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슨, 로버트 Morrison, Robert(178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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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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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모리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중국 선교사. 중국명은 마예손(馬禮遜). 모리슨은 1807년 9월 중국에 진출한 이래약 25년 동안 마카오 (Macao)와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성서 번역 및 의료·교육 · 출판을 통한 그의 활동은 프로테스탄트의 동방 선교와 동서 문화 교류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입교와 중국 진출〕 1782년 1월 5일 영국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의 모페드(Mopeth)에서 태어나 16세 때프로테스탄트에 입교한 모리슨은, 17세 때 교회 잡지에실린 선교에 관한 기사를 읽고 선교 사목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01년 6월부터 래이드로우(A. Laidlaw) 목사에게서 라틴어 · 그리스어 · 히브리어를 배운 그는, 1803년에 선교사가 되기 위해 런던의 혹스톤 아카데미(Hoxton Academy)에서 2년 가까이 공부한 후 1804년 5월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 해외 선교사지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면서 고스포트(Gosport)선교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강도 높은 특수 선교 훈련을 받았고, 1805년 8월부터 1년 반 동안은 런던의 성 바르톨로메오 병원에서 의학을, 그리니치 천문대에서는 천문학을 각각 공부하였으며, 특히 1806년에는 중국 광주에서 유학 온 용삼덕(容三德)에게 중국어를 배우기도 하였다. 약 3년에 걸쳐 선교사 기본 훈련을 끝낸 모리슨은1807년 1월 런던에 있는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해 9월 7일 미국을 경유하여 중국 광주에도착하였다.
〔선교 활동〕 그 당시의 중국 선교는 청조(淸朝)의 대외 제한 정책 때문에 매우 힘든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리슨의 입국 절차는 물론, 그의 입국 목적은 중국의실정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나 광주에 도착한 직후 그는, 중국인 선생을 초빙하여 중국어를 익히면서 선교 사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1809년에는 동인 도회사(東印度會社)의 통역원으로 초빙되면서 체류 문제도 해결되었다.
모리슨이 25년 동안 중국에 머무르면서 이룩한 가장현저한 선교의 공적은 성서 번역이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업무 시간 외에는 오로지 성서 번역에 할애하였는데, 1810년 9월 《사도 행전》을 출판하였고, 이듬해 9월에는 《루가 복음》, 1812년에는 <문답천주야소구법>(問答天主耶蘇救法;眞道文法)을 간행하였다. 특히 1819년에 완역되고 1823년에 말라카(Malaaca)에서 출판된 《신천 성서》(神天聖書)는 중국 프로테스탄트 역사의 이정표이자, 중국 선교의 전기를 마련한 일로 평가된다. 성서 외에도 《영화 문법 입문》(英華文法入門), 《중문 법정》(中文法程, Dictionary ofthe Chinese Language), 《영화 자전》(英華字典)및 여러 종류의 선교 문서를 간행하였는데, 영국 글라스고우 대학은 모리슨의 중국어에 대한 학문적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1817년 그에게 명예 신학 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또 1820년에는 동인도회사의 전담 의사인 리빙스톤(J. Livingstone)과 함께 중국인을 위한 전문 진료소를 개설하여 서양 의학을 중국에 소개하였고, 이로써 중국에 대한 의료 선교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한편, 정치적인 제약으로 중국에 대한 선교 사업이 거의 불가능해지자 모리슨은 광주의 선교 기지를 동남아
일대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말라카를 선교 기지로 확정하고, 1813년 마카오에 도착한 밀네(W.Milne)에게 책임을 맡겼다. 1815년에 밀네는 몇 명의 인쇄공을 데리고 말라카에 왔는데, 이때 동행한 양발(梁發)이 1816년 11월 밀네에게서 세례를 받고, 1821년에는 모리슨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중국 프로테스탄트의 첫 번째 목사가 되었다. 그 사이 모리슨은 1814년 7월에 중국 프로테스탄트의 첫 번째 신자인 채고(蔡高)에게 세례를 주기도 하였다. 밀네가 추진하고 있던 말라카 선교 기지가 발전하는 가운데 모리슨은 선교사 양성 을 위한 교육 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우선 1818년 11월 말라카에 영화서원(英華書院, The Anglo-Chinese College)을 설립하였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의 선교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가능한 선교 방법이 곧 문서 선교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1824년 3월 휴가를 얻어 귀국한 모리슨은 왕립 학회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영국에 동방어문학교(東方語文學校)를 세우기도 하였다. 1826년 9월 2년 동안의 영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모리슨은 중문 성서 주해서와 가정 교육 지침서 저술에 힘을 쏟는 한편, 성서 색인본과
《광주 방언 자전》(廣州方言字典)을 편찬하였고, 당시 중국 최초의 영자(英字) 주간 신문인 <광주 지승>(廣州志乘, The Canton Register)의 주필 겸 부편집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834년 영국이 동인도 회사의 중국 무역 독점권을 폐지하면서 모리슨은 영국 주(駐)광주 무역 감독관인 네이피어(Napier)의 통역관이 되었으나, 건강이 쇠약해져 그해 8월 1일 광주에서 5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생전에 성서 번역 외에 교리, 기도 등과 관련된 12종의 중문 (中文) 저서와 중국과 관련된 19종의 영문(英文) 저서를 남긴 모리슨의 유해는 마카오로 옮겨져 프로테스탄트 구분장(舊墳場, Protestant Church and Old Cemetery)에 묻혔다.

※ 참고문헌  楊森富, 《中國基督敎史》, 臺灣商務印書館, 1968/ 李志剛, 《基督教早期在華傳教史》, 臺灣商務印書館, 1985/ 이병길, 《로버트 모리슨》,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4. [方相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