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도회

明道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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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중국 북경에 있는 단체를 모방하여 설립한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
〔창설 배경 및 목적〕 명도회의 목적은 "우선 자신들이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 다음에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 주는 데있었다"(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이것은 명도회가 조선교우들의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임을 알려 주는 것이고,교리 연구와 전교가 명도회의 설립 배경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1923년에 간행된 <서울교구 지도서>(Directorium Missi-onis de Seoul)에서는 명도회를 '그리스도교 교리 형제회'(Confraternitas doctrinae Christianae)로 번역하고 그 기원은 16세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 회는 한국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설립되었는데 한때 대단히 번창하였고 그 목적은 ① 그리스도교 교리를 더 부지런히, 더 완전히 배우는 일, ② 그것을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는 일,③ 어린이와 무식한 이들에게 경문과 문답을 가르치는데 신부를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후, 청년회가 있던 본당에서는 명도회를 설립하여 그것을 대신하도록 권하고 있다.
교리 연구의 측면에서 볼 때, 당시 조선 교우들의 교리수준은 매우 피상적이었다. 즉 선교사 없이 스스로 배워온 신자들의 교리 지식은 무지(無知)에 가까웠으며,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는 이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였다. 이에 주문모 신부는 사목 활동의 중점을 문서전교에 두고 성사를 베푸는 동시에 수많은 서적을 한글로 저술하였으며, 조직을 통해 교리 지식을 높이려고 하였다. 명도회를 조직하여 회원들이 교리를 익힌 다음 교인과 외교인들에게 가르치게 함으로써 외교인에 대한 전교와 교인에 대한 재교육을 동시에 실현하였다. 특히 교리 지식이 뛰어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을 초대명도회장으로 임명한 것은 교리 교육에 대한 주문모 신부의 열의를 짐작하게 한다.
전교의 측면에서도 명도회의 설립 배경을 살필 수 있는데, 즉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직전까지 조선에서의 전교는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보다 많은사람을 입교시키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는 회장제(會長制)를 도입하여 교회의 조직화를 도모하였고, 이어 명도회를 조직하여 본 격적인 전교 활동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 결과 신앙이 상인층으로까지 확산될 수 있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 하기 전 4,000명 정도로 추산되던 신자가 1만여 명으로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문모 신부는 이러한 배경과 목적에서 명도회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창 설〕 교리 연구 및 전교 단체인 명도회는 1796년 5월에서 1798년 중순 사이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 창설 시기를 알려 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황사영 백서〉(黃嗣永帛書)와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25권 <황사영 공초(供招)>에 "경신년(1800) 4월에 명회에서 (신입자) 이름을 보고한 다음" (庚申年四月 明會報名之後)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것을 토대로 하여 명도회가 이때나 혹은 그 얼마 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1799년 후반부터 1800년 4월까지는 주문모 신부가 지방에 피신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를 창설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또 명도회의 활동이 서울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보아 주문모 신부가 서울에서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에 창설되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1794년 12월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가 관헌의 추적을 받지 않고 활동하였던 시기는 입국 초창
기 6개월 정도였고, 비록 관헌의 눈을 피해 여러 집을 전전하였지만 비교적 활발하게 활동한 시기는 1796년 5월부터 1798년 중순까지였다. 또 이 기간 동안 그는 북경교구와 긴밀히 연락하였고, 서울에서도 활발하게 신자들과 접촉하였다. 따라서 주문모 신부가 이러한 조직을 만들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 조 직〕 회장(會長)과 그 아래 하부 조직인 회(會)로 구성되었는데, 주문모 신부는 명도회의 초대 회장에 정 약종을 임명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핵심 인물로 교리 지식이 풍부하였으며, 그가 지은 《주교요지》 (主敎要旨)는 주문모 신부도 중국 교리서인 《성세추요》(盛世芻堯)보다 요긴하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따라서 정약종은 명도회의 목적에 가장 알맞은 적임자였다.
