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피스트회 수도승. 신부. 시인. 작가.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월 31일, 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동쪽 에 있는 프라드(Prades)에서, 뉴질랜드인으로 풍경 화가인 오웬 머튼(Owen Merton)과 미국인 예술가인 룻(Ruth)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이듬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종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머튼은, 6세 때 어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사이를 옮겨 다니며 생활하였고 1925년에는 프랑스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1929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오캄(Oakham)의 공립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3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잠시 방황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 케임브리지(Cambidge) 대학교의 클래어 칼리지(ClareCollege)에 입학한 머튼은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공언하면서 학업에 소홀하였다. 이러한 머튼에게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케임브리지의 분위기는 힘들게만 여겨졌다. 결국 수업보다는 정신 분석학자들의 저서들을 탐독하는 데 더 열중하였던 머튼은 19세 때인 1934년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주의 컬럼비아(Columbia)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독서와 토론을 통해 토마스 아퀴나스 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을 읽으면서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23세 때인 1938년에 세례를 받았고, 박사 학위를 준비하면서 수도 성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프란 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자신의 수도 성소에 대한 확신이 없어 미루다가 1940년부터 성 보나 벤투라 대학(St. Bonaventura College)에서 영어 강의를 하던 중 그의 나이 26세 때인 1941년 12월 10일, 켄터키주에 있는 트라피스트회의 게쎄마니 대수도원에 입회하였다. 1944년에 첫 서원을 하였으며, 194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머튼은 출생 후부터 자신의 삶 안에서 역사하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설명한 자서전적인 책 《칠층산》(七層山, The Seven Storey Mountain)을 1948년에 출판함으로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국제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튼이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과 재능을 받았음을 인지한 그의 장상들은 꾸준히 글을 쓰도록 격려하였고 또 명령하였다. 머튼은 이에 대한 순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이후 많은 유명한 작품들을 저술하였는데, 초기 12년 동안의 책은 주로 종교적인 문제, 즉 기도· 금욕주의 영적 성장 등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명상의 씨》(Seeds of Contemplation, 1949), 《명상이란 무엇인가》, 《가장 완전한 기도》와 그 외의 많은 저서 등에서 보여지는 머튼의 깊은 믿음, 자발적인 가난과 보속과 기도의 생활, 하느님의 자비에 독자들은 많은 감명을 받았다. 후기의 저작은 인종 문제 · 폭력 · 전쟁 · 경제적 불평
등과 같은 사회 문제와 그리스도교인의 책임에 대한 논쟁적인 주제를 선택하여 저술되었다. 특히, 머튼의 종교 일치 운동에 관한 관심은 시대를 앞선 것이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 준 종교 상호간의 이해에 대한 입 장 표명은 머튼에게 종교 일치에 대한 강한 열의를 갖게하였다.
1965년부터 머튼은 수도원장의 허락을 받아 수도원 근처의 초막에서 생활하면서, 수도자들의 주간 영성 훈 화를 담당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과거의 삶을 계속하여 성찰했고 수도원의 전통을 연구하였다. 또한 동방 교회의 영성, 즉 시리아의 은수자들과 러시아 정교회의 주교이며 영성 저술가였던 자트보르닉(Theophan Zatvornik, 1815~1894), 그리고 현대 동방 교회의 영성에 영향을 미친 '필로칼리아' (φιλοκαλία) 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동시에 불교의 선(禪)을 가톨릭적으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여 《선과 욕망의 새들》(Zen and the Birds of Appetite, 1968)과 《신비주의자들과 선의 거장들》 (Mystics and Zen Masters, 1967)을 저술하였다. 특히, 1966 년에 출판된 《죄를 지은 방관자의 추측》(Conjectures of a Guilty Bystander)은 수도승의 명상적인 시각에서 세계의 사건을 비평한 일종의 신문(journal) 같은 책이었다.
1968년 방콕으로 출발하면서 머튼은 중요한 육필 저작 2권을 남겼는데, 기도 생활에 대해 폭 넓게 설명한 그 의 마지막 수필 《내적 경험》(The Inner Experience)에서는 머튼의 생애 말기에 지녔던 생각과 사상에 관한 흥미 있는 자료들을 발견할 수 있고 불교의 선과 힌두교의 신비주의에 깊이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원고는 《수도원의 기도 분위기》(The Climate of monastic Prayer, 1969)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책은 수도승의 생활에 대해 남겨 준 가장 폭 넓은 논설 중의 하나로 인간의 경험을 수도원 전통의 실제와 언어에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머튼 사후에 발표된 《토마스 머튼의 아시아 저널》(The Asian Journal ofTh. Merton, 1973)은 그리스도교의 수도승들이 선뿐만 아니라 불교와 힌두교의 전통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에 관한 개인적인 입장을 설명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전통들이 머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관련성을 보여 주고 있다.
1968년 12월 10일, 머튼은 태국의 방콕에서 베네딕도-시토회 : 원장들 모임의 강연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스탠드형 선풍기를 켜다가 전기 감전으로 인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 이날은 그가 수도원에 입회한 지 27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의 시신은 즉시 미국의 게쎄마니 수도원으로 옮겨져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머튼은 그의 생애 동안 40여 권의 책과 100여 편의 수필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21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은 1950~1968년 성서학자인 르클레르(Jean Leclerc)와 주고받은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닥터 지바고》를 쓴 소설가 파스테르나크(Bons Pas-ternak)와의 편지이다. 머튼이 자신의 영적 생활과 수도원 전통에 관련해 저술한 대부분의 원고들과 632편의 회의 기록 및 담화 기록은 켄터키 주 루이스빌(Louisvile)의 벨라르민 대학(Bellarmine College)에 있는 '토마스 머튼 연구소' (Thomas Merton Studies Center)에 보관되어 있다. 또 그가 지은 기존의 시들과 발표되지 않은 시들이《수집된 새로운 시들》(Collected and New Poems)이란 제목으로 1977년에 출판되었다.
