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존 에드워드 (1889- 1987)

Morris, John Ed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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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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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에드워드 모리스 몬시뇰.

몬시놀. 제2대 평양 지목구장.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창립자. 세례명은 요한. 한국명은 목이세(睦世). 1889년 1월 1일 미국 매사추세츠의 폴 리버(Fall River)에서 태어나 폴리버 공립학교를 거쳐 1909년 프린스 에드워드 아이스랜드의 던스탄(Dunstan) 대학을 졸업하였다. 메릴랜드 주볼티모어의 세인트 메리(St. Mary)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1914년 6월 13일 사제로 서품되어 폴 리버 교구의 세인트 조지프(St. Joseph) 성당 보좌 신부로 7년 동안 사목하였으며, 1921년 1월 25일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입회한 후에는 펜실바니아의 베나드(Venard)메리놀 소신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약 2년 반 동안
메리놀회의 홍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이미 중국과 만주에 진출하여 전교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메리놀회가 1922년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포교권을 위임받게 됨에 따라, 모리스 신부는 1923년 8월 24일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그 해 11월 24일 입국하여 한국어와 풍습을 익혔으며, 1924년 4월에 평안도 영유(永柔)로 옮겨갔고, 그 해 8월에는 영유 본당 4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어학원을 세웠다. 또 영청(永淸)학교의 효과적인 운영과 성당 · 사제관 · 수녀원 등의 건립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각종 교육 사업과 사회 사업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7년 3월 17일 서울 대목구로부터 평양 지목구가 분리 · 설정되었는데, 초대 평양 지목구장 번(P. Byrne, 方溢恩) 신부가 1929년 8월 메리놀회의 부총장으로 선다. 그러나 이집트의 왕 파라오는 불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위협을 느끼고 이를 억제하기 위해 그들에게 힘든 노동을 부과하였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이 낳은 자식 가운데 사내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이 모세가 탄생할 때의 배경이다. 즉 모세는 야훼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 과 자손 에 관한 약속(창세 12, 1-7 ; 15, 1-21 ; 17, 1-8 등) 가운데 자손에 관한 약속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땅에 관한 약속의 성취가 남아 있는 시기에 태어난 것이다.
레위 지파에 속한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모세가 태어났고, 그의누이는 미리암이었으며 형제로는 아론이 있었다(출애 2, 1 ; 6, 16-20; 7, 7 ; 민수 26, 59 ; 1역대 23, 12-14). 아이의 부모는 파라오의 눈을피해 석 달 동안 기르다가 더 이상숨기기가 어려워지자 왕골 상자에아기를 넣고 강물에 띄웠다. 파라오 의 딸인 공주가 그 상자를 발견하고 아이를 안아 들자, 이를 지켜보던 아기의 누이(미리암)는 아기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소개하여 아기는 다시 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다가 파라오의 딸에게로 보내진다. 모세는 공주의 양자로서 이집트궁중 안에서 자라게 되는데, 신약성서는 "모세는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습니다" (사도 7. 22)라고 전한다. 모세라는 이름 역시 그가 이집트의 왕족 안에서 성장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집트의 왕족은 흔히 신의 이름에다'~에게 사랑받은' , '~에게 선택받은' 등의 말을 붙여 성(姓)을 지었는데, 모세라는 이름과 어근을 가진 'mes' 역시그중의 하나로서 '~에서 나온 , '~에서 유래한' 이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출애급 사건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이집트의 왕 라므세스(Rameses)의 이름 또한 태양신 '라' (Ra)와 'mes' 가 결합한 것으로, '태양의 아들' 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부르심〕 청년이 된 모세는 어느 날 이집트인이 한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쳐죽여 몰래 모래 속에 묻어 버리지만, 이 일이 탄로난 것 을 알고는 광야로 도망간다. 이집트인의 손에서 히브리인을 구해준 이 사건은 앞으로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예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시뽀라라는 여인과 결혼하고 장인 르우엘(혹은 이드로라고도 함 : 출애 2, 18 ; 3, 1 ; 4,18 ; 18, 1)의 집안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 생활을 하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불꽃이 이는 가운데에도 타지 않는 떨기 가운데 신비로이 나타나신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극심한 노역에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셨고, 또 아브라함 · 이사악 · 야곱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신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모세에게 이집트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당신이 약속하신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갈 것을 명하신다(출애 3, 1-12).
모세는 하느님의 소명을 받은 많은 예언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처음에는 여러 가지 구실을 대며 이 사명을 거부하려 하지만, 결국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겠다는 약속과 기적을 일으키는 징표를 받고 사명을 수락하였다. 이때 하느님은 모세와 함께 백성 앞에 나설 동반자로 그의 형 아론을 세워 주셨다. 모세가 떠나기 전 하느님의 이름을 물어 '야훼' 라는 이름을 계시받는 출애굽기 3장14절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출애급의 해방 사건과 시나이 계약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야훼는 어떤 고정된 형상이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없고, 오직 인간을 온갖 형태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롭게 하는 사건을 통해 나타나시고, 또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이시라는 신관(神觀)이 여기에서 비롯된다.
