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동 본당

玫花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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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렴과 머내 사이의 언덕에 세워진 매화동 본당과 사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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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렴과 머내 사이의 언덕에 세워진 매화동 본당과 사제관.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본당. 황해도 안악군 용문면 매화리 소재. 1896년 8월 황해도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어 1897년 여름 본당명을 마렴(麻簾)에서 매화동으로 변경하였다. 주보는 로사리오. 〔역대 신부〕 초대 빌렘(J. Wilhelm, 洪錫九) 요셉(1896. 8~1898. 4), 2대 우도(P.Oudot, 吳保祿) 바오로(1898. 7~1913. 10), 3대 샤보(J.Chabot, 車麗松) 율리오(1913. 11~1920. 12), 임시 멜리장(P. Mélizan, 梅履霜) 베드로(1914~1919, 1920. 12~1921.5), 4대 퀴를리에(L.Curier, 南一良) 레오(1921.5~1931.4), 5대 신인균(申麟均) 요셉(1931. 4~1934. 8), 6대 이선용(李善用) 바오로(1934. 9~1937.5), 7대 이여구(李汝球) 마티아(1937.5~1950.7)
〔공소 시대〕 1890년대 황해도 안악군(安岳郡)의 천주교 전교는 수안(遂安) 덕곡(德谷) 등지에 거주하며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선교사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쿠데르(V.Coudrc, 具瑪瑟), 로(J. Rault, 盧若望), 르 장드르(L.Le Gendre, 崔昌根) 신부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0년대 초 안악군에는 문산면(文山面)의 마렴, 원성리(遠星里)의 상촌, 안흘(安屹) 공소가 있었는데, 그중 안악군 최초의 공소라고 할 수 있는 마렴 공소가 가장 규모가 컸을 뿐만 아니라 평양과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교통도 편리하여 안악 지방에서 천주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며, 교세도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설립 및 폐쇄〕 1896년 4월 조선 대목구 성직자 연례피정 때,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오던 황해도와 평안
도 지역의 사목 분할이 결정됨에 따라 빌렘 신부가 황해도 지역의 사목을 관할하게 되었다. 빌렘 신부는 8월 1 일 마렴에 도착하였는데, 이 지역을 담당하였던 르 장드르 신부로부터 마렴, 상촌, 안흘을 비롯하여 나가들, 고 정동(高井洞), 은율(殷栗), 사직동(社稷洞), 두섭〔道習〕, 아현(峨峴), 신설도, 재령(載寧) 등 총 11개의 공소를 인수받았다. 초대 주임 빌렘 신부는 오두막집에 기거하며 임시로 작은 초가 성당 한 채를 지어 그 해 10월 4일 로사리오 축일을 맞아 축성식을 거행하였으며, 첫 미사를 봉헌하고 첫영성체도 집전하였다. 또 신자 가정의 어 린이들을 위해 서당 성격을 띤 소규모의 학교를 개설한 그는, 학교 유지 재원(財源)으로 각각 12마지기의 논과 밭을 매입하는 한편, 프랑스의 자선 단체에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1897년 여름에 본당이 마렴과 머내〔遠川〕 사이에 있는 언덕 위에 기와집으로 신축된 성당으로 이전하자 그 일대에 본당 주보 '로사리오' 의 한자 표기인 '매화' (玫花)에서 명칭이 유래된 매화리라는 동네가 형성되었는 데, 이에 본당명도 매화동으로 변경하였다. 매화동 본당이 있는 용문면(龍門面)은 안악군의 중앙에 위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육로 및 수로상으로도 요지였다. 그 후 빌렘신부는 1898년 4월 말 관할 공소인 신천군 두라면 청계 동(信川郡 斗羅面 清溪洞) 공소로 거처를 옮겨 청계동 본당을 설립한 후 초대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1898년 7월에는 부산(釜山)에서 전교하던 우도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부임 직후 200여 명의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이 지역의 초기 신자인 임지환(林智煥, 시몬), 백지응(白智 應, 데레사) 부부가 살았던 집터를 포함한 넓은 땅을 성당 부지로 매입하였으며, 이듬해 6월 공사에 착공하여 3 개월 만인 9월에 한옥 기와집 성당을 준공하였다. 또 빌렘 신부 혼자서 사목을 관할하던 황해도 내의 공소가 1898년 청계동 본당과 장연(長淵) 본당이 설립됨에 따라 분할 조정되었는데, 우도 신부는 이때 안악군의 상촌, 안흘, 동창포, 곰바위, 장련군(長連郡)의 장련, 고정동, 신천군(信川郡)의 신설도, 귀털몰, 황주군(黃州郡)의 철 도(鐵島) 등 9개 공소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든 농민들이 많은 현실을 감안하여 많 은 토지를 매입한 후 그들에게 소작을 줌으로써 전교 활동을 활성화시키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99년 한 해 동 안 500여 명의 영세자가 배출되어 본당 교세가 크게 신장되었다. 그 밖에도 우도 신부는 종교 교육과 문맹 퇴치 를 목적으로 황해도 지역 최초의 사학(私學)이라고 할 수 있는 봉삼학교(奉三學校)를 설립하고 남자부와 여자 부로 구분하여 남학생들에게는 교리 및 한문을, 여학생들에게는 기도문 · 한글 · 가사(家事) 등의 교육을 실시 하였다. 1906년부터 본격적으로 신학문을 가르쳐 오던 봉삼학교는, 1907년에 근대적 교육 시설을 갖춘 초등
교육 기관으로 정식 설립되었고 1909년에는 사립 학교인가를 받았는데, 애국심과 도덕심을 배양시켜 학생들이 국태민안(國泰民安)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취지였다. 이 무렵 매화동 본당의 전교 회장 민영구 (閔泳龜, 베드로)와 그의 아들 민윤식(閔允植,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안태훈(安泰勳, 베드로)은 우도 신부를 도 와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미사 때 복사를 맡는 등 전교 활동과 함께 애국 계몽 운동에 적극 협조함으로 써 본당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이어 우도 신부는 자신의 사목 및 교육 사업을 도와 줄 수녀들의 필요성을 느껴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였고, 뮈텔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여 1909년 10월 1일 박 뱅상 수녀와 배 베로니카 수녀가 본당에 도착함으로써 본당내에 수녀회 분원이 개설되었다. 수녀들은 봉삼학교 여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또 1912년부터 우도 신부는 봉삼학교 여자부에 누에치기와 명주실 뽑는 일을 실 험적으로 실시하여 효과를 거두자 양잠 강습소(養蠶講習所)를 개설하고, 그 기술을 널리 보급시킴으로써 주민들 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매화동 본당에서 약15년 동안 사목하면서 전교회, 성의회(聖衣會) 예수 성 심회, 성모 성심회, 매괴회 등 여러 신심 단체를 조직하고 성영회(聖嬰會) 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우도 신부는, 1913년 10월 31일 사망하여 매화동 본당 내에 묻혔다.
