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카

〔영〕Me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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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슈바' 라는 검은 천으로 감싼 카아바 신전.

'키슈바' 라는 검은 천으로 감싼 카아바 신전.


이슬람 최대의 성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관문인 제다(Jeddah)로부터 남동쪽으로 73km, 또 예언자 무함마 드의 묘소가 있는 메디나(Medina)로부터는 남쪽으로 447km 떨어진 북위 21도 30분, 동경 40도 20분에 위치 하고 있다. 상주 인구는 55만 명 미만이나 성지 순례 기 간 중에는 200만 명 이상을 수용하게 되어 숙박 · 요식 · 안내 · 운송 · 기념품 판매업 등 일종의 '성지 순례 서 비스 산업' 이 발달하였다. 평소에는 세계 각지에서 많은 무슬림 학생과 학자들이 찾아와 이곳의 학교 · 연구소· 도서관 등을 이용하고 있다. 코란 속에서 '도시 중의 도 시' , '평화의 도시' 혹은 '금지된 사원' 등으로 일컬어지 는 메카는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도시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탄생하였고, 또 무슬림 공 동체 즉 움마(Ummah) 역시 여기에서 생겨났다는 사실 외에도, 무슬림이 매일 다섯 번씩 올리는 '예배의 방향' (Qibla)이자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모든 무슬림이 일생에 꼭 한 번은 순례하도록 되어 있는 의례 장소 중에서도 가 장 중요한 '카아바' (Ka'ba) 신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기도 하다. 지형적으로 볼 때, 메카는 메디나와 함께 홍 해안과 아라비아 반도의 내륙 산악 고원 지대 사이에 형 성된 '히자즈' (H. jaaz)라고 일컫는 사막 분지에 위치하 고 있다. 〔역 사〕 도시의 형성과 발전 : 메디나가 기원전 13세 기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화산 활동의 덕택으로 비교적 지하수가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한 데 반하여 메카의 기 후 풍토는 매우 열악하다. 무함마드 당시의 기록에 의하 면 사막 지방 특유의 더위와 만성적인 가뭄, 동쪽에서 불 어 닥치는 건조하고 강한 바람, 극히 불규칙적인 비, 그 나마 땅이 황폐하여 한번 폭우가 내리면 도시의 저지대 는 황톳물로 범람하고, 홍수가 제대로 강을 형성하지도 못한 채 땅속으로 스며들면 곳곳에서 썩어 가는 동물의 시체와 오물로 인하여 악취가 진동하고, 또 각종 전염병 이 나돌곤 하였다고 한다. 주위의 문명 세계와 비교할 때 야만적인 수준에 지나 지 않았지만, 이곳에 무함마드가 속했던 아랍의 한 부족 인 '쿠레이쉬' (Quraysh, 상인)가 어느 정도 안정된 부족 국가를 형성한 것은 5세기경이었다. 쿠레이쉬를 포함하 여 당시 아랍 부족의 가치관은 극히 현세적이었고 사회 적인 의식은 씨족 · 부족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자 신이 속한 혈연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피의 복수 가 영웅적인 행위로 찬미되었고, 약탈전이 다반사였으 며, 전투에서 패한 부족의 아녀자들은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하는가 하면, 심지어 여자 아이는 출생 즉시 생매장 을 시켜 버리는 풍습을 가진 부족도 있었다. 아라비아 반 도에 이슬람교가 출현하기 전인 이때를 가리켜 무슬림 역사학자들은 '자힐리아' (Jahiliyah, 무지의 시대)라고 한 다. 이러한 지리적 · 사회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7세기 초에 와서 메카는 국제적인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주변의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 당시 동 로마 제국과 사라센 제국 간의 잦은 무력 충돌로 인하여 페르시아만과 유프라테스강 그리고 시리아를 경유하던 기존의 무역로가 위험해지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서안을 따라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예멘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연결하는 새로운 대상로(隊商路)가 각광을 받게 되었는 데, 메카는 이 대상로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메카 의 주민들은 여름과 겨울에 각각 한차례씩 대상(caravan) 을 조직하여, 겨울에는 예멘으로 여름에는 시리아로 보 냈다. 그들의 상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이어서 신용 거래 제도나 투자 제도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고, 변화하는 시 장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또한 대상을 수행 하며 상인들의 안전을 지키고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대 신 수익에 따라 일정한 수고비를 지급받는 전문적인 용 역 조직도 발달되어 있었다. 위험을 무릅쓴 오랜 여행을 끝내고 교역 물품인 금, 은, 향료, 양념, 직물, 무기, 술 등을 싣고 대상이 돌아오면 도시는 축제와 향락의 분위 기로 들떴다고 한다.
