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트르, 조제프 마리 콩트 드 Maistre, Joseph Marie Conte de(1753~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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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치 철학자. 외교관. 저술가. 17세기의 자 연법 사상에 반대하였으며, 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고 교황 지상주의적인 가톨릭 교회를 옹호한 호교론자이다.
1753년 4월 1일 프랑스 사부아(Savoie) 지방 상베리(Chambéry)의 행정관 집안에서 태어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토리노(Torino)에서 법철학을 공부한 후 1774년에 사법관이 되었다. 젊은 시절 자유주의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메스트르는, 내면적으로는 프로메이슨과 계몽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그의 지적 호기심과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은 오직 프로메이슨만이 교회의 일치를 실현시킬 수 있고 프로메이슨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그는 당시 샹베리에 있던 영국계, 후에는스코틀랜드계 프로메이슨에 가입하였으며, 15년 동안이 비밀 결사(秘密結社)에 참여하면서 이들이 주장하는그리스도교에 대한 견해를 오랫동안 지니게 되었다. 비록 후에는 자신의 생각을 반성하고 이 결사에 참여하는것을 포기하였으나, 신지학자(神知學者)들과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발발로 사상의 변화를 일으킨 그는, 그 후 보수 전통주의자가 되었는데, 프랑스대혁명 이후 스위스, 이탈리아, 특히 러시아에서의 생활로 그의 사상은 더욱더 심화되었다. 왕정이 복귀된 후1817년에 파리로 돌아왔으며, 1821년 2월 26일 토리노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활동〕 메스트르는 상원 의장을 역임한 아버지의 경력을 이어 1787년 사부아의 상원 의원이 되었으며,
1792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혁명군이 사부아 지방을 점령하자 스위스 로잔(Lausanne)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동국인들에게 프랑스 혁명이 지속적인 이익을가져올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하여 《사부아 왕정 주의자의 편지》(Lettres d'un royaliste savoisien à ses com-patriotes)를 저술하여 1793년에 익명으로 출판하였으며 1796년에는 《프랑스에 관한 고찰》(Considérations sur la France)을 저술하였다. 이 책으로 메스트르는 프랑스의 신성한 임무와 권위의 원칙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망명 기간 동안 해결하기 힘들 정도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던 메스트르는 주(駐)러시아 사르디니아 대사로 임명되어 1803년부터 1817년까지 14년 간 상트 페테르스부르크(Saint-Petersbourg)에서 근무하였는데, 이때 그의 학문적 사고는 더욱 심화되었으며, 대표적 저서들이 이곳에서 저술되었다. 1814년에 발표한 《정치 조직 및기타 인간 제도를 낳은 기본 원칙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principe générateur des constitutions politiques et des autres institutions humaines)에서는 신성한 조직의 기원에 관한 이 론을 전개했으며, 대표적인 걸작으로 여겨지는 《교황론》 (Du Pape, 1819)에서는 교황 지상주의(ultamontanismus)에 관한 그의 사상이 담겨져 있다. 또 《하느님 심판의 유예에 관하여》(Sur les délais de lajustice Divine, 1816)에서는 플루타르크를 해석 · 발전시키고 있으며, 《교황과의 관계에서의 갈리아주의 교회》(De I'Eglise gallicane dans son rapport avec les Souverain Pontife, 1821)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메스트르 사후에 출판된 《상트 페테르스부르크의 밤》 (Les Soirées de St. Petersbourg, 1821)은 미완성 작품인데, 이책에서는 11개의 대화를 통하여 선과 악, 그리고 세상에대한 하느님의 섭리에 관한 그의 지적이고 종교적인 관심이 드러나 있으며, 《베이컨 철학의 검토》(L'Examen de la Philosophie de Bacon)는 1836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저술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보다는 오히려 얀센주의(Jansenismus)나 갈리아주의(Gallicanismus)를 비난하였으며,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던 이들보다는 루소 (J. J. Rousseau)로 대표되는 계몽주의자들의 사회 이론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사 상〕 논증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이라 할 수 있는 메스트르의 사상에 있어 기본적인 사고는 인간의 능력으로