〔출애급의 중개자〕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켜 약속의 땅, 즉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라는 야훼 하느님의 사명을 받고 파견된 모세는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야훼를 섬길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전하지만, 파라오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에게 노역을 더욱 심하게 부과하여 모세는 같은 민족들로부터 원성을 듣는다. 모세는 파라오의 고집을 꺾기 위해 야훼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 땅에 재앙을 선포하지만, 9가지 재앙 즉 물이 피로 변함, 개구리 소동, 모기 소동, 등에 소동, 가축병, 피부병(종기), 우박, 메뚜기 소동, 어둠이 온 땅을 덮는 재앙에도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는다.
야훼가 모세에게 예고해 주는 열 번째 재앙은 이전과 는 달리 장엄하고 단호한 야훼의 의지가 담겨 있다(출애 11장). 양을 잡아 그 피를 두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안은 건너뛰고, 그렇지 않은 이집트 사람들의 집안에는 야훼가 들어가 사람의 맏아들들과 가축의 맏배들을 모조리 쳐죽이리라는 것이 이 마지막 재앙인데, 이스라엘의 가장 큰 축제인 파스카(과월절)는 '건너뛰다' , '넘어가다' 는 뜻을 가진 말로서 이 열 번째 재앙에서 유래한다.
야훼가 예고한 대로 파라오는 이 열 번째 재앙에 굴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 주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해 나오지만곧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 여기에서 출애급의 마지막 결정적인 사건, 즉 갈대 바다(혹은 골풀 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서 바다를 건너고, 뒤쫓던 이집트 군대는 갈라진 바다 한가운데에서 다시 합쳐지는 물에 휩쓸려 몰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물을 건너 약속의 땅을 향해 가게 된 이 사건은 후에 신약의 교회에서 세례를 통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예표로 이해되기도 한다.
〔시나이 계약의 중개자〕 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급을 한 지 석 달째 되는 초하룻날 시나이 광야에 이르게 된다(출애 19, 1). 야훼 하느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부르시고 그를 중개자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계약을 맺으셨는데, 여기에서 모세의 특별한 위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하느님이 계약을 맺을 것을 예고하시며 모세에게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너에게 다가가겠다. 그러면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이 듣고 너를 언제까지나 믿게 될 것이다"(출애 19, 9)라고 하신 말씀은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나오는 '믿는다' 는 말은 성서 안에서 신앙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에 대해서 쓰이는 것인데, 인간에게는 예외적으로 모세에게만 적용되고 있다. 이 단어는 출애급이 이루어진 바로 다음에도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 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출애 14, 31)고 하여 이미 모세에게 적용된 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모세 개인의 위대함보다는 모세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하는 말씀이 곧 하느님 자신의 활동임을 강조하는 표현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 안에서 모세가 차지하는 위치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이라 하겠다.
나팔 소리와 천둥 소리가 울려 퍼지고 불길과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하느님이 시나이 산 위로 내려오시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며 모세가 중개자가 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였고, 모세는 산을 오르내리며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해 주었다. 모세가 백성 앞에 내놓은 하느님의 말씀은 곧 계약의 말씀으로서 주된 내용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에 이어 출애굽기 21-23장에 제시된 여러 가지 법규들은 십계명에 대한 일종의 시행 세칙과 같은 것이다.
모세가 하느님의 이 모든 말씀과 법규들을 백성에게 전하자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환호하며 야훼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 살 것을 서약하고, 모세는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의 제사를 드린다(출애 24장). 이로써 야훼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야훼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과 맺는 계약이 3번 등장하는데 노아의 계약(창세 9장), 아브라함의 계약(창세 15장) 그리고 시나이 산 계약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 시나이 산 계약이야말로 백성 전체가 야훼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고, 이 계약을 통해서 임되어 본국으로 돌아가자, 1930년 4월 1일 모리스 신부는 제2대 평양 지목구장에 임명되는 동시에 몬시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평안도 지역의 전교를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우선 본당 신설과 사목 조직의 확충에 전력을 다하였다. 1930년 9~10월에 청천강(淸川江) 부근의 안주(安州)와 압록강 중류의 요지인 중강진(中江鎮)에 각각 본당을 신설하였고, 이듬해에는 서포(西浦)와 숙천(肅川) 본당을, 1933년에는 강계(江界) 본당을 신설하였다. 또 1932년 6월부터 1933년 10월까지는 평양 지목구장이면서 관후리(館後里) 본당 임시 주임을 맡아 사제관을 신축하고 성당을 증축하는가 하면, 청년회 주최로 많은 강연회를 개최하여 평양 일대에 천주교가 널리 전교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밖에도 입국초기부터 한국인 성직자 및 수도자 성소에 큰 관심을 가져, 1930년 10월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부제, 1931년 5월 30일 강영걸(康永杰, 바오로) 부제, 1933년 5월 25일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부제가 각각 사제품을 받고 교구 신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 같은 해에 한국 교회 최초로 신학생 김필현(金泌現, 루도비코)과 박용옥(朴瓏玉, 디모테오)을 로마 울바노(Urbano) 대학에, 그리고 강현홍(康賢洪, 사도 요한)을 일본 동경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학교에 각각 유학보내 그들이 보다 깊은 신학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 선교에 있어서 여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한 그는, 한국인 수녀 양성의 필요성도 절감하여 메리놀 수녀회에 한국인 수녀회의 회원 양성을 위촉함으로써 1932년 6월 27일,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邦人) 수녀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를 창립하였다.
