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

監理敎

〔라〕Methodismus · 〔영〕Method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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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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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 동상.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의 종교 부흥 운동에서 발전한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 창시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대학 교수와 선교사로서 활동한 웨슬리는 1729년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와 함께 옥스포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직한 신성회(Holy Club)에서 활동했다. 경건 · 박애주의를 표방한 신성회 회원들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 감리회(Methodist : 방법주의자들)이며 이 명칭은 신성회가 해체된(1735) 뒤에도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당시 영국 국교회는 왕권에 절대적으로 의존했고 17세기 종교 분쟁과 이신론(deism)의 영향으로 교리에는 무관심했으며, 선교에 대한 열정이나 훈련, 예배에 대한 관심이 식어 가는 상황이었다. 이에 웨슬리는 신앙의 궁극 목표인 구원은 지적인 이해가 아닌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 진정한 의미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1738년 5월 1일 모라비아교도였던 페터 빌러(Peter Boler)의 영향을 받아 신도회(Society)를 창설하고 활발한 목회 활동을 시도했으나 영국 국교회의 많은 성직자들이 감리회 설교자들에게 강단을 맡기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순회 전도를 시작했다. 1739년 4월 그는 친구였던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의 초청을 받아 브리스톨시 근교에서 비참하게 살고 있던 광부들에게 야외 설교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감리교 부흥 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운동의 시작은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영국의 소외 계층민들 사이에 급속히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신앙 25개조를 채택한 1744년의 제1연회 이후 칼뱅의 예정설에 대한 의견 차이로 화이트필드와 웨슬리는 곧 결별하여 결국 웨슬리는 감리교로, 화이트필드는 칼뱅 감리교로 각기 분리 발전했다. 웨슬리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교회 설립은 생각하지 않았으나 현장 설교나 순회 설교, 평신도 설교사들의 기용, 장로 안수 등은 결국 감리교가 영국 국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웨슬리가 죽은 지 4년 후인 1795년 목사 안수를 연회에서 결정함으로써 분리가 시작되어 이때부터 영국 감리교는 독립된 교회로 급격히 성장하여 1836년에는 완전 분리가 이루어졌다. 19세기 말에는 교인수가 45만 명을 헤아릴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한편 미국으로 전파된 감리교의 경우에는 성직자가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모교회인 영국 국교회가 감리교인들에게는 성직 서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목사와 장로를 안수함으로써 영국 감리교보다 앞서 1784년에 독립 교파를 형성했다. 미국 감리교는 남북 전쟁 이후 남북 감리교로 나뉘어졌고, 이어 흑인 감리교회, 아메리카 감독 감리회, 아프리카 감리회, 시온 감독 교회, 기독교 감리회 감독 교회 등 여러 분파로 갈라졌다. 그러나 1861년에 와서는 남북 감리교회가 다시 합하여 미국 감리교회를 조직하였다. 영국 감리교 또한 웨슬리 감리회(Wesley Methodist), 원시 감리회(Primitive Methodist), 개혁 감리회(Protestant Methodist), 연합 감리회(United Methodist Free Church)로 나뉘어졌다. 그러나 감리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세계는 나의 교구' 라는 창설자 존 웨슬리의 말대로 늘 교회 일치 운동에 솔선 수범했다. 그리하여 1947년에는 감리교가 자체적으로 세계적 조직을 목표로 하는 회의를 미국에서 개최하였으며, 또 1951년 영국 옥스포드에서 열린 회합에서는 세계 감리회 협회를 창설하였다.
