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리장, 피에르 Mélizan, Pierre (1877 ~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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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멜리장 신부.

피에르 멜리장 신부.

파리 외방전교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베드로. 한국명은 매리상(梅履霜) . 1877년 8월 4일 프 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고, 1902년 4월 2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 교사로 임명되었다.같은 해 6월 2일 한국에 도착한 후 한국어와 풍속을 익히던 멜리장 신부는, 그 해 8월 말 동료선교사인 기낭(Guinand, 陳普安) 신부와 함께 약 한 달동안 전라도 군창(群倉, 현 군산)을 거쳐 충청도 내포(內浦) 지방을 여행하였다.
1902년 10월 말 황해도 지방에 파견된 멜리장 신부는 은율(殷栗) 본당 2대 주임으로 사목하면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의 천주교 비판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1904년 10월에는 일본군이 그의 사목 관할 지역인 매골공소의 전교 회장 김 토마스를 장연(長淵)으로 연행해 가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에 대해 정식으로 항의하였다. 일본군들이 멜리장 신부와 그의 복사를 폭행한 후 복사를 진남포(鎮南浦) 감옥에 수감시키자 복사를 석방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이에 복사는 그 해 12월 21일에 석방되었다.
1905년 8월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에 이어 재령(載寧) 본당 2대 주임으로 전임되어 부임 직후부터 성당건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절〔寺〕로 사용했던 집을 매입하여 내부를 성당으로 개조한 데 이어, 1913년에는 전종영(全宗泳, 토마스)이 기증한 임천리(林泉里) 야산을 교회 공동 묘지로 사용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발발하여 매화동(玫花洞) 본당의 샤보(Chabot, 車麗松) 신부가 본국으로 소환되자, 1914년부터 1919년까지 매화동 본당의 사목도 함께 관장하였다. 멜리장 신부는 1921년 5월 순교자 시복 수속 조사 비서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전임될 때까지 약 16년 동안, 재령 본당에서 사목하면서 본당 발전 및 교세 신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황해도 지방은 그를 포함한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사목 활동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측의 교세 신장에 비해, 천주교측의 교세는 오히려 퇴조하였다. 프로테스탄트의 교세가 급격히 신장된 이유 중의 하나가 신식 학교의 설립 및 운영이라는 점에 주목한 그는, 교육 사업을 통한 전교 방법을 모색하였다. 1908년 은파 공소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개설한 데 이어 1909년 초에는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야학을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8월부터는 초등학교 과정의 수업을 실시하여 모성학교(慕聖學校)라는 교명으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차 재정이 빈약해지고 공립 학교로 전 · 입학하려는 학생이 늘어나고 학부형들의 무관심과 무능력으로 결국 개교 10년 만인 1918년에 자진 폐교하였다. 그 후 멜리장 신부는 학교 건물에 양잠시설을 설치하여 남은 학생 몇몇에게 그 기술을 가르쳤다. 그 밖에 멜리장 신부가 사목하는 동안 일본인들의 나무리벌 갈대밭 사건, 성당 경내 무단 침입 사건 등 천주교와 일본인들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빈번하였는데, 주로 천주교측이 피해를 입었다.
1921년 충청도 서산(瑞山)의 상홍리(上紅里, 현 동문)본당 3대 주임으로 임명된 그는, 부임 초부터 청년층의참여를 높이고 그들이 직접 전교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교리 강습회 및 강연회를 자주 개최하였으며, 서산의미럭벌, 안면도, 소길리 등 여러 공소를 맡아 성사 집행 및 전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에는 태안군(泰安郡) 남산리(南山里) 공소와 이원면(梨圓面) 포지리(蒲地里) 공소를 신설하였다. 1932년까지 이곳에서 사목한 후 1933년 6월에 충북 옥천(沃川)의 죽향리(竹香里, 현옥천) 본당 5대 주임으로 전임된 멜리장 신부는 옥천 및 영동(永同), 보은(報恩) 지역과 경북 상주군(尙州郡) 일부 지역까지 사목하였으며, 1936년 8월에는 대전 대흥동(大興洞) 본당 6대 주임으로 전임되었다. 재임 중인 1937년 9월에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대전 지역에 진출하자 대흥동과 목동(牧洞)에 부지를 매입하기도 하였다. 1939년 7월 평택(平澤) 본당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948년 7월 공세리(貢稅里) 본당 관할의 방축리(防築里) 공소가 온양(溫陽, 현 아산 온천동) 본당으로 승격됨에 따라 초대 주임 신부로 부임하여 약 2년 동안 사목하다가 74세 되던 1950년 4월 4일 노환으로 사망하여 공세리 본당 묘지에 묻혔다.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 향잡지》 1022호(1950. 5)/ 대전교구 서산 동문 교회, 《瑞山東門本堂七十年史》, 1987/ 옥천 본당사 편찬위원회 편, 《옥천 본당사》 上, 청주교구 옥천 교회, 1991/ 명동 천주교회,《서울敎區年報》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뮈텔 주교 일기》 Ⅲ, 한국교회사연구소 , 1993/ 황해도 천주교회사 간행 사업회,《黃海道天主教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