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名分)과 실제(實際)를 합치시켜야 한다는 유학(儒學)의 사회 · 정치 사상. 정명론(正名論)이라고도 한다. 명(名)이란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의미하며, 분(分)이란 그에 따른 권리와 의무 및 욕망의 한계를 의미한다.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키기 위해서는 각자의 지위에 부합되는 역할을 완수해야 하는데, 그 역할이 자신의 지위에 넘쳐서도 안되고 모자라서도 안된다. 명에 따르는 분을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전체적인 조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발 전〕 공자(孔子)는 명분과 실제가 합치되는 것을 '정명' (正名)이라 하였다. 당시 춘추 시대의 혼란이 명 분과 실제의 괴리(乖離)로부터 야기되었다고 인식한 공자는 당시의 혼란상을 고(确)에 비유하였다. 고란 원래 모가 난 술잔 이름이었는데 당시의 고에는 모가 없었다. 그리하여 공자는 "고가 고답지 못하면 고라 할 수 있겠 는가?"(《論語》)라고 개탄하였다. 공자가 명분과 실제를 합치시켜 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로 저술한 <춘추>(春秋)는 철저히 명분론의 입장에서 당시의 역사 사실을 평가하여 기록한 것이다. 맹자(孟子)는 공자가 《춘추》를지을 당시에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두려워 떨었다고 하였듯이, <춘추》의 평가는 은미(隱微)하면서도 엄정한것이었으며, 이후 유교적 역사 의식의 표준이 되었다. 공자는 제경공(齊景公)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君君臣臣父父子子, 《論語》)고 답하였다. 군주는 백성이 그에게 기대하는 군주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고, 신하도 역시 신하로서의 기능과 역할을 다하는 것이 '정명' 이다. 한 사회의 다양한 지위에 있는 모든 구성원들이 각자에게 부여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면서 유기적인 연대를 이룰 때그 사회는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명분론의 주장이다.
이러한 명분론은 본래 《주역》(周易)의 음양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돈이(周敦頤)는 "음양이 다스려진 이후에 조화를 이룬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형은 형답고, 아우는 아우답고,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워야 한다. 만물은 각각 그 다스림을 얻은 연후에 조화를이룬다"(《通書》)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다움' 이나'각각 그 다스림을 얻는다' 는 것은 바로 명분과 실제가 합치됨을 의미한다. 명과 실이 합치됨 또는 명에 따르는 분을 지킴을 역학(易學)에서는 '정위' (正位)라 한다. 정위란 음은 음의 자리에 있고 양은 양의 자리에 있는 것으로서, 그래야만 음양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서로 교감(交感)하여 만물을 끊임없이 생생(生生)할 수 있다는 것이 역학의 지론이다.이러한 관점에서는 인간 관계도 감응(感應)으로 해석한다. 정이(程頤)는 "무릇 군신과 상하(上下)로부터 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로 감응하는 도리가 있으며, 사물이 서로 감응하면 형통하게 되는 이치가 있다. 군신이 서로 교감하면 군신의 도리가 통하며, 상하가 서로 교감하면 상하의 뜻이 통한다. 부자 · 부부 · 친척 · 붕우(朋友)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의(情意)가 서로 교감하면 화순(和順)하게 되어 형통하다"(《易傳》)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명분론이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타인을 그의 본분에 알맞게 대접함으로써 조화로운 인간 관계를 창출하고, 조화를 창출함으로써 서로간에 감응이 이루어지게하고, 감응을 통해서 각자의 인생이 형통해지도록 하는것이다. 따라서 명분 질서의 본질은 결코 상하를 엄격하게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하의 감응을 추구하는 것이다.
