멩, 장 마리 조르주 Meng, Jean Marie Georges(187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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멩 신부.

멩 신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요한. 한국명은 명약일(明若一). 1874년 3월 21일 프랑스 렌(Rennes) 교구의 일레 빌랜(Ille-et-Vilaine)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그의 부친이 일하고 있는 철도 회사에 들어가기위해 시험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일정이 늦어져 렌에 가서 약 2년동안 가구 세공 기술을배우고 렌 부근의 몽포르(Monfort)에 있는 '만학을 위한집' (une masion de vocations tardives)에서 라틴어를 공부하였다. 우수한 두뇌와 성실함으로 4년 만에 중등 과정을 이수하고 1894년 9월 11일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겸손하고 원만한 교우 관계로 모범적인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899년 6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 선교사로 임명된 뒤 그 해 7월 26일 파리를 출발하여 9월 18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입국 후 임시로 서울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약 7개월 동안 한국어와 풍속을 익힌 멩 신부는, 1900년 봄 샤플
랭(Chapelain, 蔡) 신부의 후임으로 평안도 숙천(肅川)의 섶가지〔薪枝里〕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천주교를 비판하는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신자들에게는 보다 깊은 천주교 신앙을 심어 주고 새로입교하기를 원하는 예비 신자들에게는 올바른 교리 지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는데, 특히 신학상의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들에 관해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한편 숙천 지역에 비하여 군청 소재지인 영유읍(永柔邑)이 전교 및 사목상 유리하다고 판단한 멩 신부는, 본당 설립을 추진하여 1902년 영유 본당을 신설하고 섶가지 본당을 그 관할 공소로 편입시켰다. 영유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맹 신부는 멀리 의주(義州) 공소를 비롯하여 평안남도 북부 전역의 여러 공소를 맡아 순회 전교하며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는데, 이 시기에 그가 관할했던 여러 공소 중 특히 비현(枇峴) 공소는 교세가 날로 성장하여 1911년에는 정식 본당으로 발족되기도 하였다.
또한 관할 구역 내의 공소 확장과 함께 지방 교육 사업에도 전력을 기울여 강흥일(美興一)과 합심하여 1908년 1월에는 영청(永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영유지방 최초의 교육 기관으로 육영 사업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1910년 무렵부터 외교인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려는 움직임이 많아지자, 멩 신부는 보다 적극적인 전교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거처를 의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11년 4월 대구 대목구가 신설되면서 초대 대목으로 임명된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의 후임으로 《경향잡지》(京鄕雜誌)의 편집 책임을 맡았지만, 전교 사업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914년 6월 탄광지대인 평안북도 창성(昌城) 대유동(大榆洞) 광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한국에 진출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젊은 선교사들은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만 하였다. 멩 신부 역시 창성에서의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펴기도 전에 징집 명령을받아 그 해 8월 9일 귀환하여 10월 렌느의 생 뱅상(St.Vincent) 병원에 파견되어 위생병으로 근무하였다. 1916년 10월부터는 마르세유(Marseille) 우체국에서 한국어와 영어로 된 편지 및 신문 기사들을 수집하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군복무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18년 3월 18일 마르세유에서 사망, 파리 외방전교회의 생 피에르(St.Pierre) 묘지에 묻혔다. (→ 《경향잡지》)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경향잡지》 395호(1918. 4)/ 《서울대 교구 교구 총람》 부록, 가톨릭출판사, 1984/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編, 《天主教平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Compte Rendu, Paris, 1918, pp. 163~167.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