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4월 15일 메리놀 수녀회에 의해 설립된 부산교구 유지 재단 산하의 의료 기관. 예수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이념으로 생명 사랑과 인간 존중에 바탕을 둔 진료 및 교육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부산시 중구 대청동 4가 12번지에 소재. 〔역대 원장〕 초대 허쉬백(E.J. Hirsch-boeck, 마리아 머시) 수녀(1951.3~1954. 10), 2대 안젤리카(Angelica) 수녀(1954. 10~1958), 3대 호크(M.M. Hock, 마 리아 아우구스타) 수녀(1958~1964), 4대 보닌(Bonnin, 마리아 마게트) 수녀(1964~1968. 12), 5대 박종묵(朴鍾默, 마리 루시) 수녀(1969. 1~1971.6), 6대 조천수(曹天壽, 마가리오, 1971.6~1972.3) 7대 제찬규(諸燦奎, 시메온) 신부(1972. 3~1975. 4), 8대 서공석(徐公錫, 요한) 신부( 1975. 4~1987. 2), 9대 김창대(金昌大, 엠마누엘) 신부( 1987. 2~1988. 2), 10대 윤경철(尹景哲, 바오로) 신부 ( 1988. 2~현재).
〔설립 과정과 활동] 해방 후 부산 지역을 관리하던 대구교구는 부산 지역의 중요성이 증가됨에 따라 의료 및 사회 사업을 통한 전교를 목적으로 가톨릭 병원의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능력이 부족하여 메리놀 수녀회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수녀회가 이를 수락함으로써 병원 건립이 실현될 수 있었다. 1924년 신의주(新義州)에 처음 진출함으로써 한국과 인연을 맺은 메리놀 수녀회는, 평남 영유(永柔)에 한국 지부를 설치하고 각지의 본당 사목을 돕는 한편, 교육 및 의료 사업과 사회 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1926년에는 신의주에서 시약소와 고아원을 운영하였고, 1930년에는 성모 병원을 개원하여 빈민들에게 무료 의료 봉사를 하였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메리놀회 수녀들은 이듬해 6월 본국인 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따라서 메리놀 수녀회가 대구교구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바로 북한 땅에서 이루지 못한 의료 사업과 육영 사업을 이곳에서 실현하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메리놀 수녀회에서는 1949년 12월 28일 콜(Koll, 로사 제네레파) 수녀, 세일러(Seiler, 마리아 안드레아) 수녀, 로빈슨(Robinson, 로사리마) 수녀를 부산에 첫 파견하였고, 부산시 복병동 81-8번지의 일본식 목조 건물을 매입하여 1950년 4월 15일 진료소를 개소하였다. 처음에는 지역 주민들에게 구호품과 약품을 나누어 주는 수준이었고, 얼마 뒤에는 후 생 병원 의사 이생득(요아킴)이 일주일에 두 번 진료해주러 오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 해 5월 1일 정식으로 의원 개설 허가를 받아 '메리놀 의원' 으로 명명하고 진
료 시간을 확대하였다. 비록 의사 1명에 수녀들이 간호사와 약사의 역할을 담당하였지만 무료 진료를 통해 빈민 구제 사업의 일익을 담당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박애정신을 보급하였다. 이것은 부산 경남 지역에 있어서 최초의 가톨릭 의료 활동이었으며, 지역 사회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구현시키고 가톨릭의 의료 및 사회 사업 전체를 진일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6 · 25 동란의 발발로 메리놀 수녀회가 철수함으로써 일시 의료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일본으로 피신한 메리놀 수녀들과 뉴욕에 있는 메리놀 수녀회 본원에서는 철수한 직후부터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재입국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유엔군 사령부의 승인하에 1951년 3월 19일 부산에 도착한 허쉬백 수녀와 로사 리마 수녀, 호크 수녀는 3월 27일 메리놀 의원을 '메리놀 수녀 의원' 으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의료 시혜 사업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전문 진료 과목의 구별 없이 성인 진료와 소아 진료로 나누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자선 의료 사업은 전쟁의 와중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다.
