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에 대한 상례(喪禮)의 한 절차로서, 시신을 땅속에 묻는 것. 〔가톨릭의 매장〕 성서의 매장 : 성서에 죽은 사람의 매장 관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서 구절들과 고고학적인 발견들을 통해서, 비록 한계가 있지만 당시의 관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서 시대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 공통적인 시체의 처리 방법은 화장(火葬)이 아니라 토장(土葬)이었다. 태우는 일에 대해 언급하는 성서 구절들은 향료의 봉헌이나 의례적 분향(2역대 16, 14 : 21, 19 ; 예레 34, 5) 또는 범죄자나 적들의 화형(창세 38, 24 ; 여호 7, 25 ; 레위 20, 14 ; 21, 9)에 대한 언급인데, 범죄자나 적들의 시체는 매장할 수도 있었다(신명 21, 23 ; 여호 8, 29 ; 10, 27). 시체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천으로 염하여 무덤에 안장하였으며(1사무 28, 14 ; 에제 32, 27), 수의는 훨씬 후대에 와서야 사용되었다(요한 11, 44 ; 마르 15, 46). 시체를 무덤에 안치할 때에는 무릎이 턱에 닿도록 구부리게 하거나, 옆으로(주로 왼쪽으로) 눕히거나, 등을 아래로 하여 똑바로 눕힌다. 그 주위에는 생전에 쓰던 물건들, 곧 접시 · 잔 · 주 전자 등의 그릇이나 가구, 무기, 부적, 장신구 따위를 함께 묻기도 하였다.
매장 장소는 예리고, 므기또, 기브온, 라기스의 공동묘지처럼 주거 지역 밖이었으며, 평지에 쓴 무덤이든 바위 언덕을 파낸 묘지든, 미리 무덤의 배치 설계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개인의 무덤은 시가지나 마을에서도 발견되는데, 사무엘은 라마(Ramah)에 있는 그의 집에 묻혔고(1사무 25, 1), 므나쎄는 예루살렘에 묻혔다(2역대 33, 20)고 성서에 언급되어 있다. 개인의 무덤들은 주거 지역 밖에 있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이었다(창세 35, 8 ; 1사무 31, 13). 가족 무덤은 재사용되는 것이 공통적인 매장 관습이었으며, 어떤 경우에는 수백 년 동안 계속 사용해 온 가족 무덤도 있다.
음료와 음식 등 일상 생활 물품의 부장(副葬)은, 죽은사람이 무덤에서 살며 일상 생필품이 필요하고 실제로 이를 사용한다고 생각하였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였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들은 당시 매장 관습의 관행을 따랐으며, 매장은 품위 있는 장례식의 일부로서 죽은 이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육탈(肉脫)된 뼈들을 모아 유골 단지에 담아 다른 곳에 보관하는 후대의 관습은 기원전 2세기경에 일어난 육신 부활에 대한 신앙을 반영한 것이다.
초대 교회의 매장 : 초대 그리스도교의 매장 관습은 사도 행전이 증언하는 대로 유대인들의 관행을 따랐다 (사도 5, 6 ; 9, 37). 그러나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장례식이 지역 풍습에 적응해 나갔고, 지역 풍습은 구속 ·구원 · 영원한 생명 등에 관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내포하게 되었다. 하지만 신자들은 부활 신앙에 입각하여 죽음을 잠으로 보았고 시체는 부활의 씨로 여겼으므로, 시체를 인공적으로 말소시키는 것을 피하였으며, 로마법에 따라 로마 성밖의 국도(via publica) 근처에 있는 지하 묘지(catacumba)에 매장하였다. 매장에 대한 신학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저작 《죽은 이를 위한 배려》(De cura promortuis gerenda ad Paulinum Nolanum)에 깊이 있게 전개되어 있으며, 가장 발전된 매장 전례는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e)의 《교회 위계》(Ecclesiasti-caHierarchia)에 서술되어 있다.