메카가 인근의 다른 도시를 제치고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쿠레이쉬족의 상술에 힘입은 바가 컸겠지만, 메카의 번영을 도운 또 다른 요인은 이곳 에 있는 '카아바' 신전 때문이다. 신전이 어떻게 이곳에 자리잡게 되었는지를 밝혀 주는 역사적인 자료는 없으 나, 언제부터인가 신전은 여러 아랍 부족의 신상으로 가 득 차 있었다. 피를 흘리는 것이 금기시되는 '신성한 달' 이 되면 사람들은 별 위험 없이 여행을 할 수가 있었으므 로, 이 기간 중에 메카는 상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부족의 신상(神像)에 참배하기 위하여 카아바 신전을 찾 아온 순례자들로 붐볐다. 이러한 메카의 번영을 탐낸 예 멘 주재 에티오피아 총독 아브라(Abrah)는 570년 코끼 리 한 마리를 앞세우고 메카로 쳐들어왔다. 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실이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남게 된 이유는, 바로 이 '코끼리의 해' 에 예언자 무함마드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무함마드의 등장 : 그로부터 40년 후 메카 근처의 히 라(H. iraa') 산에 있는 한 동굴에서 유일신 알라(Allah)로 부터 예언자로서 선택을 받은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펼 칠 때, 쿠레이쉬 부족의 원로들이 무엇보다도 두려워한 것은 이러한 메카의 경제적 · 정치적 기반이 그로 말미암 아 흔들리는 것이었다. 무함마드에 대한 원로들의 탄압 그리고 이에 굴하지 않는 무함마드를 결국 제거하기로 한 원로들의 결정은, 메카의 기존 질서와 새로운 종교가 추구하는 질서와의 갈등이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잘 말 해 주고 있다. 신변의 위협을 피해 무함마드가 자신을 초대한 메디나 로 이주를 한 622년- 이를 히즈라(Hijra)라고 하는데 이 슬람력 원년이다-이후 두 도시 국가 사이에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630년 메카는 무함마 드가 이끄는 무슬림군에 의해 정복되어 주민 몇 명을 제 외하고는 모두 무슬림이 되었으며, 카아바에 '모셔져' 있던 아랍 부족의 신상들은 파괴되었다. 만신전(萬神殿) 으로 쓰이던 카아바는 이날 유일신전으로 바뀌었는데 그 동안 만신전을 지키던 힘이 일순간에 유일신전을 지 키는 힘으로 전환이 된 셈이었다. 무함마드가 마지막으 로 메카를 찾은 것은 그가 사망하기 약 3개월 전인 632 년으로서 '고별의 순례' 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가 9만 명 내지는 14만 명이라고 전해지는 많은 무슬림을 이끌고 10일 간에 걸쳐 한 순례는 이슬람 '성지 순례' (H. aij, 하지 혹은 핫즈)의 원형이 되어 1,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재현되고 있다.
무함마드 사후~현대 : 무함마드가 죽은 후 656년, 신 생 이슬람 공동체는 제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 ibn 'Affaan)의 암살을 계기로 일련의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이로 인하여 예언자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제4대 칼리프 알리('Alii ibn Abii T. aalib)는 메디나를 떠나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쿠파로 수도를 옮겼으나, 그도 그곳의 한 모스크에서 카와리즈(Khawaarij)라고 불리는 무슬림 과 격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어 이슬람 세계의 통치권은 우마위야(Umayyah) 왕조로 넘어가고 '정통 칼리프 시 대' 는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정치적 중심지는 그 이후 무슬림 지도 세력간의 패권 다툼의 행방을 따라 다마스커스(660~750, 우마위야 칼리프 시대), 바그다드(750~1258, 압바시아 칼리프 시대), 카이로(1250~1517, 맘루크 칼리프 시대) 그리고 이스 탄불(14세기~1923, 오스만 터키 제국) 등지로 옮겨졌다. 그 나마 상징적이던 칼리프 제도가 1928년 신생 터키 공화 국의 국민 의회에 의해서 폐지되면서 이슬람 세계는 마 지막 세계 제국인 오스만 터키의 분열과 때를 같이하여 그 정치적 구심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러나 메카는 무슬림 공동체 '움마' 의 보호자이며 예언자의 후계자임 을 자처하였던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에도 불구하고 오늘 날까지도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중심지로서 그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우마위야와 압바시아 칼리프 시대에 메 카는 칼리프가 임명한 총독에 의하여 통치되었으며, 그 들은 메카와 메디나를 비롯한 인근의 유적지를 성역화하 고 그곳의 무슬림들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때 국제 교역의 중심지였던 메 카는 메디나와 더불어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 학문적 중 심지로 발전하였는데, 이슬람력의 마지막 달인 12월 초 에 행해지는 성지 순례 기간 중에 밀물처럼 찾아왔다 돌 아가는 순례객들 외에도 세계 각지에서 학자들이 무함마 드의 언행을 기록한 순나(Sunna)와 이슬람의 신학 · 율법 등을 연구하기 위해 찾아왔다. 또 이슬람의 전성기 때는 학자 외에도 각별히 종교적인 무슬림, 혼탁한 정치 무대 를 떠나 만년의 안식을 구하려는 정객, 전투 배당금이나 대상 활동 등을 통하여 축적한 물질적 부를 조용히 향유 하려는 아랍 귀족 등이 메카에 정착을 하였으며, 또 그들 의 주변에 몰려드는 음유 시인 · 어릿광대 · 악사 · 가수 등의 직업적 연예인과 상인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이슬람교가 출범한 이래 메카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 역은 성역(H. aram, 하람)화되어 비무슬림의 출입이 금지 되었다. 그 후 메카는 비무슬림 세력으로부터는 완전히 보호될 수 있었지만 이슬람 내부의 변란으로부터는 그렇 지 못하였다. 가장 큰 '사고' 는 930년에 '카라미타' (Qa- raamit. ah)라고 불리는 무슬림 반도(叛徒)들에 의하여 저 질러졌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성지를 유린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카아바 신전의 '검은 돌 마저도 약탈하 여 갔다. 이 돌이 다시 메카로 돌아온 것은 일설에 의하 면 6년 후, 다른 설에 의하면 21년 혹은 22년 이후였다 고 한다.