3대 주임 샤보 신부는 부임한 지 얼마 안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수녀들도 본 원으로 돌아감에 따라 매화동 본당의 사목은 재령 본당 2대 주임으로 있던 멜리장 신부가 임시로 담당하였다. 1916년 본당 신자들은 우도 신부가 계획을 세웠던 성당의 정문을 건립한 후 '숭삼문' (崇三門)이라고 명명하였 으며, 1919년 10월에 샤보 신부가 본당으로 복귀하자 수녀들도 다시 파견되었다. 그러나 샤보 신부가 용산 예 수성심신학교 교수로 임명되어 1920년 12월에 서울로 떠나자 멜리장 신부는 이듬해 5월까지 다시 매화동 본당 의 임시 주임으로 사목하였다. 이 무렵 매화동 본당의 관할 구역은 안악군과 신천군 일대의 9개 공소였으며, 신
자수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4대 주임 퀴를리에 신부는 1921년 가을 협소한 봉삼학교 교사(校舍)를 이전하였으며, 1926년에는 성당 부 근의 가옥 한 채를 매입하여 봉삼유치원을 개원하였다. 이보다 앞서 1925년에는 수녀들에 의해 가톨릭 여자 청 년회가 창설되었으며, 1934년에 소화시약소(小花施藥所)를 개설하였다. 5대 주임 신인균 신부는 1930년 10 월 26일 사제로 서품된 후 같은 해 12월 매화동 본당의 초대 보좌 신부로 임명되어 사목하였으나, 전임 퀴를리 에 신부가 67세의 고령으로 사목 활동에 어려움이 많아 은퇴하자 이듬해 4월 정식 주임 신부로 임명되는 동시에 봉삼학교의 교장직도 맡았다. 당시 계속되는 재정난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봉삼학교는 신인균 신부의 적극적인 홍보와 운영 방식에 힘입어 1934년에는 학생 수가 500여 명으로 증가하고 학제(學制)도 6년제로 개 편되었다. 이에 교실을 6개로 증 · 개축하고 보통 학교 인가를 신청하였으나, 6대 주임 이선용 신부가 학교의 운영 및 유지 문제를 우려하여 인가 신청을 자진 철회함으로써 사립학교로 존속하다가, 해방 후 공산 치하가 되 면서 인민 학교(人民學校)로 통합되었다. 매화동 본당에서는 1935년 6월 20일에는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지 역의 신부 10여 명과 신자 2,000여 명이 참가한 성체거동 행사를 거행하였다. 또 1899년 6월 우도 신부에 의해 매화동 본당 관할 공소로 설정되었던 안악 공소의 교세가 나날이 신장되어 37년 만인 1936년 5월에 안악 본당으로 승격되어 매화동 본당 신자 600여 명의 교적이 이관되었다.
한편 매화동 본당에서는 일찍이 최익형(崔益馨, 노르베르토)를 비롯한 몇 명의 본당 신자들이 본당의 전교 사업을 후원할 목적으로 선교회(宣敎會)를 창설하였는데, 이 단체는 처음에 회원들이 내는 회비와 찬조 회원들 의 기부금 등으로 기본금을 조성한 후 점차 신자들을 대상으로 예금 및 대출 등의 신용 금고와 같은 역할을 하였 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온 수입을 봉삼학교 운영비 및 본당의 경상비, 그리고 유급 전교사의 급료 등으로 사용함 으로써 본당의 경제적 자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매화동 본당은 1937년 5월 충남 부여(扶餘)에서 사목하던 이여구 신부가 7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약 13년 동안 교세 신장 및 본당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일제 말기와 공산 치하에서 많은 고통을 겪다 가 결국 이여구 신부가 1950년 7월 17일 북한 공산군에게 납치됨으로써 침묵의 본당으로 남게 되었다. (→ 침 묵의 교회 ; 봉삼학교)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교회와 역사》 79호(1982. 1), 한국교회사연구소, p. 6/《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 편, 《황해도 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편,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1991.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