〔비 판〕 유교적 명분 질서는 상명 하복(上命下服)이 아닌 예(禮)에 입각한 호양(互讓)의 질서를 이상으로 여긴다. 유교에서 말하는 예란 상하를 엄격하게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하간에 인애(仁愛)와 공경을 통하여화(和)를 이루자는 것이다. 명분론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현실을 무시하고 관련이 없는 논리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명분을 중시하다 보면 실리(實利)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이다. 이러한 우려는 공자의 제자인자로(子路)에 의해 실제로 제기된 바 있었는데 자로가 공자에게 "위(衛)나라 제후가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부탁드리려고 하니,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부터 하시렵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반드시 명분과 실제가합치되도록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답하였다. 이에 대해 다시 자로는 "선생님께서는 너무 우활(迂闊)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명분을 바로잡으려고 하십니까?라고 의아스러운듯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 공자는 자로의교양 없음을 꾸짖고, 정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명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조리가 없게 되고, 말이 조리가 없게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진흥되지 못하며,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게 되고, 형벌이 적중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 수 없게 된다" (《論語》)라고 깨우쳐 주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은 일견 우활해 보이기도 하겠지만,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 사회 존립의 근간이 된다는 지적이라 하겠다.
유학의 명분론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그것이 봉건 적 위계 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라는 것이다. 명분론 이 상하의 신분 질서를 유지하는 논리로 적용되어 온 것 이 역사적 사실이긴 하지만 명분론의 본질은 지배 계급 의 피지배 계급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자는 데 있는 것 이 아니고, 오히려 상하의 모든 계층의 욕망을 합리적으 로 제한함으로써 사회적 조화를 구현하자는 데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는 "처음 대부가 되어 마승(馬乘)을 치 는 사람은 닭과 돼지를 치지 않으며, 경대부(卿大夫) 이 상으로 얼음을 쓰는 집안은 소와 양을 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이익의 독점을 제도적으로 방지 함으로써 각자의 생업을 보장하고, 사회 전체적인 조화 를 이루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명분론이 위계 질서의 관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위계 질서란 동서고금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의 사회에서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임도 사실이다. 문제는 그 위계 질서가 자발적인 예양의 질서냐, 아니면 강제적 인 상명 하복의 질서냐 하는 것에 있다. 〔의 의〕 전통적으로 성악설(性惡說)에 입각한 법가(法 家)는 법치(法治)에 의한 상명 하복을 강조하였지만, 성 선설(性善說)에 입각한 유학에서는 덕치(德治)에 의한 자발적 예양의 질서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정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문 것도 현실이다. 그리하 여 유학에서는 도덕과 예악에 의한 정치를 근본으로 삼 으면서도 법제와 형정(刑政)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명 분론은 특히 정치 지도자의 능동적 책임을 강조한다. 정 치 지도자의 임무란 애민 정치(愛民政治)를 실천하는 것 으로, 만일 지도자가 애민 정치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는 더 이상 지도자라고 할 수 없고, 지도자에게 있어서 명분과 실제가 괴리되었을 때는, 방벌(放伐)과 혁명(革 命)이 정당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명분론은 혁명론으 로 연결된다. 탕(湯)이 걸(桀)을 추방하고 무왕(武王)이 주(紂)를 정벌한 것에 대하여,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 는 것이 있을 수 있느냐고 제선왕(齊宣王)이 맹자에게 질문하였을 때, 맹자는 "인(仁)을 해치는 사람을 적(賊) 이라 하고, 의(義)를 해치는 사람을 잔(殘)이라 하며, 잔적(殘賊)한 사람을 일부(一夫)라 합니다. 일부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孟子》)라고 답하여 탕과 무의 방벌을 정당화하였다. 이와 같이 명분론은 유교 사회에 있어서역성 혁명(易姓革命)이나 반정(反正)의 논거가 되기도 하였다. ※ 참고문헌 《論語》 《孟子》 《大學》/ 《周易》 《春秋》 周敦頤, 通書》 柳承國, 《東洋哲學研究》, 槿域書齋, 1983/ 安炳周, 《儒敎의 民本思想》,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소, 1987. 〔李東俊〕
명분론
名分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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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