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본당

明洞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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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본당. 서울 중구 명동 2가 1 소재. 설립 연도는 1882년이고, 주보는 원죄 없으신 잉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된 이래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 사회 안에서는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설립 당시에는 조선 교구(정식 명칭은 조선 대목구)의 주교좌 본당으로 '종현 (鐘峴) 본당' 또는 '명동 본당' 이라 불리었고, 1911년 대구교구가 분리됨과 동시에 서울교구(당시의 명칭은 경성 대목구)의 주교좌 본당이 되었으며, 해방 이후부터 정식 으로 명동 본당으로 불리다가 1962년에 한국 천주교회 의 교계 제도가 설정되면서 서울대교구 주교좌 본당이 되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성당 건물의 이름을 따라 흔히 '종현 천주당 또는 '명동 성당' , '명동 대성당' 으 로 불러 왔다. 현재의 사목 관할 구역은 북쪽으로 종로구 관수동 · 관철동 · 서린동과 종로 2가 일부, 중구의 명동과 을지로 4가~충무로 5가~필동(동쪽), 필동~회현동(남 쪽), 회현동~남대문~정동(서쪽)이다. 〔교 세〕 1883년 2,398명(서울 1,445, 기타 953), 1891년 2,051명(서울 1,480, 기타 571), 1893년 915명, 1910년 1,833명, 1924년 2,090명, 1953년 2,318명, 1961년 5,104명, 1972년 10,974명, 1981년 21,862명, 1985년 32,460 명, 1994년 39,781명. 〔역대 신부〕 초대 블랑(Blanc, 白 圭三) 주교(1882~1888), 임시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 부(1888~1890. 8), 2대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1890. 8~1891. 11), 3대 프와넬 신부(1892~1925. 12), 4대 비에모 (Villemot, 禹一模) 신부(1926. 3~1942. 5), 5대 이기준(李 起俊, 토마스) 신부(1942.5~1950.1) ), 6대 장금구(莊金龜, 요한 그리소스토모) 신부(1950. 1~1958. 1), 7대 양기섭 (梁基涉, 베드로) 신부(1958. 1~1961. 12), 8대 이종순(李 鍾淳, 라우렌시오) 신부(1961. 12~1963. 6), 9대 신인식 (申仁植, 바오로) 신부(1963. 6~1964. 8), 10대 황민성(黃 旼性, 베드로) 신부(1964. 8~ 1965. 4), 11대 이계중(李啓 重, 요한) 신부(1965. 4~1968.6), 12대 이문근(李文根, 요 한) 신부(1968. 6~1971. 5), 13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 아) 신부(1971. 5~1972. 10), 14대 김몽은(金蒙恩, 요한) 신부(1972. 10~1978. 3), 15대 경갑룡(景甲龍, 요셉) 주교 (1978. 3~1982. 8), 16대 김수창(金壽昌, 야고보) 신부 (1982. 8~1986. 8), 17대 김병도(金秉濤, 프란치스코) 신 부(1986. 8~1988. 2), 18대 정의채(鄭義采, 바오로) 신부 (1988. 2~8), 19대 조순창(趙順昌, 가시미로) 신부(1988. 8~1994. 9), 20대 장덕필(張德弼, 니콜라오) 신부(1994. 9~현재 )

I . 복음의 전래와 박해

지금의 명동 본당 구역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곳 이요 천주교 신앙이 퍼져 나간 중심지로서, 그 기원은 1781년 무렵 이벽(李檗, 요한)이 고향인 광주 배알미리 (拜謁尾里, 현 하남시 배알미동)에서 서울 수표교(水標橋, 현 중구 수표동) 인근으로 이주한 데 있었다. 이후 그는 처 남인 정약전(丁若銓)과 함께 서학(西學)을 연구하기 시 작하였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천주교를 새로운 신앙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1779년에는 주어사 (走魚寺, 현 여주군 금사면 下品里) 강학에 참석하여 동료 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토론하였으며, 1784년 겨울에 는 북경을 다녀온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권일신(權日 身,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정약용(丁若鏞, 요한) 등과 함께 자신의 집에서 첫 세례식을 거행함으로써 천주교회 를 창설하였다. 이렇게 창설을 본 신앙 공동체는 그 해 늦게 이웃 명례방(明禮坊)에 있던 김범우(金範禹, 토마 스)의 집으로 이전되었고, 1785년 봄에는 이곳에 모여 집회를 갖던 초기의 신자들이 체포되는 명례방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무렵 정약용은 회현방(會賢坊, 현 중구 회현동) 재산루(在山樓)에, 이승훈은 반석방(盤石 坊)의 중림동(中林洞, 현 서울 서부역 인근)에 거주하고 있 으면서 수표교 · 명례방을 오가고 있었다. 명례방 사건 이후 명동 본당 지역에는 두드러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지는 않았지만 남대문 밖이나 남산 일대 에는 계속하여 신자들이 거주하였다. 그러다가 1845년 초에 일시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부제가 석 정동(石井洞, 현 중구 小公洞과 을지로 1가 사이에 있던 마을) 에 거처를 마련하고 이를 복사 이의창(李宜昌)에게 돌보 도록 하면서 명동 본당 지역은 다시 한국 천주교회의 중 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 김대건 부제는 상해로 건너 가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뒤인 1845년 11월부터 이 듬해 5월까지 6개월 동안 석정동에 거처하면서 쪽우물 골(현 남대문로 藍井洞) 등지에 있던 신자들을 방문하고 성 사를 주었다. 그러나 석정동의 공동체는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나면 서 와해되고 말았고, 이후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중구 지 역 안에 거주하면서 신앙을 이어가게 되었다.