이와 함께 명도회에는 하부 조직으로 3~4명 또는 5~6명으로 구성된 모임〔 會〕이 있었다. 이러한 모임은 황사영(黃嗣永)이 체포될 당시 6개가 있었는데, 이를 육회(六會)라고 한다. 당시 육회로는 홍문갑(洪文甲)의집, 홍익만(洪翌萬)의 집, 황사영의 집, 김여행(金勵行)의 집, 현계흠(玄啓欽)의 집,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한 집이 있었으며, 명도회 회원들은 축일 때마다 육회에 참석하였다.
황사영이 지적한 이 인물들은 모두가 당시 교회에서 중요한 활동을 하던 이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5~6명 정도로 구성된 명도회의 하부 조직은 지도적인 신자들이 각기 분담하여 책임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황사영에 따르면 그가 맡은 모임은 자신과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愼行), 이재신(李在信) 등 6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그런데 《사학징의》(邪學懲義)에 보이는 여러 공초 기록에는 황사영이 말한 육회와 같은 구성을 지닌 모임이 나타나고 있다. 즉 김이우(金履禹)의 집에서는 이합규(李鴿逵) , 손덕장(孫德章), 정인혁(鄭仁赫), 현가(玄哥), 오현달(吳玄達), 김이우 형제 등 7명이 모임을 가졌고, 또이합규, 손경윤(孫敬允) , 현계흠(玄啓欽) 손준열(孫俊烈), 최필제(崔必悌) 오현달, 김현우(金顯禹) 등의 모임도 있었다. 따라서 명도회의 하부 조직은 1801년 당시황사영이 언급한 6개 이상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조직 체계를 갖춘 명도회는 나름대로의 규약을 마련해 시행하고 있었다. 즉 《사학징의》에 수록된 <요화사서 소화기)(妖畫邪燒火記)에는 《명도회규》(明道會規)라는 서명이 보이는데,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명도회는 바로 이 회규에 따라 운영되었고 여기에는 보명(報名)으로 알려진 입회 절차 등이 수록된 것으로 짐작된다. 보명이란 배우기를 열심 히 하는 사람을 신부에게 알리면 신부는 서양의 성인 이 름으로 명명(命名)해 보내고, 매년 말 공부의 근만(勤 慢)과 전교의 다과(多寡)를 신부에게 보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1년 안에 신공(神工)을 부지런히 하 면 명도회 입회가 허락되고, 부지런히 하지 않은 사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명도회원은 열심한 신자 중에 먼저 가회원(假會員)을 받아들이고, 1년 동안의 유 예 기간을 거쳐 그 공과를 살핀 후 정식 회원으로 인정하 였다. 이처럼 엄격한 입회 규정으로 보아 명도회는 교리 교육 및 전교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에 있어서 지도자 양 성소의 역할도 하였다.