960년, 이맘 알리의 후손 가운데 한 가문이 바그다드 중앙 권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해 메카를 중심으로 한 인 근 지역의 정치적 자치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들은 부침(浮沈)하는 주변의 정치 · 군사적 역학 관계를 균형 있게 이용, 금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메카를 실질적 으로 통치하였다. 몽고 침입 이후 이슬람 세계의 자존심 과 영광을 지켜 주던 오스만 터키 제국이 와해되기 직전 인 1916년에 메카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이븐 알리(Hu- sain I. ibn Ali)는 히자르 지역의 정치적 독립을 선언하고 '히자즈의 왕' 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불과 년 후 메카는 이븐 사우드(Wahhaabi 'Abd al- 'Aziz ibn 'uud)가 이끄는 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고, 그 인 1925년 메카를 포함한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은 야드(Riyadh)에 수도를 둔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로 그 주인이 바뀌었다.
〔성 소〕 성지 순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례는 카아 바 신전을 시계 바늘 반대 방향으로 일곱 번 도는 '타와 프 (Tawaaf)로서 순례의 시작과 중간 그리고 그 끝을 장 식한다. 카아바 신전은 화산암으로 쌓아 올린 길이 13m, 폭 12m 그리고 높이 15m의 직육면체(直六面體) 석조 건물로서 사람의 키 높이에 목조 출입문이 하나 설치되 어 있고,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오늘날 '키슈바' (Kiswah) 라고 부르는 화려하게 수놓은 천으로 감싼 이 단조로운 건물은 '알 하람 모스크' (al-Masjid al-H. araam) 중앙에 자 리잡고 있지만, 무함마드 당시에는 넓은 빈터뿐이었다. 이슬람교의 전승에 의하면 현재 카아바가 위치하고 있 는 자리에는 천국에서 지상으로 쫓겨온 아담이 하느님께 예배를 올리던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 라 잊혀진 이곳에 다시 신전을 세운 사람은 다름아닌 아 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부인 사라와 그녀의 몸종이었던 하갈 사이의 반목을 피 하여 하갈과 그녀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을 데리고 온 곳 이 바카(Bakkah, 메카의 옛 지명)였다고 한다. 약간의 양식 과 식수를 남겨 두고 아브라함이 떠난 뒤 모자는 인근에 서 물을 구하지 못해 위기에 처하였는데, 혹시 지나가는 대상의 행렬을 찾아 구원을 청할 수 있을까 하여 하갈은 오늘날 앗 사파(as-Safa) , 알 마르바(al-Mawa)라고 각각 불리는 바위 언덕을 일곱 번씩이나 뛰어 올라갔다. 일곱 번째로 '알 마르바' 에 오른 그녀는 갈증으로 인하여 빈 사 상태로 누워 있는 그녀의 아들 옆에 천사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샘물을 솟 구치게 한 뒤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두려워하지 말 라, 이 아이와 그의 아버지가 짓게 될 '하느님의 집' 이 멀지 않느니라.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들을 버려 두지 않느니라." 오늘날 순례자들이 400m 정도에 이르는 이 두 언덕 사이를 바쁜 걸음으로 일곱 번 왕복하는 의례 (S'ay)를 행하는 것은 당시 하갈의 시련과 하느님의 은총 을 기리고자 함이다. 또 순례자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은 총의 물을 공급하는 잠잠(Zamzam) 우물은 당시 천사가 솟구치게 하였던 바로 그 샘이라고 한다. 훗날 아브라함 은 다시 그들을 찾아와 장성한 이스마엘과 함께 천사가 예언한 대로 아담의 신전 자리에 새로운 신전을 세웠는 데, 이것이 바로 '카아바' 이다.