II . 본당 설립과 대성당 완공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신앙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서 볼 때, 현재의 명동 본당과 직접 관련이 되는 신자 집 단은 박해가 끝난 다음에 형성되었다. 당시 한국 천주교 회를 이끌어 간 사람은 1882년에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 고, 1884년 리델(P. Ridel, 李福明) 주교의 사망으로 제7 대 조선교구장에 오른 블랑(요한) 주교였다. 그는 이때 남산 아래의 낙동(駱洞, 현 명동 2가와 충무로 1가 사이)에 거처하면서 1882년부터 이미 서울 여러 곳에 공소를 설 립하였는데, 그중에서도 명동과 종현 사이의 김(金, 가 밀로) 회장 집에 있던 '명동 공소' 의 신자수가 300여 명 으로 가장 많았다. 그러므로 블랑 주교는 강원도 · 황해 도 ·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 등 전국 각지로 선교사들 을 파견하여 지역 본당을 설립함과 동시에 명동 공소를 명동 본당(즉 종현 본당)으로 설정하였다. 아울러 1882년 5월 무렵에는 인현동에 매입해 두었던 신부 댁에 가톨릭 학교(Collège Catholique)인 인현학교(仁峴學校, 계성국민학 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일반 학당과 소신 학교의 성격을 함께 갖춘 것으로 한문 학당(漢文學堂 Collège Chinois) 또는 한한학교(韓漢學校, Collège Chinois- Coréene)e)라고 불렸다. 이어 그는 1883년부터 종현 언 덕 일대에서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하여, 그 해 6월 21일 김 가밀로 회장의 이름으로 학당 가옥을 매입하고 인현 학교를 이곳으로 이전하였으니, 이것이 곧 종현 학당(鐘 峴學堂)이다. 명동 본당 설립 이듬해인 1883년의 교세 통계를 살펴 보면, 여기에 속하는 공소들은 경기도 광주 일대에 4개 소, 양주 · 연천 일대에 3개소, 인천 지역에 4개소, 서울 에 12개소 등 도합 23개소가 있었으며, 신자수는 모두 2,398명이었다. 또 종현 학당에서는 1883년 8월 18일 부터 말레이 반도의 페낭(Penang) 신학교로 유학을 갈 예 정이던 한기근(韓基根) · 정규하(鄭圭夏) · 최(崔, 바오 로) · 문 바오로 등이 공부를 하였다. 이후 명동 본당의 공소와 신자수는 해마다 증가하였고, 그 관할 구역도 꾸 준히 증가하여 1885년에 이미 서울 인근뿐만 아니라 동 쪽으로는 광주 일대, 서쪽으로는 인천 지역, 북쪽으로는 가평 일대, 남쪽으로는 안성 일대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 지역을 블랑 주교가, 경기도의 모든 지역을 뮈 텔(G. Mutel, 閔德孝) 신부가 각각 나누어 담당해야만 하 였다.
블랑 주교는 교구장직을 승계한 이듬해인 1885년부 터 두 가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 3월 곤당 골(美洞, 현 중구 을지로 1가 미대사관 서쪽)에 집 한 채를 매입하여 시작한 고아원과 7월경에 시작한 동골(東谷, 현 종로구 관철동)의 양로원 사업이 그것이다. 실제로 블 랑 주교와 뮈텔 신부는 1880년 무렵부터 이미 신자 개 인에게 고아들을 위탁하여 돌보도록 하였으며, 1885년 정식으로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한 다음 이를 영해회 (嬰孩會)에서 맡아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많 은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었으므로 영해회 신자들만으로 는 운영하기 힘들었다. 이에 블랑 주교는 샬트르 성 바오 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여 1888년 7월 22일에 는 프랑스 수녀 2명과 중국인 수녀 2명이 한국 땅을 밟 게 되었다.
