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스트르, 조제프 암브로이즈 Maistre, Joseph Ambroise(1808~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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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과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한 메스트르 신부(탁희성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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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과 함께 에리곤호에 승선한 메스트르 신부(탁희성 작).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요셉. 한국 성은 이(李). 1808년 9월 19일 프랑스 안시(Amecy)교구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톤(Thônes) 중학교에서 공부한 후 1832년 6월 16일 사제로 서품되었다.그 후 위진(Ugine) 교구의 보좌 신부로 임명되어 약 7년동안 사목하다가, 31세 때인 1839년 6월 8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840년 1월 15일 동료 베르뇌(Berneux, 張敬一) 신부와 함께 프랑스를 출발하여 9월 21일 마카오(Macao)에도착한 메스트르 신부는, 정식 임지를 통보받기 위해 대기하던 중 임시로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의 일을 임시로 도왔다. 또한 중국 신학생들과 그곳에 유학 와 있던 조선 신학생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한편 리브와(Libois) 신부로부터 조선 선교사로 임명받고 1842년 2월 15일 김대건과 함께 세실(Cécille)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에리곤(I'Érigone)호에 승선하여마카오를 출발하였는데, 그 해 7월 오송(吳淞)에 도착하였으나 프랑스측의 원정 연기로 다른 방법을 모색하여야만 했다. 이에 그 해 10월 상해(上海)로 간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그곳에서 드라 브뤼니에르(de la Brunière,寶) 신부, 최양업 등과 합류하여 강남 대목구장 베시(Bési) 주교의 주선으로 중국 배를 타고 요동 반도의 태장하(太莊河)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입국이 불가능해 보이자 김대건과 헤어져 1844년 1월 최양업과 함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귀환하였다.
1846년 1월 말 최양업과 함께 만주 훈춘(琿春)을 통해 함경도 국경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두만강 국경 마을에서 만주 관헌들에게 체포되었으나 이틀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다시 소팔가자로 귀환하여 신학생들을 가르치던 메스트르 신부는, 1846년 12월 말 다시 입국을시도하기 위해 변문(邊門)으로 가던 중 김대건 신부의순교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조선 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의 만류로 입국을 포기하고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된 홍콩으로 가서 입국의 기회를 기다렸다. 또 1847년 7월에는 라피에르(Lapieme) 함장이 이끄는 군함을 타고 최양업 부제와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배가 난파되었다. 그곳에 남아있으려 하였지만 결국 다시 상해로 되돌아온 메스트르신부는, 1849년 초에도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白翎島)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그 해 11월 요동으로 가서 12월 3일 조선 입국을 시도했으나 최양업 신부만 입국하고 그는 실패하고 말았다. 1851년초에는 조선에서 교우들을 보내 그의 입국을 돕게 하였으나 그것 역시 실패하였다.
이와 같이 메스트르 신부는 육로(陸路) 또는 해로(海路)를 통해 여러 차례 입국을 시도하였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결국 1852년 7월, 이미 1847년 고군산도에서 난파한 프랑스 군함의 잔해를 철거한다는 구실로 예수회엘로(Helot) 신부의 도움을 받아 서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는데, 이로써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여 입국을 시도한지 10여 년 만에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입국 후 곧바로 성사 집행 및 전교 활동을 시작한 메스트르 신부는, 1853년 2월 3일 제3대 조선 대목구장 페레올(Ferréol, 高) 주교가 사망하자 임시 조선 포교지의장상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당시 조선에 파견나와 있던 선교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으므로 교회법에 따라 수석 신부로서 새로운 교구장이 부임하기까지교구를 이끌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그는 현지인 성직자양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인식하고 1855년에 충남제천(堤川)의 배론(舟論, 현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에 우리 나라 최초의 신학교를 세웠다. 이어 1856년 3월만주교구의 보좌 주교로 활동하던 베르뇌 주교가 제4대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그는 충청도 지역으로 전임되어 전교 및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온화하고 양순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언제나 교우들로부터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지만, 계속되는 성사 집행과 전교활동으로 인한 과로 때문에 쓰러져 회복하지 못한 채 50세 때인 1857년 12월 20일 충남 덕산(德山)의 황무실(현 禮山郡 古德面 好音里)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메스트르 신부의 유해는 1863년 9월 황무실에서 사망한 동료 선교사 랑드르(Landre, 洪) 신부의 묘와함께 1970년 4월 30일 구합덕 본당 경내로 이장되었다.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입국을 위해 오랫동안 고생을하다 보니, 실제로 한국에서 사목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한국 교회의 발전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성영회(聖嬰會) 창설이 특기할 만하다. 여러 지역을 순회 전교하는 가운데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고아들이 많은현실을 감안하여 그들에 대한 구제 사업에 관심을 갖고 전개한 성영회의 기아 구제 사업은 한국에서는 최초로시행된 고아 보호 운동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구체적인 사업 전개상 어려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를 위해 성영회 본부에 재정적인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선 성영회의 창립 정신에 따라 버려져 죽어 가는 어린이들에게 세례를 주어 영혼을 구제하는 한편, 고아들을 모아 독실한 여교우들로 하여금 돌보게 하였다. 또한 점차 고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교우 가정에 맡겨 양육하게 하였고, 그들이 커서 자립할 수 있도록 생업에 필요한 기술 교육과 직업 알선까지 도모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적극적인 노력에 감화되어 새로 입교하는 이들이 증가하였으며, 이 구제 사업도 계속 여러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성영회의 고아 구제 사업은 메스트르신부 사후에도 계속 전개되어 고아원으로 발전하였으나, 재정적인 어려움과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증대됨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 성영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달레 교회사》 下/《서울대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한국교회사연구소, 《성 김대건 안 드레아 신부의 서한》,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M.E.P. Nécrologe 1659~1930, Nazareth, Hongkong, 1932, pp. 251~252.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