〔교 리〕 웨슬리의 신학과 신앙 노선을 따르는 감리교인들은 웨슬리의 표어인 '완전을 향한 체험 신앙' 을 강조하면서 말보다는 사랑의 행동을 앞세운다. 즉, 개인의 신앙 체험이 가장 중요하며, 모든 교회 활동과 사회 활동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체험적 신앙 성격이 감리교회의 신앙 형태를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구체적 특색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만인 구원론이다. 개인에 따라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는 칼뱅의 조건부 구원관을 거부하고, 하느님을 믿으면 누구나 예정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이다. 둘째, 하느님에 대한 개인적 체험 신앙이다. 이 체험 신앙은 웨슬리의 올데스게이트(Aldesgae)에서 나온 핵심적인 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온 인류의 구세주라는 추상적인 신앙이 아니라 그가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고 부활한 구세주임을 확인하고 감격하는 신앙을 강조한다. 셋째,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피조물이기는 하나 자유 의지가 있으므로 구원 문제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일방적 의사나 행동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넷째, 감리교회는 교리를 노래와 찬송으로 고백한다. 웨슬리의 동생 찰스 웨슬리는 형의 순회 전도 때, 영감에 넘치는 수많은 찬송가를 작사하고 불러서 감리교 발전에 크게 공헌한 바 있다. 다섯째, 평신도들에게 교회를 개방한다. 평신도 전도인 제도와 야외 전도순회 전도에 평신도들을 선교에 동참시켜 평신도들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동원한다. 여섯째, 신자로서의 완전을 추구한다. 웨슬리의 관심은 완전에 관한 이론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실천에 있는데 도덕적 완전이 아니고 사랑의 완전을 의미한다. 일곱째, 교육을 중요시한다. 자녀들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인격으로 훈련시킬 것을 강조한다. 여덟째, 사회적 관심을 고양시킨다. 웨슬리는 고아, 노인, 빈민, 노동자들의 영혼 구원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실생활에 대한 복지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를 위한 사회 제도의 개선을 역설하였다. 즉, 노예 제도의 폐지, 절제, 미성년자 노동 폐지, 8시간 노동제 엄수, 대금업 폐지 등 사회 개혁 운동을 일으켜 산업 혁명에 따른 영국의 각종 정치적 · 사회적 · 경제적 갈등 해소에 크게 이바지했다. 아홉째, 교회 연합 정신을 강조한다. 남북 전쟁으로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 감리교회가 웨슬리의 '세계는 나의 교구' 라는 말에 따라 점점 일치를 이루어 가고 있듯이, 20세기의 교회 운동의 하나인 교회 일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복음과 봉사를 위하여 연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감리교 선교〕 웨슬리의 파송으로 1771년 미국에 간 첫 선교사는 에즈베리(Francis Asbury)이다. 그는 1784년 연회에서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이때 미국 감리회를 감리회 감독 교회라 명명함으로써 제도상 영국 감리회로부터 독립하였다. 미국 감리교회는 풍부한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더 넓은 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었다. 북인도, 멕시코, 남미 대다수 국가들, 쿠바, 한국, 일본, 대만,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들은 미국 감리교 전통을 이어 받았다. 영국 감리교회의 선교 활동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토마스 콕(Thomas Coke)이었다. 서인도 제도를 시작으로 해서 시에라리온과 남아프리카까지 선교 활동을 벌였다. 인도에서는 1880년 이전까지 개종자가 거의 없었으나 1880년의 대중 운동으로 남부 하층 계급 사람들이 감리교 및 다른 교파에 귀의했다. 중국의 경우에는 대중 운동이 있었지만 선교사의 성과에 변동이 많았으며 1949년 마지막 선교사가 중국을 떠났다. 1815년에 시작된 오스트레일리아 감리교회는 19세기 말경에 독립했다. 유럽의 경우, 이탈리아와 포르투갈의 종파들은 영국에서 기원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 감리교에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의 감리교〕 한국 감리교의 선교의 시작은 한국 개신교의 선교의 시작이다. 즉 1884년 6월에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매클레이(R.S. Maclay) 박사가 서울에 와서 당시 개화당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을 통하여 고종 황제에게 한국에서의 미국 감리교회의 선교 개시를 요청하였고 고종은 이 요청을 윤허하였는데, 이날이 1884년 7월 3일이었다. 이 윤허는 처음에는 교육 사업과 의료 사업에 국한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감리교의 성장 역사는 대략 다음 4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섬기며 선교하던 시대(1884~1905) : 초기 한국 감리교회의 선교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또 생활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선교하던 시대였다. 