〔대성당 건립과 완공〕 1883년 6월부터 본격적으로 부 지를 매입하기 시작한 블랑 주교는 1889년 6월까지 30 여 차례에 걸쳐 지금의 명동 성당 구역과 같은 넓은 부지 를 매입하는 데 성공하였다. 본래 이곳은 조선 시대 때 '북단재' 혹은 '종현' 으로 불리던 곳으로 목멱산(木覓 山, 즉 남산)에서 뻗어내린 여러 언덕 줄기 가운데 하나였 고, 행정 구역상으로는 남부 명례방 종현계(鐘峴契)의 종현동과 이웃의 명동에 속해 있었다. 또 북단재가 속한 목멱산 줄기에는 언덕을 넘어다니는 세 개의 길이 있었 는데, 이들은 위로부터 윗재 · 중간재 · 아랫재로 불리었 으며, 이 가운데 종현 언덕은 중간재에 해당하였다. 이곳 에 부지를 매입하는 사이에 1886년에 한불조약(韓佛條 約)이 체결되고 이듬해 비준을 거쳐 효력을 발생하게 되 자, 블랑 주교는 성당 부지 매입을 파리 본부에 보고하는 한편 1887년 12월부터 정지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888년 10월에는 처음으로 2층 목조 건물을 완공하고, 나가사키에서 서울 정동으로 옮겨온 성서 활판소를 다시 이 건물로 이전한 뒤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에게 맡 겼다. 한편 조선교구의 경리를 맡고 있던 프와넬(빅토리 노) 신부는 돌우물골(石井洞, 현 소공동 인근)에 있던 경 리계를 1885년에 새문안으로 옮겼다가 1887년에 종현 으로 옮기고 코스트 신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명동 대성당(1977년에 사적 제258호로 지정) 건 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당시 외무 독판이던 조병직 (趙秉植)은 이를 제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1888년 1월 정부의 이름으로 성당 대지의 소유권을 억류하고 나 섰고, 블랑 주교가 그 부당함을 항의함으로써 '종현 성 당 대지 분쟁' 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때 조병직은 명동 대지가 국유지임을 주장하면서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영희전(永禧殿, 현 저동 소재)의 수호신을 어지럽히는 일 이므로 불법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천주교에 대해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고 성당 건립을 방해하려고 한 것 이었다. 이후 사건은 플랑시(Plancy, 葛林德) 프랑스 공 사의 중재로 2년이 지난 1890년 초 정부에서 명동의 대 지 문권을 교회측에 되돌려 줌으로써 끝이 나게 되었다. 그 동안 블랑 주교는 코스트 신부로 하여금 대성당과 용산 신학교, 장차 건립할 약현 성당의 설계를 맡도록 하 였고, 그는 중국 기술자들을 초청하여 우선 1889년에 주교관 겸 경리부로 사용할 2층 건물(현 명동 주교관 앞 건 물)과 수녀원, 고아원 건축에 착수하여 이듬해 9월 8일 우선 고아원 겸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그러나 블랑 주교 는 고아원과 주교관이 완공되기 바로 전인 1890년 2월 병사하였고, 그 뒤를 이어 제8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1년 4월 19일 주교관 강복식을 집전하 고, 이어 1892년 5월 8일 명동 대성당 정초식을 거행하 였다. 이후 대성당의 완공을 위해서는 종탑 건립(1897), 바닥의 타일 주조, 천장의 아치형 공사, 스테인드 글라 스, 제대 설비(1898), 성 베네딕도상과 예수 성심 제대 제작 등 어려운 일이 많았고, 그때마다 새로 기술자를 부 르거나 외국에서 자재를 들여와야만 하였다. 또 설계와 공사 감독을 맡았던 코스트 신부가 1896년 2월에 사망 함으로써 프와넬 신부가 그 대신 공사 감독을 맡아 다시 2년 3개월 간 노력해야만 하였다. 그리고 1898년에는 마침내 종탑 45m, 길이 69m, 너비 28m의 삼연(三緣) 고딕 양식의 대성당을 완공하여 5월 17일에 지하 성당 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고, 성신 강림 축일인 5 월 29일에 한국 교회의 주보인 원죄 없이 잉태하신(無染 始孕胎〕 성모 마리아를 또한 종현 성당의 주보로 하여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본래 이 주보는 제2대 조선교구 장이던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가 1838년에 조선교 구의 주보로 허락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여 1841년 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부터 허락을 얻은 바 있었다.

Ⅲ . 본당의 분할과 변모

〔약현 본당의 분할〕 대성당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명 동 본당의 사목은 프와넬 신부가 블랑 주교, 파스키에 (Pasquier, 朱若瑟) 신부 등과 함께 임시로 나누어 맡았 고, 1890년 8월 충청도에서 올라온 두세(가밀로) 신부 가 제2대 본당 신부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블랑 주교 는 1887년 남대문 밖 수렛골(현 중구 순화동)에 집 한 채 를 매입하여 교리 강습소로 이용하였으며, 이후 강습소 는 신자들이 모임에 따라 자연히 약현(藥峴) 공소(일명 '문밖 공소' )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약현 공소는 설립되자 마자 그 교세가 명동 본당(일명 '문안 본당' )의 교세를 능 가하게 되었다. 1888년 가을의 신자수를 볼 때도 문안 본당이 653명이었음에 반해 문밖 공소의 경우에는 777 명이나 되었다. 또 블랑 주교는 이 무렵에 평안도 · 함경 도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여 전교 활동의 거처를 물색하 도록 하고, 앙드레(André, 安學古) 신부를 수원 인근의 갓등이(旺林, 현 화성군 왕림리)로 파견하여 본당을 설립 하도록 하였으며, 개항지인 제물포에서도 성당 대지를 물색함으로써 명동 본당의 분할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두세 신부는 약현 공소의 신자수가 나날이 증가하게 되자, 1891년 7월에 뮈텔 주교의 허락을 얻어 남대문 밖에 설립된 약현 준본당의 성당 건립 작업에 착수하였 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약현 언덕에 있는 서씨 집안의 가옥과 김군선(金君善) 소유의 야산, 전답 등을 매입하 여 성당 건축의 토대를 마련한 뒤 1891년 10월 27일에 는 약현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였으며, 11월 9일 명동 을 떠나 약현에 자리를 잡음으로써 약현 준본당이 본당 으로 분리 설립되었다. 그 결과 명동 본당은 1892년 초 에 프와넬 신부가 제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관할 구 역은 서울 4대문 안으로 축소되었다.