안정된 질서를 이루기에는 인간의 의지가 무능력하다는 관념이다. 이로 인해 하느님이 당신의 섭리로 세상을 지배하신다는 관념이 메스트르의 역사 해석에 있어서 주된 주제이다. 그에 따르면 종교적 진리는 개인 안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이 역사의 발전을 통하여 끊임없이 나타내보이는 전통 속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결코 어떤 것도 생산할 수 없으며, 건설하기보다는 파괴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한다. 또한, 제도는 오직 종교적 토대 위에 놓일 때에만 지속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 국가의 정치적 제도는 전통, 관습과 국민들의 종교적 믿음을 반영해야만 하며, 그것은 역사를 통해서 완만하게 전개되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통치권은 군주 정치에서만 확실하게 실현될 수 있으며, 바로 그때 가장 합당한 정부가 된다고 믿었는데, 그의 사상은 이후 왕정 복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사고에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토크빌(A.C-H.-M.C.deTocqueville) , 프루동(P.J.J. Proudhon) , 베버(M. Weber)의 정치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사상으로 인해 메스트르는 프랑스 대혁명을 '악마적인 것' 또는 역사적 이교(離敎) 즉 인간의 죄와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철학이나 하느님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이론을 조장함으로써 프랑스 는 종교적인 영역에서 담당하도록 섭리된 영향력을 남용하였고 유럽을 퇴폐(頹廢)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뿐만 아니라 프랑스 대혁명 시기 동안의 대량 학살을 통해 자신들이 저지르지 않은 죄의 대가를 많은 사람들이지불하였는데, 이는 다른 범죄들이나 그 범죄의 장본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라는 점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메스트르는 엄청난 재앙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가 뚜렷하게 드러나며 잘못을 저지른 국가를징벌함과 동시에 모든 희생을 통해 가장 많은 수의 오류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속죄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엄청난 양의 죄악은 준엄한 심판관인 하느님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죄악에 해당되는 양만큼의 징벌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이면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원죄(原罪)라는 주제를 다시 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메스트르는 신앙이 인간 최고의 완덕과 유사한 것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한 근거를 다양한 전통 속에서 특히 역사를 몰락과 쇠퇴로 인식하였던 그리스 사상에서 찾으려 하였다. 왜냐하면 모든 영역에서 근본적인 것은 공정한것과 동일시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루소, 볼테르(Voltaire), 디드로(D. Diderot) 등에 의해 제기된 자연과종교의 개념을 공격하였으며, 당시의 사상가들과는 상반되는 두 가지 관점을 통하여 계몽주의에 반대하였다. 그중 하나가 루소의 철학 용어인 '자연 상태' (Grammairegénérale)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 말은 모든 사회 진화론의 와해를 의미한다고 하였다. 또 다른 하나는 과학은 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느님 섭리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전쟁과 질병조차도 정화(淨化)와 속죄(贖罪)의 시기에 용서된다고 주장하며 진보에 관한 근대적 개념을 비난하였다.
메스트르의 사상에서 유명한 주제 중 하나는 그가 중세 교황권의 역사적 역할에 관한 연구를 기초로 저술한 《교황론》에서 제기한 것으로, 교황의 영적인 권한과 이권한의 무류성(無謬性)이다. 그는 교황의 무류성은 하느님 계시의 논리적 결과를 숙고하는 가운데 교회에 부여된 지상권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하였다. 그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1869~1870)에서 이 신조가 확정되기 이전에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교황권의 존재는그리스도교의 존재와 결부되어 있다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른 어떤 주권보다도 더 우위에 있는 교황권은 다른 국가들 사이를 상호 조정하는 중재인으로 봉사할 수 있게 하는데, 그 이유는 교황들은 항상 유럽 문명의 수장(首長)으로서 그 발달을 촉진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교황권에 대한 공격은 유물론적 행위일뿐이며, 이러한 행위는 신앙과 국가를 파괴하는 동시에세속적 열정의 유희를 반대하는 수단들을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평 가〕 루이 드 보날드(Louis de Bonald)와 함께 메스트르는 당시의 혁명적인 이론들에 반대되는 전통주의자들의 핵심적인 대변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합리주의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신앙과 의식을 반대하였으며, 프랑스의 갈리아주의에 대해서는 절대적이며 교황 지상주의적인 원칙들을 내세웠다. 결국 그는 하느님, 교황과 군주들의 권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최고의 정치적 가치에 대한 복종을 주장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 신학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오해의 여지가 많은데, 이는 그의 철학적 사고 속에서 확실한 그리스도교적 영감을 반민주주의에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교황 지상주의 ; 전통주의)
※ 참고문헌  P. Christophe, 《Cath》 8, pp. 208~210/ R. Triomphe, Joseph de Maistre. Étude sur la vie et la doctrine d'un matérialisme mystiqque, Droz, Genève, 1968/ Y. Madouas, La critique del'écriture chez J. de M.,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1971, pp. 344~361/ P. Vallin, 《EU》 14, pp. 317~318. 〔邊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