① 염습(殮襲) : 죽음을 확인한 다음 눈을 감겨 주고 입을 닫아 준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곡(哭) 대신 시편을 노래하였는데,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자비와 심판을 노래한 시편 100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다음에 시신을 깨끗하게 씻는다. 사도 행전에서도 도르가 (Dorga)의 시체를 깨끗이 씻었다고 증언하고 있다(9,37).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는 "내가 죽는다면 깨끗이 씻고 난 후에 창백하게 굳어갈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러한 관행의 지속을 증언하였다. 또한 가시아노(JoannesCassianus), 안토니오(St. Antonius),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에 따르면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방부 처리를 하였다고 하며, 키로(☧) 문자나 착한 목자상을 유해와 함께 묻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 매장 전에 도유(塗油)를 하였는데, 도유는 세례 도유의 완성이며 그가 승리의 투쟁을 치러 냈다는 것을 상징하였다.
도유에 이어 죽은 사람에게 수의를 입히고 아마포로 묶었다. 세례 때에 흰 옷을 입는 것처럼 장례 때의 흰 아마포는 불멸성을 상징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전의 신분에 따라 겉옷을 입혔는데, 보통 검정색이나 자색이었다. 교부들은 겉옷에 금이나 은으로 장식하는 것은 사치라고 질타하면서, 불멸과 부활의 옷에 관심을 더 쏟으라고 촉구하였다. 6세기경 교회법 규정은 전례 때에 사용한 천이나 옷으로 시신을 묶거나 덮도록 하였다. 시신에 관(冠)을 씌워 주는 관습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신들에게 관을 씌웠던 우상 숭배와 관련된 것이라고 거부하였으나, 후에는 이를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주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② 밤샘 기도 : 가능하다면 매장 전에 사망한 사람의 집 같은 곳에서 밤샘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사망한 당일에 매장하는 경우에는 사흘 동안 그 무덤을 지키게 하였으며, 사망한 다음날 매장하는 경우에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성당에서 거행하는 철야 기도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러한 관습은 수도원의 관행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시신 주위에는 촛불을 켜 놓는데, 이는 죽은 사람이 부름받은 영원한 빛(lux perpetua)을 상징하는 것이다. 사제들은 시신 옆에서 죽음과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성서 구절들을 봉독하였다.
③ 운구(運柩) : 그리스도인들의 장례 행렬은 성대한 행진이었다. 이러한 행렬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이후는 물론이고 초기 순교자들의 소박한 장례에도 적용되었다. 천으로 덮은 시신을 시상(屍床)에 얹어 운구하였는데, 시신의 얼굴을 조금 높여 드러내 놓았다. 후에는 운구를 도맡는 공식 상여꾼들(lecticarii)이 있었으나, 흔히 유족이나 친척들이 운구를 맡았다. 유명 인사의 장례 때에는 주교들과 사제들이 운구를 하고 유족과 친지들이 그 뒤를 따랐다. 좀더 장엄한 장례식에서는 시종들이 행렬을 인도하고 부제들이 횃불을 들고 시신을 호위하였다. 경우에 따라 참가자들 중 여자들은 수녀들과 함께, 남자들은 수사들과 함께 행렬하기도 하였다. 운구 행렬의 특징은 승리를 거둔 개선이었으며, 이는 이교도들을 놀라게 하는 장관을 이루었다. 악기를 연주하거나 곡하는 사람, 배우, 광대들을 동원하는 이교적인 관행들은 배제되었고, 행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시편을 노래하였다. 성요한 그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하는 이유를 "하느님께서 세상을 떠난 이에게 월계관을 씌워 주시고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기에, 그리고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난 죽은이를 하느님께서 당신과 함께 머무르게 하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설명하였다. 장례 행렬 때에는 주로 시편22, 31, 100, 114, 115편 등을 노래하였다.
④ 미사의 거행 : 그리스도교 장례의 특징은 미사의 거행이었다. 이교도들은 흔히 물고기를 제물로 하여 죽은 이에게 제사를 바쳤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교는 고유의 물고기(ΙΧΘΥΣ,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죽은 이를 위하여 봉헌되었다. 위경인 《요한 행전》(기원전 150~180)에는 무덤에서 거행하는 미사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장례 때의 미사 봉헌관행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미사는 무덤이나 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콘스탄틴 대제와 성녀 모니카를 위한 미사는 무덤에서 거행되었고, 베로나의 제노(Zeno of Verona)와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는 매장 전에 성당에서 미사가 봉헌되었다고 하였다.