〔시복 운동과 백동 본당의 분할〕 대성당 건축과 본당 분할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프와넬 신부는 언제나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또 대성당 축성식 며칠 후인 6 월 11일에는 종 축성식을 가졌고, 1899년에는 담장 공 사를 하였다. 이어 1900년 9월 5일에는 병인박해 순교 자들의 시복 수속 작업의 일환으로 1899년에 왜고개〔瓦 峴〕에서 발굴되어 용산 신학교에 안치되어 있던 베르뇌 (Berneux, 張敬一) 주교 등 7명의 순교자와 1882년에 남 포 서들골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보내졌다가 1894년에 용산 신학교로 옮겨진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 등 4명의 유해를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 고 1901년 11월 2일에는 삼성산(三聖山)에서 용산 신 학교로 옮겨져 안치되어 있던 앵베르 주교 등 3명의 유 해를 지하 묘지로 옮겼으며, 1909년 5월 28일에는 남종 삼(南鍾三, 요한)과 최형(崔炯, 베드로)의 시신을 왜고 개에서 발굴하여 지하 묘지로 옮겨 안치하였다. 이 무렵 종현학교에서는 1908년에 지방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를 건립하였고, 1909년 9월에는 4년제 남 · 여 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남학교를 '계성학교' (啓星學校) , 여학교를 계명학교 (啓明學校)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동 안 1906년에는 진고개 쪽의 통로를 무단으로 점유한 일 본인과 명동 본당 사이에 소송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소 송은 오랫동안 시일을 끌다가 조선에서 세력이 컸던 일 본인의 승소로 판결이 났지만, 1911년에 이르러 정치 · 외교적인 방향에서 절충을 보게 되었다. 바로 이 해 조선 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되어 나가면서 명동 본당은 경 성교구의 주교좌 본당으로 변모되었다.
그 후 프와넬 신부는 1917년부터 교구의 부주교를 겸 하게 되었다. 또 1921년부터 크렘프(Krempff, 慶元善) 신부를 보좌로 맞이하여 청년 활동과 교육 사업을 담당 하도록 하였으며, 1922년에는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발족시켰고, 1924년에는 애긍회(哀矜會)를 창립하여 자 선 사업을 시작하도록 하였다. 이 애긍회(회장 정남규 요 한)에서는 1926년에 양로원을 개설하였다. 성당 시설로 는 1920년에 백동(柏洞, 지금의 혜화동)에 진출해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 수사들에게 의뢰하여 강대 및 닫집 을 설치하였으며, 1924년에는 뮈텔 주교 성성 은경축을 기념하여 전국 신자들이 모은 헌금으로 프랑스에서 파이 프 오르간(수동식)을 주문해 와서 설치했다. 1925년에는 기해 · 병오박해 79위 순교자 시복식을 기념하여 복자 유해 거동 행사를 개최한 뒤 복자 제대와 복자 성화를 장 식하였는데, 이 해 뮈텔 주교가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그 리고 다음해에는 14사도(바오로와 바르나바 포함)의 상본 (제작 : 張勃 루도비코)을 제작 설치하였으며 사제관과 청 년 회관, 사무실 등이 신축 축성되었다. 뿐만 아니라 본 당에서는 일제의 교육 탄압 속에서도 계성학교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 1924년 4월 17일 남 여 학교를 통합, 6 년제 계성지정보통학교(啓星指定普通學校)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프와넬 신부는 1925년 12월 26일 노환 으로 사망함으로써 약현 본당에 있던 비에모(마리) 신부 가 1926년 3월부터 제4대 본당 주임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백동에 있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새로 마련된 함 경남도 덕원(德源) 수도원으로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 다. 그러자 뮈텔 대주교는 백동 수도원의 이전과 동시에 이곳에 새 본당 중심지를 둘 계획을 갖게 되었다. 이에 수도원 이전이 거의 완료된 1927년 4월 29일, 명동과 약현 본당으로부터 '백동 본당' 을 분리 설립함과 동시에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 였고, 그 결과 4대문 안의 명동 본당 관할 지역 중에서 동대문~연건동~창경 이북의 지역이 새 본당으로 이 관되었다.