매클레이 박사가 고종 황제로부터 정식으로 선교 윤허를 받은 이후부터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계획과 준비는 급진전을 이루어 드디어 1885년 4월 5일 그 해 부활절에 27세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G. Appenzeller)가 장로교의 언더우드(H.G. Underwood) 목사와 같이 제물포 땅을 밟음으로써 본격화되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에 감리교의 의료 선교사인 스크랜톤(W.B. Scranton)이 서울에 들어와서 지금의 정동(배재중고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정동 감리교 병원을 세워 의료 선교를 시작하였다. 즉 1885년 9월 10일부터 새로 세운 이 병원에서는 주로 가난한 계층의 환자들을 치료하여 주었다. 정부 병원격이었던 제중원(지금의 세브란스 병원 전신)에는 주로 정부 고관과 그 가족 친척들이 와서 치료를 받았으며, 반면 감리교 병원에는 한약을 쓸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이런 의료 선교를 통하여 감리교의 복음은 일찍부터 서민 대중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포로된 자에게 해방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병든 자에게 고침을, 고통받는 자에게 평안을"이 스크랜톤의 신조였다. 그는 1886년 7월 1일까지의 1년 동안 혼자서 무려 2,000명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따라서 당시의 한국인들은 서양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의사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한편 감리교 병원보다 한달 앞서서 감리교 교육 선교사로 왔던 아펜젤러가 1885년 8월 3일에 정동의 지금 자리에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 근대 교육을 창시하였다. 그때까지의 교육은 주로 서당을 중심으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강독과 암기에 불과했으나 이때부터 본격적인 인문 과학 교육이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또 이 교육을 잘 운영하여 나아갔다. 구한말 정부도 근대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배재학당보다 1년 늦게 세우나 결국 8년 만에 문을 닫고 그 학생 200명을 배재학당에 맡겨 위탁 교육을 시킬 정도로 배재학당은 구한말의 근대 교육을 이끌어 나갔으며, 또한 많은 유능한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냈던 것이다. 특히 배재학당 내의 '협성회' (協成會)라는 최초의 학생 단체는 1896년에 조직된 독립 협회의 전위대가 될 정도로 이 학교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과 개화에 앞장섰다. 또한 스크랜톤 선교사의 모친인 스크랜톤 부인(Mrs. Mary F. Scranton)은 1886년 5월 31일에 한 명의 여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오늘의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창립하였다. 이 이화학당은 초기 한국 여성 운동의 요람지요 여권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감리교의 교육 목적은 교회 중심적인 교인 양성에 있기보다는 민족 계몽 교육에 치중하였다. 즉 학생들을 신자로 만드는 일보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고양된 참된 한국인을 만드는 데 두고 그런 목적을 달성하도록 교육시켰다. 이것이 감리교가 한국의 근세사에 공헌한 점이다. 이렇게 감리교는 이땅에 교회를 세우기 전에 먼저 민족의 과제였던 근대 교육과 의료 사업을 베풀면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고, 민중 속에 깊숙이 그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1895년에는 윤치호(尹致昊)의 노력으로 미국 남감리 교회의 선교가 북감리교회보다 10년 늦게 시작되었다. 이 교회는 주로 서울과 개성, 강원도 지역에서 교육 및 의료 선교를 펼쳤다. 서울의 배화여고, 개성의 한영서원(뒷날의 송도고보)과 호수돈여고 등이 남감리교가 세운 교육 기관이다. 이 두 남북 감리교회는 1930년에 기구적으로 한국에서 통합하여 하나의 자치하는 민족 교회인 조선 감리교회로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1년에는 한국 기독교회사에서 기념할 만한 일이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 최초의 목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 해 감리교의 선교 연회에서 1889년부터 연회에서 정식으로 전도사 임명을 받고 그 후 12년 간 목사 후보 훈련을 받은 김창식(金昌植), 김기범(金箕範) 두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인 목사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후로 감리교회는 그 교세가 급증하여 1901년부터는 전국을 세 지방으로 분할 관장하였고, 1904년에는 조선 선교 연회(Korea Mission Conference)가 조직되고, 1908년에는 조선 연회(Korea Conference)가 조직되어 중국 연회와 완전히 분리, 독립되었다. 이 시기의 감리교회는 이 민족을 직접 교육과 의료 사업으로 섬기며 선교하여 기초를 내린 기간이다.