⑤ 매장 : 고별사는, 성당에서 하지 않았을 경우 친척이나 친구가 무덤에서 하였는데, 이는 죽은 이를 칭송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족들을 신앙으로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 니사의 그레고리오, 암브로시오 등이 한 고별사가 특히 유명하다. 그런 다음 친지들은 시신에 마지막 입맞춤을 하는데, 집에서 운구하기 전에도 입맞춤을 하였다.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가 성당에서 거행하는 전례의 일부로서 입맞춤을 언급한 것은 시신에 대한 자연스러운 애정과 그리스도교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대의 종교들은 시체에 대한 접촉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한 반면, 입맞춤은 그리스도교의 관행이었다. 아마포로 싼 시신은 무덤에 눕히는데, 손은 펴서 몸과 나란히 두거나 가슴 위에 포개 놓는다. 그리고 영광중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παρουσία)을 기다리도록 동쪽을 향해서 묻었다.
신자들은 처음부터 화장이 아니라 토장을 함으로써 유대인들의 관례를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를 모방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신자들은 토장이 육체에 대한 존엄성과 부활의 신비와 희망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사도 바오로는 썩어 없어질 육신과 결코 썩지 않을 부활(1고린 15, 42-57)을 설명하였다. 그리스도교의 토장이 부활과 관련된 것으로 여긴 이교도들은 때때로 신자들의 시신을 불태우거나 독수리들에게 내어 주기도 하였으나, 789년 카알 대제는 화장을 금지시켰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하였다. 반면, 당대의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은 고유한 장례식의 엄수가 죽은 이의 영혼이 사자(死者)들의 나라에서 안식을 얻도록 하는 핵심적인 일로 여겼다. 즉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 주지 않으면 죽은 이는 안식을 얻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寃魂)이 된다는 것이다.
묘지를 떠나기 전에 참가자들은 고별 인사를 하였다. 이교도들의 인사는 마지막으로 헤어질 때 하는 '잘 있어라' (vale)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영원히 살아라' (vivas)이다. 이 인사는 세상을 떠난 이가 하느님 안에서 영원히 살며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하여 전구해 달라는 기도이다. 죽은 이를 기억하는 특별한 날들은 3일, 7일(또는 9일), 30일(또는 40일), 그리고 연례 주기(周忌)이다. 성인들의 축일은 바로 이러한 주기 거행으로부터 발전하였다. 그 축일들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 삶과 죽음의 신비 곧 파스카 신비의 연장이라 하였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 짓게 하는 신앙"이라고 말하였다.
교회법의 규정 : 현 교회법은 "교회는 죽은 이들의 몸을 땅에 묻는 경건한 관습을 보존하기를 간곡히 권장한다. 그러나 화장을 금지하지 아니한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교리에 반대하는 이유들 때문에 선택하였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1176조 3항)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은 육신 부활의 교리에 그 토대를 두고 있는데, 육신은 영혼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고 영예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절하고 안전한 장소에 매장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에서 "본당 사목구가 고유한 묘지를 가지고 있으면 죽은 신자들은 그 곳에 매장되어야 한다. 다만 사망자 본인이나 또는 사망자의 매장을 돌보는 이들이 다른 묘지를 합법적으로 선택하였으면 그러하지 아니하다"(1180조 1항)라고 규정하였다. 오랜 시기 동안 변함없이 이어진 교회의 매장 방식은 교회의 예식, 즉 전례법의 규범에 따라 거행(1176조 2항)되어야 하는데, 전통적으로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부분은 밤샘 기도 · 염습 · 입관 등 죽은 이의 집에서 하는 예식이며, 둘째 부분은 장례 미사 ·고별식 등 성당에서 하는 예식이며, 셋째 부분은 묘지로 가는 행렬 · 무덤 축복 · 하관 등 묘지에서 하는 예식이다. (→ 교회 묘지 ; 장례 미사 ; 부활 ; 화장)
※ 참고문헌 A.C. Rush, 《NCE》 pp. 893~896/ 정진석, 《교회법 해설》 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5/ J.A. Coriden · T.J. Green · D.E. Heintschel, The Code of Canon Law : A Text and Commentary, The Canon Law Society of America, Paulist Press, New York, 1985/ T.F. Heneghan, 《CE》 2, p. 133. 〔姜大仁〕
〔한국 전통의 매장〕 매장의 이유 및 종류 : 상례에서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은 저승 세계에 대한 관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일반적으로 저승 세계는 공간적으로 땅 위, 땅속, 하늘로 구분되고 있다. 따라서 저승이 땅위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신을 땅 위에 두고 돌이나 흙으로 덮어 처리하며, 하늘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신을 분해하거나 불에 태워 없애 버리며, 땅속에 있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신을 땅속에 묻는다. 결국 매장은 땅속에 저승이 있다고 믿는 관점에서 생긴 장법(葬法)이다.