〔일제 말기의 탄압〕 비에모 신부 재임기는 일제 총독 부에 의한 탄압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고, 본당의 사목 활 동 또한 제약을 받아가던 시기였다. 이에 비에모 신부는 1930년에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를 보좌로 맞이 하여 계성보통학교의 운영권을 맡기는 한편 자신은 본당 사목에 힘썼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을 맞이하여 본당에서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를 이끌어 오던 뮈텔 대 주교가 사망함에 따라 1927년 보좌 주교로 성성된 라리 보(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제8대 서울교구장을 맡아 대성당에서 착좌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1931년 부터 경성교구 청년 연합회를 중심으로 병원 설립 운동 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라리보 주교는 1935년 3월 11일, 명동 대성당 앞에 있던 무라가미(村上) 병원 을 매입하여 제반 설비를 갖추도록 하고, 이듬해 5월 11 일 병원을 개원하였다. 이것이 현재 여의도로 이전한 명 동 성모병원(聖母病院)으로,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정식 병원이었다. 이후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져 갔고, 1940년 12월 8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에는 노골적으로 교회 탄압 을 획책하였다. 본당 신자들은 다른 본당과 마찬가지로 신사 참배를 하여야만 했고, 1939년에는 국민 정신 총 동맹 결성 운동에도 참여해야만 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도 신자들은 같은 해 9월 24일 조선 천주교 순교자 현양 위원회 결성을 도왔으며, 다른 본당 신자들과 함께 경성 교구 가톨릭 합창단을 창단하였다. 또한 경성보통학교는 1938년에 경성계성심상소학교(京城啓星尋常小學校)로 개칭되었고, 1939년 2월 11일에는 강당(현 문화관)이 신 축되었으며, 1941년 4월에 다시 경성계성학교(6 · 25 동 란 때 폐교되었다가 1964년에 복교됨)로 개칭되었다. 한편 라리보 주교는 총독부가 일본인 성직자를 각 교 구장에 앉히려는 계획을 알아채고 비밀리에 동경의 교황 사절을 통해 노력한 끝에 1942년 1월 3일 노기남 신부 를 자신의 후임으로 제10대 경성교구장에 피임되도록 하였다. 이어 노기남 교구장은 11월 14일 주교로 승품 되고 12월 20일에는 대성당에서 성성식을 갖게 되었다. 또 같은 해 5월에는 본당의 비에모 신부가 은퇴하여 살 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옮겨감에 따라 이 기준(토마스) 신부가 5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그 러다가 일제 말기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쇠붙이 공출 명 령이 내려졌고, 이때 대성당의 철제 영성체 난간도 강압 적으로 공출되어 목재로 교체되었다. 다행히 대성당의 종만은 노기남 주교가 완강히 버팀으로써 공출을 면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해방이 될 때까지 종을 칠 수 없었고 종탑도 판자로 봉쇄해야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당 신자들은 1944년 6월 11일에 성체 거동 행사를 개 최하였고, 노기남 주교의 허락을 얻어 지붕과 벽체 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IV . 광복과 전쟁 이후의 안정

〔광복 및 전쟁과 본당 분할〕 1945년 8 · 15 광복을 맞 이하던 날, 대성당에서는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성모 승천 대축일 미사가 거행되었다. 이어 9월 28일에는 미 군 환영식이 개최되었고, 12월 8일에는 상해 임시 정부 요인 환영식이 열렸다. 이 밖에도 본당에서는 해마다 거 행된 서품식, 1946년 9월 16일의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기념 미사와 성체 거동 행사, 1947년 10월 12 일의 교황 사절 번(Byne, 方溢恩) 신부 환영식, 1949년 4월 5일의 전국 주교 회의, 6월 14일의 번 주교 성성식 등 갖가지 의미 있는 행사가 있게 됨으로써 신자들은 기 쁨과 활기를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1946년에 본 당 자치위원회, 서울교구 청년 연합회와 여자 청년 연합 회가 결성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성 요셉회와 성모 자비 회(聖母慈悲會)가 창립되어 양로원 사업을 계속 이어나 갔다. 서울교구 출판부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가톨릭출 판사로 발전하여 교리 서적을 발간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였다. 성당 시설로는 1946년에 종각 피뢰침 설치 등 성당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고, 1948년 5월 29일에는 성 모 무염 시태상을 뒤뜰에 안치한 뒤 6월 2일에 대성당 축성 50주년 기념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월에는 교구 부주교로 임명된 이기준 신부 후임으로 장 금구(요한 그리소스토모) 신부가 6대 주임으로 임명되 었으나, 그는 곧 이어 발발한 6 · 25 동란으로 인해 고난 을 겪어야만 하였다.
한편 해방이 되면서 서울교구에서는 본당 설립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는데, 본당 관할 구역 안에서도 이에 편승하여 본당 설립 운동을 전개한 곳이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사직동(社稷洞)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은 우 선 사직동 118번지에 있던 가옥 2층을 빌려 모임을 가 지면서 노기남 주교에게 본당 설립을 청원하여 사직동 준본당(세종로 본당의 전신)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다 가 1947년 4월 22일에 성모병원에 있던 이선용(李善 用, 바오로) 신부가 퇴원하면서 이곳에 거처를 정하였 고, 6월 29일에 정식으로 초대 주임에 임명됨으로써 사 직동 본당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명동 본당 의 관할 구역 중에서 광화문의 북서쪽, 신문로 1가~사 직동 북쪽 지역이 새 본당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이어 본 당의 장금구 신부는 1948년 초부터 신당동(新堂洞) 지 역에 본당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우선 공소를 설 립하였다. 이에 따라 신자들은 신당동 377-51번지 소재 오규환(吳奎煥, 요한)의 집을 임시 공소로 삼고 본당의 장금구 신부와 함께 성당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 였는데, 12월 22일 교구 당국에서 신당동 본당의 설립 을 발표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조인원(趙仁元, 빈천 시오)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 신당동 본당의 분할로 명 동 본당의 관할 구역 중에서 신당동을 비롯하여 충무로 1가~필동의 동쪽 지역이 분할되어 새 본당으로 편입되 었다. 또 1949년 9월 하순에는 본당 구역 중에서 가회 동(嘉會洞) 지역(일명 북촌19동)이 가회동 본당으로 설정 되고, 초대 주임으로 윤형중(尹亨重, 마태오) 신부를 맞 이함으로써 분리되어 나가게 되었다. 이로써 명동 본당 은 모두 5개의 자(子) 본당을 갖게 되었으며, 다시 종로 구 사간동~원서동 북쪽 지역이 분할되었다.