애국하며 선교하던 시대(1905~1920) :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감리교회는 그 교세가 증가되고 그 기구와 활동 분야가 확대되고 교회 조직과 선교 기관도 전국적으로 확산됨으로써 교회의 민족에 대한 영향력이 커져 갔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이 조직한 독립 협회가 1898년에 해산되면서 독립 협회의 간부들과 그 중요 회원들이 대거 기독교에 들어옴에 따라 이때부터는 중요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민족 운동의 중심이 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서울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감리교회가 대표적이다.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이 교회의 담임 목사인 전덕기(全德基)를 중심으로 세칭 상동파(尙洞派)가 조직되고 김구(金九), 이준(李儁), 최재학 등이 상동 교회에서 구국 기도회 및 을사조약 무효화 투쟁을 전개하여 하느님 사랑과 민족 사랑을 역설하였다. 이 투쟁 이후로 상동 교회에는 이회영(李會榮), 김구(金九), 이동녕(李東寧), 이준(李儁), 이갑(李甲), 안창호(安昌浩), 이승훈(李承薰), 최광옥(崔光玉), 양기탁(梁起鐸), 이필주(李弼柱) , 최성모(崔聖模) , 이동휘(李東輝), 김진호(金鎭浩) 등의 민족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들어 독립 운동을 조직하였고, 1907년에는 상동 교회에서 신민회(新民會)가 조직되어 민족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1907년에는 이준, 이상설(李相高), 전덕기(全德基) 등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상동 교회 지하실에서 계획하고 집행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상동 교회는 어두운 시대를 비추었던 민족 운동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상동 교회 내의 상동 청년 학원에서의 주시경(周時經), 최남선(崔南善), 장도빈(張道斌) 등의 한글 운동, 국학 운동은 특히 유명하다.
이런 감리교회의 민족 운동 전통이 1919년에 이르러 3 · 1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33인 민족 대표 중 16명의 기독교측 대표 가운데 9명, 이필주, 오화영(吳華英), 김창준(金昌俊) , 박희도(朴熙道) 최성모,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정춘수(鄭春洙)의 참여는 이런 감리교 민족 운동의 흐름에서 보아야 한다. 3 · 1 운동으로 일제의 감리교에 대한 핍박은 더욱 가혹하였고 수원 지방 제암리 감리교회의 대학살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시기는 이렇게 감리교회가 민족의 고난에 동참하며 잃어버린 민족의 주권 회복에 힘씀으로써 일반 민중의 지지를 크게 받았고, 또 많은 유능한 청년들이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교회는 크게 부흥되어 갔다. 이 시기는 민족 독립 운동과 선교가 동일시되던 시기였다.
고난의 시대(1920~1960) : 이 시기는 일제 말기의 교회 탄압과 8 · 15 광복, 그리고 6 · 25 동란이라는 민족의 일대 시련과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특히 일제 말기의 일제의 음흉한 교회 탄압과 신앙 변질에 교회 지도자들이 부합되어 일본의 어용 단체가 되는 수모도 당하게 되고 일본의 태평양 전쟁 패망으로 민족의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감리교회도 일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 교권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그들의 친일적 행동에 대한 회개도 없이 광복 후에도 계속 그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자 일제 하에서 핍박을 받고 있던 재야 인사들이 일어나서 교회 지도부에 대결하게 됨으로써 처음으로 감리교회의 분열을 체험하게 된다. 세칭 재건파와 부흥파의 분열이었다. 그러나 이 분열도 평신도들의 화해 노력에 의하여 4년 만에 해결되어 6 · 25 동란 1년 전에 극적인 통합을 하게 되어 새로운 면모로 선교에 임하게 되었으나 1950년 민족 상잔의 비극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동란은 감리교회에 엄청난 비극과 상처를 안겨 주었다. 우선 감리교의 최고 지도자였던 김유순(金裕淳) 감독과 전 감독 양주삼(梁柱三) 박사가 납북되어 갔고, 기타 많은 목사와 유능한 평신도들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 지도부에 다시 공백기가 생기게 되고 피난 중에 있던 교회 지도자들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임시 총회가 소집되어 새감독으로 유형기 목사가 선출되면서 교회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1953년에 휴전이 성립되고 서울에 정부와 교단 본부가 다시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교회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는 파괴된 교회의 복구와 상실한 목사와 교회 지도자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고 사회 참여에 많은 관심을 보이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1955~1958년의 호헌파 분열이 있었으나 곧 수습되었다.