현재까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는 매장법은 형태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기준은 시신을 땅속에 묻은 다음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는가의 여부에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매장은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지 않는 것을 의미하나, 시대적 ·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매장과 함께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는 형태가 등장하였다.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는 것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땅 위에서 계속하여 기리고자 하는 관념에 의해서 생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지 않은 것은 영혼에 대한 뚜렷한 관념이 형성되기 전의 무덤이거나, 아니면 영혼관에 대한 확실한 관념이 없는 종교나 신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시기나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되는 무덤의 형태는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지 않는 구덩 무덤〔土葬墓〕, 돌널 무덤〔石棺墓〕, 널 무덤〔土壙墓〕, 독 무덤〔甕棺墓〕 등과 함께, 그와는 반대로 땅 위에 뚜렷한 표지물을 남기고 있는 돌덧널무덤〔石槨墓〕, 지하 매장 뚜껑돌 무덤[蓋石式 支石墓〕, 지하 매장 고임큰돌 무덤〔卓子式 支石墓〕, 나무덧널 무덤〔土壙木槨墓〕, 돌방흙 무덤〔封墳墓〕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땅 위에서 시신을 처리하는 무덤으로 굴 무덤〔洞窟墓〕, 고구려의 전형적 무덤으로 알려진 돌무지 무덤〔積石塚〕, 지상고임 뚜껑돌 무덤[支石墓]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에 있어서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시신과 영혼에 대한 다양한 종교· 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유형 및 변천 : ① 고조선~삼한 시대 : 우리 나라의 매장제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장법은 '구덩 무덤' 으로서, 뼈와 함께 간돌 연장(磨製石器)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경흥군 웅기에서 발견된 예를 보면, 모두 14구의 유골이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몸은 수평으로 발을 뻗고 있는 자세를 한 채, 머리 쪽에는 항아리가, 다리 사이에는 돌화살촉이 함께 발견되었다. 말하자면 공동장의 하나로서, 이곳은 공동 묘지의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매장법을 동침신전 양와장(東枕伸展仰臥葬)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해가 뜨는 동쪽에 머리의 방향을 일치시킨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일정한 방위 관념이나 또는 영혼 관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 매장법은 널 무덤' 과 함께 가장 오래된 장법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우리 나라에서 가장 보편적인 장법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널 무덤' 은 구덩 무덤과는 달리 주검을 넣는 자리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바닥 · 벽면 등을 명확하게 파며, 또한 그 안에 나무널이나 나무덧널과 같이 주검을 보호하는 시설을 함께 갖추고 있다. 이 널 무덤의 특징은 우선 관과 같이 나무로 된 주검의 보호 시설을 갖추고 있는점과 그 부장품에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평양시 태성리, 경주시 조양동, 김해군 예안리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다. 이 무덤은 철기와 함께 중국 한나라의 그릇, 그리고 나무로 된 널이나 덧널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지하 장법을 위주로 하고 있는 중국 문화의 영향과 함께 새로운 문화 단계인 철기 문화가 시작된 이후에 등장한 무덤이라고 하겠다. 이 매장법은 시신에 대한 특별한 관념이 형성된 다음부터 사회적 권력이나 경제력이 없는 계층이 시신을 가장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장법이었다. 