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시에, 데지레 조제프 Mercier, Désiré Jesph(185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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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레 조제프 메르시에 추기경.

데지레 조제프 메르시에 추기경.

벨기에의 추기경. 말린 대주교. 철학자. 영성 신학자. 교회 정책가. 교육자. 1851년 11월 21일 벨기에의 브라방 주(州) 브렌 랄뢰(Braine l'Alleud)에서 태어나 말린(Maline)의 신학교에서 고전과 철학, 신학 공부를 마친 후 1874년 4월 30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1877년에 석
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 해부터 5년 동안 말린의 신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1882년에는 교황 레오 13세가 루뱅 대학에 개설하기를 바랐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회칙 <애테르니 파트리스>(Aeterni Patris, 1879)에 공식적으로 표명된 계획을 현실화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는 중세 이후 오랫동안 가톨릭 교회의 공인 철학으로 인정되던 토마스 아퀴나스 철학의 영향력을 과학과 사회 분야들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주교들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지지를 받아 그는 곧 이 강의를 '철학 연구원' (Institut Supérieur de Philoso-phie)을 설립하여 발전시켰고 1889년에는 초대 연구원장으로 부임하였다. 1894년에는 기관지 《신스콜라학 잡지》(Revue Néoscolastique)를 창간하여 당시 철학계에서 호평을 받았는데, 이 기관지는 《루뱅 철학 잡지》(Revue Philosophique de Louvain)이란 제목으로 현재도 발행되고있다.
철학자로서의 활동 : '철학 연구원' 을 높은 수준의 교육 기관으로 만들고자 한 메르시에는 학생들을 신학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또 다양한 철학적인 영역 안에서 개인적인 작업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또한 이곳을 철학적 사고와 경험적인 과학들이 진전함에 따라 구체적인 전제들이 변모된 토마스 학파의 문제 제기와 그 해결 방법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연구 기관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메르시에는 그리스도교 철학에 대해 비난하는 경험적인 과학의 세계를 대화의 상대로 여기고 이것들을 중요시하였다.
메르시에의 방향에 대해 루뱅에서는 지나치게 독자적인 노선이라고 비난하였고, 로마에서도 이에 못지않게 로마의 네오토미즘과 아주 다른 방향이라거나 또는 연구에 너무 큰 자유를 준다는 비난들이 있어서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뻔했다. 교육성 장관인 마젤라(Mazzela)추기경 역시 이런 비난에 동조하여 교황 레오 13세에게 제재를 청하였지만, 메르시에의 저작들을 관심 있게 읽은 사톨리(Satolli) 추기경으로 교육성 장관이 바뀌면서 상황은 급변하였다. 그리고 레미우스(P. Lemius)의 도움에 힘입어 메르시에와 연구소의 사정은 결정적으로 견고해졌다.
메르시에의 철학적인 관점들은 당시의 가톨릭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에게 있어서 철학이란 순전히 이성적인 분야로서 신학과는 성질이 다를 뿐만 아니라, 또한 철학은 모든 호교론적인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하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서 철학이 란 완료된 과업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며 대학의 다른 분야들처럼 탐구 정신을 가지고 생명을 불어넣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전통과 단절하지 않으면서도 철학은 스스로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만 하며, 경험적인 과학들과의 접촉을 유지하고 또 그것들로부터 근거를 얻 어내야 하는 반면, 관찰 가능한 시대의 이치를 초월하는 해석들을 찾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에서 별개의 학문인 철학, 신학, 법학, 심리학, 물리학등 여러 분야로부터 자료를 끌어내어 통일된 지식 체계 를 구성해 내려 하였다는 점과 일치한다.