종전으로 병원을 돕던 외국 군의관들이 귀국하자 메리놀 수녀 의원의 의료 인력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구호 약품의 공급량도 점차 감소하였다. 그리고 1955년부터는 환자수가 이전의 5분의 1 정도로 줄어들자 결핵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문 진료를 계획하였다. 이미 1952년에 사설 요양소를 부산 영도에 개설했던 메리놀 수녀 의원은, 1954년에 미군사 원조처(AFAK : ArmedForces Aidto Korea)의 지원을 받아 부산 감천에 결핵 요양소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결핵 환자 진료에 나서게 되었다. 이외에도 극빈자 구호 활동 및 입양 사업, 병원 내의 나자렛 집에서 수공예 중심으로 기술 교육을 시켜 전쟁 미망인들 의 자활을 돕는 나자렛 워크숍(Nazareth Work Shop) 등을 실시하였으며, 특히 1960년 5월 1일 의원 내의 나자렛 집에서 한국 최초의 신용 협동 조합인 '성가신용조합' 이 창립되면서 한국 신협 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성장과 변모〕 개원 이래 활발한 의료 사업을 시행했던 메리놀 수녀 의원은 종전 후 시설과 전문 의료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시설 확충과 더불어 전문 의료인들을 양성하여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자 새 병원 건립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미군사 원조처의 원조로 현재의 병원 소재지 대지 5,373평을 매입하여 건평 2,122.99평, 지상 3층 규모의 종합 병원을 세우기로 하고, 1954년 7월 29일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1962년 11월 12일 새롭게 완성된 신축 건물로 이전하면서 메리놀 수녀 의원은 인적 · 물적 측면에서 서서히 체계가 잡혀 가기 시작하였고, 1963년 12월 7일에는 메리놀 수녀 병원으로 인가받았다. 이처럼 규모 면에서 점차 성장해 가던 메리놀 수녀 병원은 의료 요원의 확보를 위해 간호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고, 1964년 3월 7일 신축 병원 축성식과 함께 메리놀 병원 부속 간호 학교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이 학교는 1977년 12월 23일 운영권이 부산교구 유지 재단으로 이양되면서 '지산간호보건 전문대학' (현 지산전문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이와 함께 의료 체계도 정비되어, 새 병원으로 옮긴 다음 병리과(1951), 내과(1963. 11), 외과(1964. 3), 소아과(1964. 6) 방사선과(1965), 수술실 및 마취과(1966. 3), 산부인과 (1967. 3) 등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64년 7월에는 처음으로 20개의 병상을 열어 입원 환자를 받기 시작하였고, 1966년 8월에는 50병상으로 늘어났으며, 입원실이
가동됨에 따라 수련의를 위한 교육 병원으로 인가되어 1965년에는 인턴 과정이, 1966년에는 레지던트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규모는 점차 확대되었지만 1960년대 들어 외부 원조는 오히려 감소하여 늘어나는 재정적 규모를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그렇다고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무료 자선 병원이 유료 진료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도 용이하지 않았고 메리놀 수녀회 본래의 사업 목적에도 부합되지 않았다. 또한 재정 문제와 함께 1965년에 결성된 노동 조합도 병원에 한차례의 시련을 안겨 주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던 메리놀 수녀 병원 은 1966년 교구로의 이양을 검토한 후 이듬해 3월 부산교구로 자진 헌납되었다.
병원을 이양받은 부산교구는 그 운영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위탁하였고 이를 위해 박종묵(마리 루시), 한업덕(아우구스티노), 박순묵(필로미나), 남희숙(가타리아), 이병숙(마리 블랑쉬) 수녀가 1967년 2월 24일 파견되었다. 메리놀회 수녀들은 한국인 스스로 운영할 수 있을 때까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들과 공동으로 운영하기로 하였고, 이러한 위탁 운영 체제는 1971년 7월에 이르러 교구 운영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처럼 운영상의 변화를 겪은 메리놀 수녀 병원은 우선 재정 자립을 위해 유료 진료 체제로 전환시켰으며, 병원 업무도 1968년까지 서서히 이관되어 1969년 1월 1일부로 병원의 운영권은 완전히 부산교구로 이양되었다. 이어 같은 해 2월 23일에는 가톨릭 중앙 의료원과 자매 결연을 맺고 3월 5일부터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진이 파견되어, 정형 외과 · 이비인후과 · 피부 비뇨기과가 증설
되었으며, 11월에는 미국 세계 재활 재단(World Rehabili-tation Fund)의 지원으로 재활과가 신설되어 경남 일대의 신체 장애자들에 대한 의료 봉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발전과 현황〕 메리놀 수녀 병원은 1970년 3월 24일 각 부서 과장 회의에서 병원 개원일을 4월 15일로 정하였고, 1972년 2월 26일에는 병원 이름을 '메리놀 병원'으로 개칭하였다. 이와 함께 병원을 발전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종합 병원 및 교육 병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전문 진료 과목들을 차츰 증설하고 시설도 확장해 나갔다. 그리하여 피부과(1970. 7), 신경 내과(1971.5), 안과(1971.9) 치과(1974. 5), 신경 외과(1975.6), 신경 정신과(1977. 4), 특수 방사선과(1978. 5) 등을 차례로 신설하였고, 시설 면에서는 1973년 신관 3층 건물이 준공되어 43병상이 증설되었고, 1976년 6월에는 3층을 더 증축하여 6층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갈수록 증가하는 입원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 해마다 증축하여 1977년 3월 250병상이던 것이 1990년 6월에는 허가 병상수가 501병상으로 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의 성장을 바탕으로 메리놀 병원은 1980년대에 들어 비약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1981년 5월 종합 건강 진단 센터가 설치되었고, 1983년 1월에는 안구 은행을 개설하였으며, 그 해 4월부터 1984년 4월까지는 신관과 구관 사이에 6층 건물을 증축하면서 지하에 암 센터를 설치하였다. 특히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계획된 맹인 무료 개안 수술에도 적극 참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 3월 병리과가 임상 병리과와 해부 병리과로 분리됨으로써 21개의 진료 과목이 완비되었고, 더불어 1985년부터는 점진적으로 병원 업무를 전산화시켜 환자 에 대한 서비스 향상과 효율적인 업무 관리를 추진하였으며, 최첨단 의료 기기를 도입하여 각 과별로 환자의 특수 질병에 대한 치료에 만전을 기하였다.
이처럼 최첨단 의료 장비와 의료 기술을 도입하고 현대적 시설을 확충해 나감으로써 종합 병원의 모습을 갖추게 된 메리놀 병원은, 1996년에 개원 46주년을 맞이하였다. 거의 반세기를 지내 오는 동안 메리놀 병원은 수많은 시련을 겪기도 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탕으로 꾸준히 의료 사업을 펴온 결과, 지역 사회 주민들의 건강에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의료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종합 병원으로 성장하였다. (→ 부산교구 ; 가톨릭 병원)
※ 참고문헌 메리놀 병원 40년사 편찬위원회 편, 《메리놀 병원 40년사》, 메리놀 병원, 1991. 〔方相根〕
메리놀 병원 - 病院
〔영〕Maryknoll General Hospit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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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창기의 메리놀 병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