6 · 25 동란이 발발한 뒤 명동의 성직자들은 노기남 주교가 유럽 순방 중이었으므로 부주교인 이기준 신부를 중심으로 장금구 신부의 사제관에 모여 대책을 숙의한 끝에 우선 경향신문사를 맡고 있던 윤형중(尹亨重, 마태 오) 신부와 주교 비서인 김철규(金哲珪, 바르나바) 신부 를 피난시키기로 하고, 그대로 남아 성당과 주교관을 지 켰다. 이때 장금구 신부는 부상한 국군을 문화관 지하실 에 숨겨 두고 있었으므로 인민군이 둘러보러 올 때마다 마음을 졸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7월 11일에는 마침내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주교관에 있던 교황 사절 번 주교 와 비서 부스(W. Booth, 夫) 신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 원에 있던 비에모 신부와 베아트릭스(M. Béatrix) 원장 수 녀, 으제니(Eugène) 수녀, 교구 경리를 맡고 있던 유영근 (俞榮根, 요한) 신부 등을 납치해 갔다. 이 가운데 부스 신부와 으제니 수녀를 제외하고는 훗날 모두 순교하였 다. 이어 명동 대성당과 사제관 · 주교관이 공산당에게 탈취되었고, 수녀들과 보육원의 원아들은 쫓겨났으며, 성직자들은 계성여자상업전수학교 기숙사에 감금되었다 가 용산의 옛 신학교 건물로 이감되었다. 그 와중에서도 장금구 신부는 6월 29일에 혼인성사를 주었고, 8월 6일 에는 이기준 신부와 함께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였다.
9 · 28 서울 수복, 1 · 4 후퇴, 서울 환도를 겪으면서 도 대성당은 다행히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스테인드 글 라스가 파괴되고, 뒤뜰의 성모 무염 시태상이 훼손되어 수녀원으로 옮겨졌다가 보수되어 제자리에 안치되었을 뿐이다. 이후 본당 신자들은 우선 전쟁으로 희생된 성직 자 · 수도자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는 한편 1952년부터는 전재민 구호 물자를 받아 분배해 주었고, 본당 자치위원 회를 재구성하였으며, 1954년에는 성모 성년을 맞이하 여 《성모 마리아》를 간행하고 10월 8일에 축하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전쟁의 상처를 잊으면서 점차 본당 성장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본당의 변모와 안정〕 전후 성모병원에서는 나름대로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46년 9월 23일 중 구 저동(苧洞) 1가 2번지에 있던 건물(현 평화방송국 자 리)을 인수하여 자선 진료와 함께 입원 분실로 사용해 왔 지만, 전쟁으로 의료 수요가 증가하면서 병원 증축과 의 과대학 설립이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구 당국과 병원측이 합심 노력하여 1954년 4월 8일자로 '성신대학 의학부'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설립 인가(문고 제780호)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의학부 는 마땅한 건물이 없었으므로 임시로 명동 성당 구내에 있던 성가 기숙사 건물을 사용하였으며, 이후에도 명동 성당 구내 여러 곳을 전전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성모 병원과 의학부의 활동이 안정을 찾게 되면서 병원 신축 계획을 수립하여 1961년 12월 1일에는 지상 8층, 지하 2층의 신축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 회관)을 완공하게 되 었다. 이와 함께 전후의 변모 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종로(鍾路) 본당의 분할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 던 신자들은 이미 일제 말기에 라리보 주교의 도움으로 인의동 169번지에 부지 77평을 매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다시 몇 년이 지난 1951년 8월 30일에는 본당 의 장금구 신부가 기존의 대지 위에 추가로 19평을 더 매입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전쟁 중이었고, 서울이 수복 된 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본당 설립의 희망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1955년 4월 10일 교구청에서 본당 신 설을 발표하고, 초대 주임으로 명동 본당의 보좌로 있던 이계중(李啓重, 요한) 신부가 임명됨으로써 분리 독립되 었다. 이처럼 여섯 번째 자 본당의 분할로, 청계로를 중 심으로 장사동~예지동 북쪽 지역이 새 본당으로 이관되 었고, 그 결과 명동 본당은 비로소 현재와 같은 관할 구 역을 갖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1958년 1월에 장금구 신부가 강화 본당 으로 전임되고, 양기섭(베드로) 신부가 7대 본당 주임으 로 임명되었다. 그는 초기에 성신대학 의학 부장 및 성모 병원장을 겸임하는 어려운 임무 속에서도 그 해 7월과 8 월에 성녀 소화 데레사상과 예수 성심상을 안치하였고, 본당 주보인 <명동 주보>를 창간하였으며, 1959년 본당 의 남성 신자들로 하여금 하상(夏祥) 클럽(하상회의 전신) 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무렵에 지하 1층, 지상 2층의 사제관(현 교육관)을 신축하여 본당 사제관 겸 집회 장소로 이용하였고, 1960년에는 미국 순방 중 에 구입한 전동식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고 이전의 오 르간을 대신학교로 이전하였으며, 루르드의 성모 동굴을 조성하여 8월 27일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러다가 양기 섭 신부는 1961년 12월에 일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동 시에 수석 보좌로 활동하던 이종순(라우렌시오) 신부가 8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사제관 옆에 수녀원을 신축하였 다. 한편 1962년 2월 26일에는 가톨릭 형제회(A.F.I.)에 서 사제관과 연결하여 여학생관을 완공 축성한 뒤 이를 여학생 기숙사 겸 학생들과 부녀자들의 교육 장소로 이 용하게 되었으며, 6월 29일 한국 교회에 교계 제도가 설 정되면서 본당은 서울대교구의 정식 주교좌 본당이 되었 다. 그러나 이후 1965년까지는 본당 신부가 자주 교체 되었으니, 1963년 6월에는 이종순 신부의 뒤를 이어 9 대 신인식(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어 1964년 8 월에는 황민성(베드로) 신부가 10대 주임을 맡아 14처 상을 교체하고 성당 보수 공사를 하다가 이듬해 4월 제2 대 대전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이처럼 주임 신부가 자주 교체되는 가운데서도 본당은 안정을 찾고 성장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 라 1965년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가 끝나 게 됨으로써 본당의 전례와 사도직 등도 그 가르침에 따 라 점차 변화가 있게 되었다. 이 무렵에 11대 주임으로 재임하던 이계중(요한) 신부는 부임 후 이전의 자치위원 회(처음의 명칭은 자치회)를 재조직하여 본당의 내실과 신 자 활동의 활성화를 꾀하였으며, 종현회(鐘峴會)를 설립 하였다. 또 대성당 보수 공사를 하였으며, 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새 종을 만들어 종탑에 설치하였다. 그러던 중 1967년 3월 27일에는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은퇴함 으로써 수원교구장 윤공희(尹恭熙, 빅토리노) 주교가 교 구장 서리를 맡다가 다음해 4월 27일 김수환(金壽煥, 스 테파노) 대주교가 제11대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5 월 29일에 착좌식을 갖게 되었다.