〔영 성〕 머튼은 그 무엇보다도 세상의 평화를 위해 많은 열의를 쏟았다. 그는 전쟁과 폭력에 대항하여 기도와 희생이라는 영적인 무기로 싸웠고, 자신의 저서와 성명서를 통해 '전쟁은 정의를 위한 합당한 도구가 될 수 없 다' 는 비폭력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미국의 월남전을 맹비난하여 미국 정부와 교회로부터 많은 압박을 받 았고, 한때는 출판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발표된 요한 23세 교황의 회칙 <지상의 평화> (Pacem in Terris)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머튼의 주장과 같은 입장인 것이 밝혀지자 교회의 분위기는 변화되었 다. 전쟁을 단죄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평화론자에게 끊임없이 강조한 것은 "진정한 문제는 내적 변화의 문제이 다. ··· 영적인 힘의 적용이지, 단지 정치적인 힘의 적용이 아니다. 정치적인 평화 운동은 구호에만 그칠 뿐이고 인간적인 면을 소홀하게 만든다.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정치-인간적' 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정치적인 것을 배제하여 인간적인 측면만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어서 "결과에 의존하지 말고 꾸준히 바르고 참된 일을 계속해라. 비록 너의 행위가 기대에 어긋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참된 사도 적 활동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구원하는 인간성 회복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 큰 결과는 그대의 것도 내 것도 아 니다. 그러나 갑자기 일어난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함께 공유하자"고 주장하였다.
머튼은 그의 마지막 생애 동안 동방 종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동방 수도자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그리 스도교 진리와 동방의 진리와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가톨릭은 "성령의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불도록"(요한 3, 8 참조) 성령의 역사(役事)하심에 항상 개방된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실 천에 옮긴 머튼은 베트남의 불교 수도승 낫한(Nhat hanh)과의 만남을 "같은 인종과 국적을 가진 나와 가까운 많 은 사람들보다 그는 더 나의 형제였다. 왜냐하면 그와 나는 정확하게 같은 시야로 함께 사건을 보았기 때문"이라 고 고백하고 있다.
머튼이 많은 저서의 출판과 세상의 온갖 사건과 문제를 직접 대면하면서 많은 시간을 이 문제의 해결에 쏟은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의 생활은 다른 수사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의 저술은 수사들의 4시 간 노동 시간에 이루어졌고, 공동 노동 작업과 공동 기도 시간에는 늘 그들과 함께하였다. 제네시 수도원 원장이
자 머튼의 제자인 요한 에우데스 아빠스는 "머튼의 일상 생활은 아주 평범하고 고요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친근 했고, 항상 행복했고,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창조적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했다" 고 회고하였다.
머튼은 관상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자 열망하였고,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채워 드리려 고 하였다. 그는 관상 생활을 "두려움 없이 자신의 침묵과 고독 속으로 들어가 언어와 설명의 영역을 뛰어넘는 빛과 능력을 찾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깊은 심층 속에서 하느님의 영과 자신의 은밀한 자아(自我)가 만나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과 내가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하였다.
〔평 가〕 머튼의 장례식 강론에서 그의 아빠스는 "세상은 그의 책을 통해 그를 알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말을 통 해서 그를 알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비밀 기도(secret prayer)를 통해서 그를 알고 있다. 아직도 그는 비 밀 기도를 간직하고 있다. 그가 쓰고 말한 자신의 내면 생활을 모든 이에게 나누어 준 것, 이것이 그의 비밀 기 도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도움을 찾는 영혼들의 비밀을 잘 읽을 줄 아는 영혼의 아버지였다"라고 하였다. 그 는 영적인 스승이며 훌륭한 작가였고 하느님을 찾는 길을 알려 준 인물이었으며, 평화주의자였고, 교회 일치를 위해 일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여러 가지 형태로 분열되어 있는 현대 세계 안에서 인간의 일치를 역설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머튼은 수도승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일반 현대인과 괴리된 삶을 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 신이 만난 하느님을 현대인에게 보다 더 정확하게 알려주려고 노력하였다. 토마스 머튼은 그 자신이 말한 것처 럼 "성인(聖人)은 그가 가는 그 길을 통해서, 그가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서, 그리고 소중한 것을 자신 안에 꼭 간직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이 세상을 향해 힘찬 설교를 하고 있다" 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 인물이었다. (→ 트 라피스트회 ; 수도 생활)
※ 참고문헌 James H. Forest, Thomas Merton, 1980/ The Letter of Thomas Merton on the Contemplative Life to the Synod of Bishops in Rome, 1967/ Michael Mott, The Seven Mountains of Thomas Merton, 1984/ Dom Flavian Burns, Abbot of Gehtsemani, in a Homily to Members of the Monastery, 1968/ JJ. Higgins, Thomas Merton on Prayer, Spencer, Mass., 1971/ J.E. Bamberger, 《Dsp》 10, pp. 1060~1065/ J. Kritzeck, 《NCE》 16, p.293. 〔吳武洙〕
머튼, 토마스 Merton, Thomas(1915~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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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토마스 머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