철학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메르시에가 왜 진리와 선, 궁극적인 것, 또 다른 주제들의 초월적인 성격을 다룰 때에 경험에 호소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것은 심리학에 대한 메르시에의 관점에서도 역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비롯된 '과장된 유심론' 과 '기계론' 에 맞서서 인간 실체의 단일함을 입증하기 위해 또 이 단일함의 질료 형상론적(hylomorphic인 해석을, 곧 영혼과 육신의 관계를 갈고 다듬기 위해 생물학 · 생리학 · 신경학에서 근거를 구한다. 이에 그는 1892년에 실험 심리학의 최초의 실험실들 가운데 하나를 티에리 (A. Thiéry, 1868~1955)의 지휘 아래 연구소 내에 개설하였다. 같은 생각에서 니(D. Nys)가 우주론을 물리학과 화학에 통합시키는 것을, 또 데플루와즈(S. Deploige, 1868~1927)가 윤리학을 사회 과학과 연계시키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는 그의 추론주의(illationisme) 체계를 이끌어 냈는데 진리와 선에 대한 기준은 반성에 의해서 또 그 안에서 제공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반성이 란 지성의 특질이며, 이 기준은 추상적인 사고의 영역에서 나온 확실함이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아퀴나스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감각 체험의 사실들로부터 출발한다는 것과 인간의 이성을 자연계와 순수한 정신적 존재인 신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고리로 보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여전히 그는 이 같은 사상의 내용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 그것에 의해서 이 확실함이 보장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과 관계의 원칙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것은 신스콜라 학파 내부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루뱅 대학에서 하나의 학파로 자리잡 지 못하였다. 메르시에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자신의 철학 논문들을 통해 발표하였으며 이것들은 그의 강의 원고이기도 하였다. 《심리학》(Pychologie, 1892), 《논리학》(Logique, 1894), , 《형이상학》(Méaphysique, 1894), 《기준론)(Cnitériologie, 1899)이 그것이다. 그는 1892년에 루뱅 대학 내에 신학교를 개설하였는데, 그곳에서 신학생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체제와 개별적이며 영적인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주교로서의 활동 : 1906년 2월 7일 말린의 대주교로 임명된 데 이어 1907년 4월 15일 비오 10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이 된 메르시에는, 사제의 성덕이 복음 전파를 위한 핵심적 요소라는 확신에서 곧바로 자기 교구의 사제들에 대한 신앙 교육을 강화하는 일에 전념했다. 성직 자들에 대한 강연을 늘리는 한편, 《나의 신학생들에게》 (A mes séminaristes, 1908), 《사목적 묵상》(Retraite Pastorale, 1910), 《내적인 삶》(La Vie Intérieure, 1918) 등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들은 교구 성직자의 영성 쇄신과 《예수의 벗들의 사제적 형제애》(La Fraternité Sacerdotale des Amis de Jésus, 1927)에 대한 구상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보뒤엥(Lambert Beauduin) 신부와의 긴밀한 친분으로 전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자신의 주교좌 성당에서 거행되는 전례들의 품위를 더욱 높이는 일을 각별히 중요시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민주주의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였으며 평신도들의 '가톨릭 운동' 에도 호의적인 지지를 보냈다. 1914년 12월 <조국애와 인내심>(Patriotismeet Endurance)을 발표하여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점령에 대해 항의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애국심에 대한 너무 편협한 개념으로 인해서 플랑드르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표명은 그의 경력 가운데 제일 논란이 되는 부분이 되었다.
추기경이 된 후 메르시에는 보편 교회의 문제들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19년 교황청이 '베르사이유 조약' 에서 로마 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톨릭의 입장을 고려하도록 할 때 그는 이를 위해 앞장섰으며, 특히 교회 일치에 관심을 두어 동방 교회들과의 재결합과 화해를 위해 연합 수도자 학원을 벨기에에 유치하였다. 가장 영향력을 보였던 것은 이른바 '말린 회담' (Conversatio Mech-liniensis, 1921~1925)인데, 포르탈(Portal) 신부와 할리팍스 (Halifax) 경의 주선으로 메르시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이 회담은 가톨릭 교회와 영국 교회 사이의 접근을 모색 해 보려는 것이었다. 교황 비오 11세는 이 모임이 협상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그의 발의를 인정하였고 이후 네 차례에 걸쳐 만남이 이루어졌다. 뚜렷한 결과는 없었으나 이 대화들은 가톨릭 일치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갈라진 형 제들과의 대화 가능성을 보여 주었고 또 무엇보다도 이들과의 관계에 사랑이라는 새로운 분위기를 일구어 내는데 기여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을 19세기에 부활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메르시에 추기경은 1926년 1월 23일 브뤼셀에서 사망하였다.
〔평 가〕 젊은 시절부터 아주 열심했던 그의 신심은 전쟁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깊이를 더하였고 말년의 영적인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신심은 특히 그가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얻기 위해 거대한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였던 것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전생애를 통해 그는
열린 시각으로 경험을 중요시하면서 철학에 접근하였었고, 현대의 교회 일치 운동에 선구자적인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는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자신의 사제들에게 그러하였고, 때로는 그의 열성으로 해서 자기 권력의 한계를 넘는 일도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으며, 또한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고 상냥한 친절로 깊은 신뢰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 교회 일치 운동 ; 신스콜라철학 ; 벨기에)
※ 참고문헌  Brian Tierny · Sidney Painter, Western Europe in the Middle Age, 1978(이연규 역, 《西洋中世史》, 집문당, 1993)/ R. Aubert, 《Cath》 8, pp. 1208~ 1/ A.L. Wylleman, 《NCE》, pp. 671~672/ 《ER》 9. 〔車仁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