반면 이 장법은 돌을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이나 경제력을 갖고 있는 계층에서는 돌을 사용하여 땅속에 일정한 공간을 만드는 '돌널 무덤' 등과 같은 무덤으로 발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돌널 무덤' 은 지하에 판석이나 냇돌 등을 섞어서 네모난 관이나 상자를 만들어 주검을 처리한 것으로, 지상에 거의 표지를 남기지 않고 있다. '구덩 무덤' 과 똑같은 관념에서 생긴 지하 장법일 것으로 보이나, 돌을 사용하여 매장 시설을 구분하고 또 일정한 공간을 만들고 있는점에서 다른 수준의 신앙과 문화적 내용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돌을 사용하여 지하나 지상에 일정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무덤이 단순한 주검의 처리를 위한 시설에서 벗어나 저승에서의 활동 공간을 확보해 주고있는 배려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형태의 무덤을 만들 수 있었던 사회는 돌을 다룰 수 있는 금속 연장의 출현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고, 또 저승 세계에 대한 일정한 관념이 발달한 사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돌널 무덤은 "지하 장법 +정치 권력에 의한 돌의 사용+돌을 다룰 수 있는 금속 연장의 등장+저승 공간에 대한 관념" 이라는 복합적 성격을 갖고 있는 무덤이다. 동시에, 이 무덤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등장한 정치 집단의 무덤일 것으로 여겨지며,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다. 이 무덤은 정치 권력이 확산됨에 따라 각 지방으로도 퍼진 것으로 보이는데, 널을 구할 수 없는 지방에서는 널 대신에 작은 돌들을 쌓아 만드는 '돌덧널 무덤'으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선사 시대의 지하 장법 중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독 무덤' 이 있다. 이 독 무덤은 우리 나라에서는 주로 남쪽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중국 황하 유역의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도 다량으로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 무덤은 중국의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독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철제 도구가 발견되고 있는데 아마도 철기 문화를 지닌 정치 집단의 후예들에 의해서 철의 생산 기술과 함께 남쪽 지방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독널들의 크기가 0.5~1.3m인 것으로 보아 거의 모두 어린아이의 무덤으로 생각된다. 어린아이의 시체를 독널에 넣어 묻는 풍속은 일제 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러한 전통과 관습은 바로 이 독 무덤' 에서 찾아진다고 하겠다.
'돌덧널 무덤' 은 그 형태와 재료로 보아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 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로 넓적한 몇 개의 돌널을 사용하여 매장 시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백 개의 막돌을 쌓아서 만들고 있다. 둘째 돌덧널의 안에 시신을 모실 때 나무로 만든 널을 사용하고 있다. 셋째 지상에 무덤이란 표지로 중국과 같이 흙 무더기를 쌓아 올리고 있다. 따라서 이 돌덧널 무덤은 매장의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 지상에 그 표지물로서 흙 무더기를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하 장법과 지상 장법이 혼합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돌덧널 무덤은 "구덩무덤 · 널 무덤 · 돌널 무덤 · 흙 무덤"의 성격을 두루 갖춘 것으로서,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매장법과 중국의 것이 결합되어 생긴 것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돌덧널 무덤은 "지하 장법인 돌널 무덤의 전통+지역에 따른 막돌의 사용+관의 사용+흙더미"라는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땅 위에 표지물을 남기는 것이 반드시 중국 문화의 영향만은 아니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나라의 선사시대에도 발견되고 있는데, 주검을 지하에 매장하고 땅 위에 큰 돌로 표지를 하는 '지하 매장 뚜껑돌 무덤' 과 '고임큰돌 무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무덤들은 기본적으로 시신을 땅 위에 두는 '지상고임 뚜껑돌무덤' (북방식 지석묘)과 같은 계통이면서도, 지하에 주검을 매장하고 있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넓은 분포를 보이고 있는 것은 '지하 매장 뚜껑돌 무덤' 이다. 이 무덤은 지하에 시신을 처리하는 시설을 하고 그 뚜껑으로 큰 덮개돌을 사용하고 있는 구조로 보아, '돌덧널 무덤' 이나 '돌무지 무덤' (石塚)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이것은 특히 우리 나라의 남쪽 지방에 집중적인 분포를 보인다. 또한 '지하 매장 고임뚜껑돌 무덤' 은 땅속에 독립적으로 돌널이나 돌무지로 시신을 묻고, 그 지상에 하나의 표지물로서 큰 돌을 몇 개의 받침돌로 받쳐서 만든 무덤이다. 