하나 되어 선교하는 시대(1960~1984) : 4 · 19는 감리 교회에도 혁신의 바람을 일으켰고 특히 젊은 교회 지도부에 교회 혁신의 바람을 몰고 왔으며, 그 동안 교회 재건에 열중하던 교회 지도부로 하여금 교회 영향력과 그 저력을 사회 구원에 돌리도록 요구하였다. 1974년 총회에서는 앞으로 10년 후에 맞이할 감리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야심적인 5,000교회, 100만 신도 운동을 전개하여 양적인 성장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교회 일각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양적 성장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감리교회가 구한 말과 일제 하에서의 민족의 과제를 선교의 과제로 삼아 민족과 아픔을 함께했던 감리교회의 전통을 저버리고 교회의 건축과 교세의 확장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한국 민족을 위한 감리교회가 되기를 포기하는 일이라는 비판의 소리였다. 1978년 10월의 제13차 총회에서는 실질적인 다원 감독제(多元監督制)를 채택하고 교권의 중앙 집권을 연회로 분산시켜 연회 중심의 선교 체제를 갖추었고, 1980년 총회에서는 연회의 조직을 현재의 국가 행정 구역에 따라서 개편하였다. 현재의 한국 감리교회의 조직과 그 직책은, 총회(감독 회장) → 연회(감독) →지방회(감리사) →구역회(당회장) →당회(당회장)로 구성되어 있다.
총회는 4년에 한 번(현재는 법 개정으로 2년에 한 번) 모여 교회법 개정과 입법 및 선교 정책을 입안 통과시키는 최고 의결 기관이며 동시에 감독을 선거하여 교회 행정을 담당하게 한다. 총회 밑에 5개 연회(서울, 중부, 동부, 남부, 삼남)가 있어 해마다 모여서 연회 산하의 구체적인 선교 정책을 결정하고 목사 안수권을 감독에게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연회가 실질적인 감리교회의 핵심 의회이며 강력한 추진력을 보유하고 있다. 1982년 현재 5개 연회 밑에 93개 지방이 있는데 평균 한 지방에 30여 개의 교회가 소속되어 있다. 지방 밑에 당회가 있는데 당회는 개체 교회(자립할 수 있는 교회) 또는 미자립 교회 몇이 합하여 조직되고 감리교 기본 의회가 되는 당회는 개체 교회 중심으로 세례 교인으로 조직된 의회이며 여기에서 구역회 대표를 선출하고 구역회에서 지방회 대표, 지방회에서 연회 대표, 연회에서 총회 대표를 선출하는 민주주의 의회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감리교회는 1984년으로 선교 1세기를 맞아 북한 선교와 동양 선교를 위한 도약적인 태세 확립과 선교 방법 개발에 힘쓰는 한편, 교권 싸움을 지양하여 현대 실정에 맞는 선교 신학을 확립하는 방향을 택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민주화 작업은 우리의 전민족 과제이므로 이런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위하여 먼저 감리교회 안에서 민주화와 의식화의 훈련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산업화 과정에서 권력과 부에서 소외되는 다수의 민중편에 서서 그들의 고난과 소외에 동참하면서 그들의 복지와 영혼 구원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셋째, 교회 선교를 지양하고 하느님 선교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 즉, 감리교회는 세상을 섬기는 종이므로 교회의 프로그램과 교회 건물까지도 지역 주민을 위한 봉사와 그 봉사 기관으로 개방하여야 한다. 넷째, 평신도들을 잘 훈련시켜 삶의 현장에서 그들로 하여금 능력 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성속(聖俗)의 이원론을 버려야 한다. 다섯째, 교회의 질적 향상이 교회의 물량적 발전에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교역자들의 신앙적 훈련과 신학적 연수가 있어야 하며 동시에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통한 갱신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감리교회의 당면 과제로 삼고 있다. 기독교 대한 감리회 교인수는 1993년 현재 1,117,986명이고 교회수는 3,959개이다(1993년 문화체육부 통계). (⇦ 한국 감리교 ; → 아펜젤러 ; 웨슬리)
※ 참고문헌  Annual Report of Board ofForeign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4~ 1930/ Official Joumal of the Korea Mission,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4~1930/ Annual Report of Missions,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896~ 1930/ Annual Report of the Women'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1930/ Annual Report of the Women's Council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 1897~1930/ W.M.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1912/ A.W. Wasson, Church Growth in Korea, 1934/ 양주삼, <조선 남감리교회 삼십년 기념보>, 1929/ 기독교 대한 감리회 총리원 교육국, 《대한 감리교회사》 I · Ⅱ , 1975~1980/ 송길섭,《일제하 감리교회 3대 성좌》, 1982/ 一,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 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宋吉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