V . 본당의 성장과 현재

〔조직의 체계화와 대성당 보수〕 김수환 대주교의 교구 장 착좌 이후에 있은 교구의 기구 개편으로 1968년 6월 이계중 신부가 전임되고, 이문근(요한) 신부가 12대 주 임 겸 교구 총대리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후 1968년에 있은 병인박해 순교자 시복 경축 행사, 서울대교구 평신 도 사도직 협의회 창립, 1969년 5월에 있은 김수환 대 주교의 추기경 서임(서임일은 4월 28일) 축하 행사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그는 1968년에 난방 장치를 설치하고, 1971년에 종각의 탑 시계를 수리하였다. 아울러 1970년 2월에는 자치위원회 를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로 개편함으로써 본당 조직 체 계를 다졌으며, 같은 해 12월에 월간 신문 <가톨릭 명 동>을 창간하였다. 이어 1971년 5월에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석우(안드레아) 신부는 무엇보다도 성전 보수 가 시급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1972년에 '명동 대성당 복원 보수위원회' 를 구성한 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건 물을 진단하고, 6월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하였다. 그러 나 그는 1972년 10월에 삼각지 본당으로 전임됨으로써 공사를 마무리하지 못하였고, 복원 사업은 14대 김몽은 (요한) 신부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김몽은 신부는 부 임 즉시 미사 예물을 공금화하였으며, 대성당 지붕과 벽 체 보수 공사를 1973년 말까지 마무리하면서 우선 본당 사도직 협의회를 사목위원회로 개편함과 동시에 초본당 적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신학생 후원회인 안드레아회 를 창립하고, 성서 · 성물 판매소를 교구로 이관하였으 며, 민주화 운동과 시국 기도회를 개최하였고, 사목위원 회 피정, 공의회 문헌을 통한 평신도 재교육과 단체 피정 등을 통해 내실화를 기하는 데도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서울교구의 본당수는 1978년 9월 에 100개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교황청에서는 교구장의 업무가 과다하다고 생각하여 1977년 3월 경갑 룡(요셉) 신부를 보좌 주교로 임명하였으며, 경갑룡 주 교는 이듬해인 1978년 3월부터 15대 본당 주임을 겸하 면서 발전적인 사목 개혁에 착수하였다. 우선 신입 교우 수가 증가하는 것을 계기로 매월 예비 신자 교리반을 편 성하였으며, 강의실을 증설하기 위해 사제관을 교육관으 로 개조함과 동시에 1979년에는 현재의 사제관과 수녀 원 · 소성당 · 사무실을 신축하였다. 이 해에 오랫동안 본 당 구내에 있던 가톨릭 출판사가 중림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또 1982년에는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복 원하는 동시에 지붕 동판 보수 작업을 실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대성당 보존 · 보수 사업 계획이 입안되었다. 아울러 경갑룡 주교는 1980년부터 사제 당직 근무제를 신설하여 신자들의 상담 · 고백 · 축성 등에 도움을 주고 자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행려자를 돌보기 위한 성 빈천 시오회를 설립하였고,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여 의도 신앙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민주화 운동과 본당〕 196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회 는 '현대 사회와 교회의 역할' 이라는 명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본당 또한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었으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평신 도 사도직을 체계화하고 사회 안에서 의 교회를 중시해 나가면서 교회의 내적 쇄신 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명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 서면서 한국 교회는 사회에서 억눌리 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유신 체제가 시작되면서 이 운동은 단지 사회 운 동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항쟁으로 변모하였다. 동시에 1970년 대전에서 창립된 한 국 천주교 정의 평화위원회의 활동이 점차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 하였고, 1975년부터 부정 부패와 사회 부조리 척결, 정 치에 의한 인권 유린 고발 등에 앞장서면서 2월 6일 명 동 대성당에서 전국적인 인권 회복 기도회를 가졌으며, 이것이 다음해인 1976년의 '3 1 명동 사건' 즉 '민주 구국 선언문 사건' 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성직자, 저명 인사 등이 구속되 었고, 이때부터 명동 본당은 민주 항쟁의 구심점으로 자 리잡기 시작하였다.