한편 명도회에는 남성들만 아니라 여성들도 가입하였다. 이것은 주문모 신부가 명도회에 대해서 "회합 장소 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할 지도자를 임명하며, 남녀가 따 로이 참석할 것을 정하는 등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다"는 기록이나, 1801년에 순교한 양제궁 (良娣宮)의 송 씨(宋氏)와 자부(子婦) 신 씨(申氏)가 명 도회에 가입하였다는 기록, 그리고 명도회의 영향으로 입교한 사람 중에 3분의 2가 부녀자였다는 사실에서 여 성 지도자의 양성과 관련하여 여성들도 명도회 회원으로 인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과 및 역할〕 위와 같이 조직 · 운영된 명도회는 많 은 사람의 호응을 받아 커다란 성과를 내었다. 즉 명도회 원의 활동을 보고 명도회에 들지 않은 사람들도 그 분위 기에 따라 다른 사람을 교화하였고, 이러한 실천은 차차 전국으로 퍼져서 놀라운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명도회의 성과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요화사서 소화기> 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모두 120종 117권의 서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83종 111권이 한글로 된 신앙서 이다. 내용도 성서, 전례서, 성사서, 기도서, 묵상서, 성 인전, 교리서, 첨례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특히 서적 들이 목판으로까지 간행되고 이를 비밀리에 팔고 다니는 행상이 있었다는 것은 주문모 신부가 의도한 문서 선교 의 성과를 보여 주는 것이다. 또 명도회의 목적이 교리 연구 및 전교라고 할 때, 이러한 교리서들은 바로 명도회 조직을 통해 확산되었으므로 당시 교리 지식의 확산이란 측면에서 명도회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사학징의》에 나오는 신자 중 69%가 강완숙(姜完淑) 등 19명에 의해 전교되었다고 한다. 이 가
운데 명도회 창설 이전에 순교한 김범우(金範禹), 윤지충(尹 持忠),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을 제외한 15명 은 강완숙, 권일신(權日身), 김건순(金健淳), 김한빈(金 漢彬), 윤현(尹鉉), 이용겸(李用謙), 이존창(李存昌), 정 광수(鄭光受), 정광수의 처, 정약종, 최창현(崔昌顯), 최 필공(崔必恭), 최필제, 한소사(韓召史), 황사영이다. 이들은 당시 교회의 핵심 인물인 동시에 명도회 회원 으로서 활동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해 《사학징의》에 나오는 신자 69%가 전교된 사실은 명도회 의 역할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다. 이처럼 확대 발전되 던 명도회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주문모, 정약종 등 지도적 교인들이 순교함에 따라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활동은 침체될 수밖에 없었다. 〔신유박해 이후의 명도회) 주문모 신부 순교 후 명도 회 조직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즉 핵심 인물의 순교로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명도회는 박 해 이후에도 회원들에 의해 재편되어, 조선 교회의 재건 과 발전에 지속적으로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 침하는 것이 정해박해(丁亥迫害, 1827) 때 순교한 이경 언(李景彥)의 서한이다. 이 서한은 그가 명도회원에게 보낸 것으로, 이를 통해 명도회가 이 시기까지 지속되었 고, 또 각지의 회장에게 안부를 묻는 것으로 보아 지방에 까지 확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초기 명도회와의 관련성을 확인할 수는 없 지만, 초기 명도회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1926년 폴리(Polly, 沈應榮)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가 있다. 즉 폴 리 신부는 남자와 여자가 다 가입할 수 있었던 명도회를 조직하고 모든 회원들로 하여금 제명된다는 조건하에 적 어도 자신이 선택했거나 또는 신부가 지정해 준 예비자 한 명에게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여성 명도 회를 언급하면서, 이 단체의 회원이 되려면 적어도 한 명 의 예비자에게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회원이 교리를 배운 뒤, 이를 통해 전교한다는 초기 명도 회의 목적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또 회에서 제명된다는 조건하에서 전교에 힘쓸 것을 당부한 것도 초기 명도회 의 전교 전통과 일맥 상통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도 명 도회의 영향은 지속되었고 전교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오늘날 각 교구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명도회' 또는 '명도원' 과 같은 단체는 이름만 같을 뿐 초기 명도회와 직접 관계는 없다. (→ 주문모)
※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자료 1집, 한국교 회사연구소, 1966/ 《邪學懲義》, 한국교회사연구소, 19771 推案及鞠案》 25, 아세아문화사, 1978/ <달레 교회사》 최석우,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초기 천주교회>, 《교회사 연구》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1979/ 金翰奎, 〈邪學懲義를 통해서 본 初期 韓國天主敎會의 몇가지問題〉, 《교회사 연구》 2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79/ 鈴木信昭, 〈朝鮮における 周文謨神父 の天主敎布款につし>, 《東洋史研究報告》 IV, 東京大 文學部 史學科, 1987/ 《서울교구 연보》 Ⅱ,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조광, 《조선 후기 천주교사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8/ -, <주문모의 조선 입국과 그 활동>, 《교회사 연구》 1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이원순,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정 착>, 《교회사 연구》 10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