이것도 한강 이남 지방에서만 발견되고 있다. 이들 큰 돌들은 길이가 2~8m에 이르며, 무덤의 전체 높이가 2m에 이르는 것도 있다. 이러한 무덤들은 시신을 지하에 매장하든, 아니면 지상에 처리하든 땅 위에 표지물로 큰 돌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큰 정치적 세력을 가진 집단에서 그들의 조상들의 영혼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하는 뜻에서 만든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큰 돌을 운반하거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② 삼국~통일 신라 시대 : '나무덧널 무덤' 은 지하 매장을 주로 하고, 지상에 봉분으로 무덤의 표지를 한 무덤으로서, 중국에서 발달한 무덤이다. 이 무덤은 한사군(漢四郡) 시대의 것으로서, 당시 한나라에서 파견된 지배자의 무덤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에서는 평안도 이 외에는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사군이 멸망한 다음에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나무덧널 무덤은 후에 고구려의 전형적인 무덤 형태인 '돌무지 무덤'과 합쳐 통일 이전 신라의 전형적인 무덤 형태인 '돌무지 나무덧널 흙 무덤' (積石木槨封土墳)으로 발전하였다. 즉 고구려와 중국의 지배 계층의 전형적인 무덤인 지상 장법의 돌무지 무덤과 지하 장법의 나무덧널 무덤이 통합되어 나타난 것이 통일 이전 신라 시대의 지배 계층의 전형적인 무덤인 '나무덧널 흙 무덤' 이라고 하겠다.
한강을 중심으로 발달한 백제의 무덤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지상에 시신을 처리하고 있는 '돌무지 무덤' , 돌덧널 무덤' 으로 밝혀지고 있지만, 수도를 공주와 부여로 옮긴 다음부터는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중국식의 벽돌방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신라는 통일 이전에는 비교적 복합적인 무덤을 발달시켜 지배 계층의 권위를 확립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통일 이후에는 주로 중국식의 흙무덤을 만들었다. 그 좋은 예를 현재 경주의 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도 무덤의 주위를 자연석이나 12지 신상을 새긴 판돌을 돌려 흙무지가 허물어지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돌무지 무덤' 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내부는 잘 다듬은 돌로 방을 만들고 시신은 나무널에 넣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돌벽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와 조선 시대의 왕릉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립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③ 고려~조선 시대 : 고려 말부터는 지배 계층 이외의 계층에서도 유교식 매장제가 보편화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이 정치적 지배 이념으로 채택되기 시작한 뒤부터 조상 숭배 의례를 위한 매장제가 기본으로 되어 있는 《가례》(家禮)의 시행을 국가적으로 권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강화되어,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사대부는 물론 일반 서민들도 매장을 하고 그 위에 흙무지로 무덤을 만들었다. 이러한 매장제는 널 무덤' 의 전통과 같은 것으로, 시신이 담긴 관에 알맞도록 땅을 파고 관을 넣은 다음에, 그 위에 몇 개의 나무쪽으로 덮고 석회로 단단하게 다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땅 위에 둥근 흙무지를 만들어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땅속에 시신을 묻고 있는 것은 유교의 저승이 땅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땅 위에 표지물을 만들고 있는 것은 그곳이 바로 조상 숭배를 위한 의례 장소라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조상 숭배 의례인 성묘와 제사도 무덤 앞에서 올리는 것이다.
※ 참고문헌 김원룡, 《한국의 고분》,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1974/ 장철수,《한국의 관혼 상제》, 집 문당, 1995. 〔張哲秀〕
매장
埋葬
〔라〕sepultura · 〔영〕bur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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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바에 매장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왼쪽)과 가이오 교황의 지하 묘소 내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