당시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된 구속자 석방 운동, 숨겨 진 사건들에 대한 조사, 민주화 및 구국 기도회 등은 교 회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1974년에 발족된 정의 구현 전 국 사제단의 활동, 가톨릭 평신도 운동, 노동자 · 농민 운 동 또한 대부분 명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예로는 1974년의 지학순(池學淳) 주교 사건, 1977년의 함평 농민회 사건, 1978년의 동일방직 사건, 1979년의 안동 농민회 사건, 1980년의 광주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인한 시국 선언문 채택과 명동 집회들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1980년대 내내 계속되는 민주화 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본당의 현재〕 1982년 8월, 경갑룡 주교가 대전교구 장으로 이임하면서 김수창(야고보) 신부가 16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며, 이어 17대 김병도(프란치스코) 신부, 18대 정의채(바오로) 신부가 1988년까지 본당 사 목을 담당하였다. 이 중 김수창 신부는 본당에 부임하자 마자 우선 1984년에 맞이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 년에 맞추어 대성당 보수 공사를 대대적으로 시작하였으 며, 1982년 12월 8일에는 주보 축일을 맞이하여 본당 설립 100주년 행사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3년의 특 별 성년(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성업, 1950주년)을 맞이하여 순례 성당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화해와 쇄신 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동시에 본당 내적으로는 명동의 복음 200년사 자료 발간, 103위 복자 순회 기도회와 성인 시 성식 기념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 1985년에는 현재의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어 7월 13일에 축성식을 거행하 였다. 한편 1986년에 들어서는 민주 헌법을 위한 개헌 서명 운동을 본당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이 6 · 10 명동 성당 농성과 촛불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러한 민주화 운동이 정의채 신부 재임시까 지 계속 이어져 나갔다.
이 기간 동안 본당에서는 한편으로 본래의 사목적 위 상을 되찾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고심해야만 하였다. 그 러므로 1988년 8월, 19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조순창 (가시미로) 신부는 명동 본당이 초본당으로서의 위상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회 안에서의 교회와 본당 사목이라는 점을 절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 에 상설 고백소를 설치하고 1989년에는 직장인 미사를 신설하였다. 아울러 여성 단체에 비해 활동이 저조했던 남성 단체들을 활성화하는 데 힘쓰면서 각종 신앙 강좌 와 피정 등을 통해 신자들의 신심 활동에 도움을 주고자 하였고, 1991년 1월부터 7월까지 대성당 축성 1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인사 이동으로 인해 이 기념 사업은 20대 장덕필(니콜라오)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장덕필 신부는 교구청과 협의하 여 교구와 본당이 함께 100주년 사업을 전개하기로 결 정한 다음, 1995년에는 100주년 기념관 설계 경기를 개 최하고 모금 운동을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명동 본당은 서울대교 구의 주교좌 본당으로서, 교회 안에서는 한국 천주교회 의 중심으로, 한국 사회 안에서는 천주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또 이러한 상징성은 대성당과 이웃하여 서 울대교구 주교관이 위치해 있고, 1986년 이래 교구 가 톨릭 활동의 중심인 가톨릭 회관이 옛 성모병원 자리에, 1988년 평화방송사와 평화신문사가 옛 산재병원 자리에 들어서면서 더욱 뚜렷해지게 되었다. 한편 1970년대 이 후 본당은 민주화의 산실로 여겨져 왔지만, 이 민주화 운 동이 조직적인 민권 운동으로 확대된 것은 아니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쇄신 운동과 함께 교회의 가르 침을 바탕으로 한 사회 정의의 실현, 인권 운동의 옹호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교회 안팎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 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명동 본당은 현대 사회 속 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정치· 사회적 활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선도해 주는 역할도 하게 되었다. (-> 명례방 공동체 ; 뮈텔 ; 블랑 ;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 서울대교구 ; 종현 학당 ; 한 국 천주교회 )

※ 참고문헌  <달레 교회사》 上l 《경향잡지》 <가톨릭 신문>/ 한국 교회사연구소 소장, <본당별 교세 통계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Mutel 주교 일기>(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명동 대성당 연보>(1908~1983, 필사본) 韓國敎會史研究所 편, 《서울教區教區 總覽》, 가톨릭출판사, 1984/ 명동 천주교회, 《韓國가톨릭 人權運動 史》, 명동 천주교회, 1984/ 韓國敎會史研究所 역편, 《서울敎區年報》 I . Ⅱ, 明洞天主教會, 1984 · 1987/ 朴濤遠, 《盧基南大主敎》, 韓國 敎會史研究所, 1986/ 천주교 명동 교회 편, 《교세 통계표(1882~ 1985)》,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명동 천주교회 편, 《명동 성당 건축 사》,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편, 《한국 살 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車 基眞, 〈中區 天主教會史〉, 《中區誌》, 1994/ 천주교 명동 교회, 《명동 성당 신문 기사 자료집》 상 · 하, 명동 교회 편찬실, 1994/ 천주교 명 동 교회, 《명동 대성당 연보》(1991 · 1992, 타자본) 한국교회사연구 소 편, 《블랑 문서》(타자본), 1992. 〔車基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