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일반 신문으로 전환하기 위해 1950년 8월 1일 제 호를 <대구매일신문>(大邱毎日新聞)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8월 29일자 신문에 '이 대통령' (李大統領)이 '이 견통령' (李大統領)으로 찍혀 나간 오식(誤植) 사건으로 사장이 체포되고, 신문은 무기 정간 조치를 당하였다. 그 후 박호근(朴昊根) 등 관계자들이 전시 홍보 매체의 중요성을 내세워 당국자를 설득한 끝에 9월 16일자로 발행이 재개되었으나, 오식 사건으로 고통을 당한 이상조 사장은 신문사 운영에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경영주를 찾아나서게 되었고, 그 결과 1950년 10월 1일 대구교구로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었다.
〔전환기의 <대구매일신문>〕 <대구매일신문>을 인수한 대구교구는 같은 해 11월 주식 공모 등 제반 절차를 거쳐 교구를 대주주로 하는 주식 회사로 전환하고, 12월 10일 창립 총회를 개최하여 최덕홍(崔德弘) 주교를 사장으로, 주간 겸 편집국장 대행에 조약슬(趙若瑟) 업무국장에 박종상(朴宗相) , 사업국장에 김영달(金永達) , 공무국장에 오의경(吳義慶), , 비서실장에 김창준(金昌俊)을 임명하고 새로운 출발을 도모하였다. <대구매일신문은 1951년 1월 1일 제호를 <대구매일>로 바꾸었으며, 9월에는 보다 많은 양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조석간(朝夕刊)제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6월 9일 제호를 다시 <대구매일신문>으로 환원하고, 9월 15일부터 단간(單刊)으로 회귀하면서 지면도 배대판 2면으로 발행하였다. 이와함께 1952년 2월부터 1954년 말까지 <소년매일>을 발간하여 사업의 확장을 도모하였으며, 1954년 초에는 전국지(全國紙)로의 탈바꿈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다른 지역 신문들의 전국지로의 변신에 대한 우려와 언론의 비대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당국의 판단에 따라 이러한 노력은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대구매일신문>은 1955년 9월 14일 20여 명의 괴한들이 신문사를 습격하는 또 한 차례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학도(學徒)를 도구(道具)로 이용하지 말라"는 최석채(崔錫采) 주필의 사설이 직접적인 동기가 된 이 테러로 신문은 1주일 동안 정상적으로 발간되지 못하였다. 이에 국회 진상 조사단까지 구성되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따졌으며, 언론의 공세도 거세였다. 비록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지만 이는 <대구매일신문>의 성장을 대변하는 것이었고, 언론계에 <대구매일신문>의 위치를 확연히 알린 계기도 되었다. 그리하여 1955년 초 4,200부 정도였던 신문의 발행 부수는 테러 사건 후인 1955년 말쯤에는 1만 부를 돌파하였다.
1957년 2월 1일자로 완전 석간제와 4면 체제를 채택한 <대구매일신문>은 7월 15일 김영호(金永浩, 멜키올)신부가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땀과 사랑으로 겨레의 빛이 되라' 는 사시(社是)가 이때 확고히 명문화되었고, 둘째 1958년 12월7일 대지 312평, 연건평 380평의 남일동(南一洞) 138번지로 사옥을 옮기고 2층으로 된 새 공장을 완공하였으며, 9월에는 처음으로 발행 부수 3만 부를 돌파하였다. 셋째로는 급변하는 사회의 변혁을 알리기 위해 속보 체제를 갖추고 1959년 3월 1일부터 조간 2면 발행 체제를 도입하였다. 이로써 <대구매일신문>은 조석간 총 6면을 발행하였는데, 이는 4면제 완전 석간을 실현한 지 2년만의 발전이었다.