이 신전의 동쪽 모서리 1.5m 높이에 안치된 '흐자르 알 아스와드' (H. jar al-Aswad)라고 불리는 흑석(黑石)은 일설에 의하면 원래 아담의 신전에 있던 것으로, 홍수를 피해 메카 동쪽에 있는 쿠바이 산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천사 가브리엘이 아브라함에게 날라다 준 것이라 한다. 직경이 18cm인 이 타원형 돌은 현재 은으로 만든 틀에 싸여 보호되고 있다. 앞서 말한 타와프 즉 카아바 신전을 축으로 한 선회는 바로 이 돌이 있는 지점에서 시작하여 그 지점에서 끝내야 한다. 이 '신성의 흑석' 과 관련된 미 신적인 경향을 우려한 제2대 칼리프 오마르('0mar ibn al- Hatt.aab)는 "나는 네가 선도 악도 행할 수 없는 돌에 불 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예언자께서 너에게 입맞추는 것 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너에게 입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카아바 신전을 에워싸고 있는 대(大)모스크는 775~ 785년에 처음 건립된 이래 계속 증 · 개축되었고, 1957 년 증축 때 '앗 사파' 와 '알 마르바' 언덕이 모스크 건물 과 연결되었다. 높이 85m의 첨탑 일곱 개가 있는 현재의 모스크는, 50만 명 이상의 인원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 는 규모이다. 모스크 경내에는 카아바 신전과 잠잠 우물 외에도, 아브라함이 카아바 신전을 쌓아 올릴 때 남겼다는 발자국을 보존한 '마카암 이브라힘' (Maqaam Ibrahim) 하갈과 이스마엘이 묻힌 지점이라는 '알 히즈르 (al-H. ijr) 가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신화가 그러하듯, 메카 성소를 둘러싼 이야 기들도 굳이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거나 또는 고고 학적인 검증을 필요로 하는 대상은 아니다. 그러나 먼 길 을 달려온 무슬림 순례자가 황량한 사막 도시에 우뚝 솟 은 장엄한 대모스크의 문을 들어서며 꿈에 그리던 카아 바 신전을 마주 대하는 순간, 그를 엄습하는 환희와 전율 을 조금이라도 공감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들 신화적인 사실이 내포하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 대한 이해가 필요 하다. 종교적 세계에 있어서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환희와 전율' 은 과장될 필요도 없고 또 과소 평 가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실로 진정한 순례자들의 내면 세계에 솟구치는 이러한 정신적인 희열과 그 창조적인 열정의 분출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화적 유산은 그만큼 초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 이슬람 세계를 통솔하는 정치적 구심점 이 사라지고 그 대신 민족 국가적인 성격을 띤 수십 개의 '이슬람 국가 가 연립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메카는 종교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 도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매년 전세계의 구석구석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객들은 이곳에서 국경과 인종 그리 고 언어를 초월하여 무슬림 공동체 내에 연연히 흐르고 있는 우의와 형제애를 재확인하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는 이슬람 세계의 분열을 촉진하는 '이슬람 국가 간의 이념적인 대립과 더불어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극심한 사회적 · 경제적 격차를 체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 각지에 떨어져 살던 무슬림들은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학문적 · 종교적 · 정치적 사조를 배워서 고향으로 돌아 갔다. 위정자는 위정자대로 또 혁명 세력은 혁명 세력대 로 그들의 이념을 펼치는 데 이 연중 행사를 이용하였는 데, 사우디 가문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와하비' (Wah- haabi) 운동이 그 좋은 예이다. 19세기 초 그들은 자신의 청교도적 신조 를 펼치는 데 있어서 성지 순례 기간 중 에 펼쳐지는 '토론' (forum)을 십분 활용함으로써 집권 알리 가문을 이슬람의 요람에서 성공적으로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87년에 이란의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 (A. Khumainii)의 추종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여타 '이슬람 국가' 의 종교적 · 정치적 상황을 비난하면 서 순례 기간 중 메카에서 벌인 유혈 시위도 이와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 근본주의, 이슬람 교의 ; 무함마드 ; 이슬람교)
※ 참고문헌  Hamza Kaidi (unter Mitarbeit von Nadjm Odu-Dine Bammate und El Hachemi Tidjani), Mekka und Medina in Farbe, Paris, les éditionsj. a., 1982/ 한국 이슬람교 중앙 연합회 기획, 서정길 편저, 《마호멧 전기》, 열화당, 1983/ Richard C. Martin, Pilgrimage : Muslim Pilgrimage, 《ER》 11, pp. 338~346/R Frank, 《NCE》 9, p. 532. 〔金永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