1933년 3월에는 조선 가톨릭 운동의 위원장직을 맡아 이듬해 8월 15~18일 평양교구 평신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위해 1933년 9월 28일 '제1회 평양 지목구 전교 회장 강습회' 를 개최하여 성서 해설과 호교론, 교회사, 전례, 주일학교 교리 등을 교육받게 하였다. 더욱이 1934년 1월에는 성서와 교회사, 실천적 지침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월간 잡지 《가톨릭 연구》를 창간하였는데, 이 잡지는 그 해 8월에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 중앙부' 의 기관지로 선정된 이후 더욱 다양한 내용과 체재를 갖추게 되었다. 1936년 전국 주교 회의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이 잡지는 그 해 12월 《가톨릭 청년》이 폐간됨에 따라 당시 가톨릭 운동의 유일한 잡지가 되어 교회의 문화와 학술을 대변하는 구실을 하였으며, 이후 주교 회의 공인 출판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이어 '평양 지목구 가톨릭 운동 연맹' 을 조직하여 신자들의 신앙 생활의 활성화는 물론 문맹 퇴치, 계몽 및 문화 운동의 활발한 전개에 크게기여하여 교세 확장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35년 10월 2~4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을 기념하기 위한 경축 행사를 다채롭고 성대하게 열어, 한국 순교자 시복 10주년 기념식과 한국 교구장 연례 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토록 하였으며 이를 위해 방문한 교황 사절 마렐라(P. Marella) 대주교의 방문을 담당하였다. 평양 지목구장 임명 초기만 해도 9개 본당, 65개 공소에 신자수가 7천여 명에 불과했던 평양 지목구의 교세는, 여러 방면에 걸쳐 이루어진 그의 노력으로 재임 6년 만에 19개 본당, 134개 공소에 신자수 17,738명으로 증가하는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편 일제 치하의 어려운 상황에서 전교 및 사목 활동을 전개한 그는, 일본 정부가 한국인들에게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메리놀회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1935년 6월 일본 주재 교황 사절과 면담한 후, 그의 결정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한국의 다른 교구장들과 마찬가지로 신사 참배에 동의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메리놀회 총장의 의견에 따라 1936년 7월 31일 지목구장직을 사임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이듬해 일본 선교사를 자원하여 교토의 가와라마키 성당에서 한인(韓人) 사목을 담당했으나, 일본 정부의 선교사 추방 정책에 따라 1942년 8월 31일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다. 1942~1944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한인 사목을 담당하였으며, 1944년 1월 말에는 하와이의 여러 곳에 파견되어 1956년 8월까지 사목하였고, 1957~1959년에는 시애들(Seattle)의 메리놀회 홍보관 책임자로 일하였다.
1959년 6월 30일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사로 재임명된 모리스 몬시놀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그 해 9월 26일 부산에 도착한 후 10월 16일 인천 송의동(松義洞) 본당 주임을 거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인천 분원 및 해성(海星) 보육원 지도 신부, 강화(江華) 본당 보좌 등을 역임하였고, 답동(沓洞) 본당 보좌 때인 1961년 12월 9일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1964년 6월 13일, 인천교구에서는 모리스 신부의 사제 서품 금경축을 맞이하여 용현동(龍峴洞) 본당에서 축하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였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의 버팔 (Buffalo), 루이지애나(Louisiana)의 뉴올리언즈(New Orleans) 등에서 메리 놀회 홍보를 담당하였고, 그 후 고령으로 성사 및 사목 활동에 어려움이 많자 1970년 2월 9일 캘리포니아의 로스 알토스(Los Altos) 메리놀회 지부에서의 사목을 끝으로 은퇴하였다. 그 후 뉴욕의 메리놀회 본부에서 운영하는 은퇴 선교사를 위한 '성녀 데레사의 집' (St. Teresa's Residence)에서 휴양하였는데, 휴양 중에도 그의 사목 열정은 대단하여 86세 때인 1975년 5월 다시 메리놀회의 특수부(Special Society Unit)를 맡아 은퇴 신부들을 위해 사목하였다. 사제로 서품된 후 73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성직 생활 중 특히 30년 이상을 해외 선교에 종사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사목하였던 모리스 몬시놀은, 98세 때인 1987년 7월 10일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 평양교구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경 향잡지》 1156호(1964. 7) <평화 신문> 385호(1996. 6. 23), 8면/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50년사》, 1983/ 이정순 편, 《목 요안 신부》, 영원 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994/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인천교구 25 년》, 천주교 인천교구, 1987/ 平壤教區史編纂委員會 編, 《天主教平 壤教區史》, 분도출판사, 1981. 〔李裕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