〔전국지로의 발전〕 창간 이래 영남 일대는 물론 전국 신문으로 발전한 <대구매일신문>은 1960년 7월 비로소 전국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해 7월 7일 지역성을 띤 '대구' 자를 빼고 제호를<매일신문>(每日新聞)으로 변경하고 보급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서울을 비롯하여 광주, 정읍, 대전, 영동, 인천, 원주, 청주, 공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 보급망을 설치하고 일본 오사카(大阪)에 해외 지국을 설치하는등 전국지로서의 뉴스 제공과 보급 확대에 힘썼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매일신문>은 1962년부터 6면으로 증간해 주 46면 제작에 들어갔고, 8월 14일부터는 조석간제를 폐지하고 석간 8면으로 발행하였다. 이후 용지난으로 몇 차례 감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매일신문>은 꾸준히 시설을 확장하여 중앙지 수준의 주조(鑄造) 시설을 확보하였다. 그 결과 1970년 12월 2일 8면, 주 48면 발행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증면하는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 <매일신문>의 성장은 1978년 5월 전달출(全達出, 토마스) 신부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전달출 신부는 발행 부수 배가 사업 및 인사 개편, 제판부의 직영화 등을 통해 신문사의 면모를 일신하였고, 1979년 여름에는 방송사 설립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9년에 발생한 10 · 26 이후의 정치 상황은 <매일신문>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당시 신군부에 의해 취해진 언론 통폐합과 1도(道) 1지(紙)의 시책에 따라 대구의 <영남일보>(嶺南日報)를 흡수하였고, 1980년 12월 1일부로 제호를 <대구매일신문>으로 변경하였다. 따라서 방송사의 설립 계획은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격동 속에서도 성장을 계속하여 1981년부터는 12면 발행 체제를 갖추었고, 그 해 11월에는 계산동에 지상 11층, 지하 2층, 부속 건물 3층(연건평 4,331평)의 신사옥을 준공하였으며, 1983년에는 〈남선경제신문>이 창간된 3월 1일을 창간일로 확정했다. 1987년에는 첨단 컴퓨터 조판 시설인 CTS(ComputerizedTypesetting System)를 들여왔고, 주당 8면을 증면하여 주 80면으로 발행하였으며 경북에 3개의 지사(支社, 현 지역 본부)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발전을 거듭하던 <대구매일신문>은 1988년 3월 1일자로 제호를 다시 <매일신문>으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1987년 6 · 29 선언 이후 새로운 언론 환경 변화와 지세(紙勢)의 전국적 확장으로 더 이상 제호를 특정 지명에 한정해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창간 이래 꾸준히 추진해 온 전국지로서의 면모를 명실상부하게 갖추게 되었다. 제호 변경과 함께 1988년 3월 10일부터 CTS로 시험 제작을 시작하였고, 4월 1일부터는 16면 발행 체제로 들어갔으며, 이후 지면은 계속 늘어나 1991년 3월 1일부터는 20면, 9월 2일부터는 24면을 발행하였다.
1991년 6월 전 지면을 CTS로 제작함으로써 납 활자시대를 마감한 <매일신문>은, 1992년 3월에 김부기(金富基, 가브리엘) 신부가 제10대 사장으로 선임되면서 새로운 비약기(飛躍期)를 맞게 되었다. 날로 급증하는 국내외 뉴스의 공급과 지방화 · 전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폭 넓고 다양한 정보 욕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1993년 4월 전면적인 지면 쇄신을 단행하였고, 8월 20일에는 지역 신문으로는 처음으로 28면 시대의 문을 열었다. 또한 도래할 2000년대 최첨단 신문 제작 시대를 위해 1993년 9월 성서(城西)에 인쇄 공장을 준공하였으며, 1995년 1월부터는 신문을 완전히 컴퓨터로 제작하였고 7월에는 새로운 인쇄 시설을 도입하여 48면을 동시에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매일신문>은 이러한 시설을 바탕으로 1994년 11월 21일부터 현재까지 32면 발행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1995년을 대도약(大跳躍)의 해' 로 삼은 <매일신문>은 1996년으로 창간 50주년을 맞았다. 그 동안 숱한 고난과 역경을 헤치며 오늘에 이른 <매일신문>은 대구대교구에서 경영을 맡게 될 때부터 다른 신문들과는 다른 독특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공익(公益)의 사명관, 정의 구현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순교자 정신으로 매진할 수 있는 용기, 언론의 정도(正道)를 걷고자 하는 신념이었다. 비록 경영 주체가 가톨릭 재단이라 하더라도 종교적으로 치우치지 않고 선교목적에 이용하지 않으며, 권력을 겁내지 않고 재력에 눈을 팔지 않는 신문으로 성장하는 것이 <매일신문>의 신념이자 정신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창간 이래 정론 직필(正論直筆) · 공정 보도 · 반독재 투쟁의 선봉으로서 대구 경북 지역의 대변지로 성장해 온<매일신문>은, 오늘날 국제화 · 정보화 · 생활화 · 지방화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에 대처하면서 올곧은 언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 <대구매일신문> ; → 대구대교구)
※ 참고문헌 《매일신문 50년사》, 매일신문사, 1996. 〔方相根〕
<매일신문>
每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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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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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선경제신문> 창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