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러〕Moskva · 〔영〕Mosc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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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에 제작된 모스크바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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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에 제작된 모스크바 지도.

러시아 연방의 수도. 세계 최대의 도시 가운데 하나이자 국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러시아 역사의 주요 무대로서 자리잡아 왔으며 600년 이상 러시아 정교회의 영적 구심이 되어 왔다. 면적 994k㎡. 인구 864만 2,000명(1985). 오늘날에는 러시아의 정치뿐만 아니라 인구 ·공업 · 문화 · 과학 · 교육 등에서도 중심적인 도시인데,도시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모스크바 환상 대로가 대략의 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도로 너머의 지역은 대부분이 산림 공원 지대, 즉 녹지대로 지정되어 도시 개발이엄격히 통제되고 있다.
〔도시의 역사〕 신석기 시대부터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지만, 모스크바가 처음으로기록에 나타난 것은 1147년에 수도자들이 기록한 연대기에서이다. 1156년에 돌고루키(Yu. V. Dolgoruky) 공이이곳에 참호를 두른 요새를 세우고 방벽을 쌓은 후 방책 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크레믈린(Kremulin)의 기원이다.1236~1240년 타타르족에게 함락당하여 타타르족의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고, 1293년에 또다시 타타르족에 의해 약탈당하였으나 곧 복구하였다. 1326년 러시아의 동방 교회 대주교인 페오그노스트(Feognost가 주교좌를 블라디미르에서 모스크바로 옮김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때 크레믈린 내부에 최초의 석조 건물인 성모 승천 성당이 세워졌고, 공후와 대귀족들을 위한 저택 · 수도원 · 성당 등이 세워졌다. 모스크바는타타르족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하였는데 1380년 돈 강에서의 전투로 타타르족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 주었으나, 1382년 전열을 가다듬고 재침략한 타타르족에 의해 함락 · 약탈당하였다가 1408년에 그들을 격퇴시켰다.
모스크바는 1478년에 노브고로트 공국을 합병한 후비로소 통일된 러시아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반 3세의 통치 기간(1462~1505) 중에 크레믈린이 재확장되었고 성모 승천 성당과 대천사 성당의 재건 및 성모 영보 성당의 건축등이 이루어졌는데, 그런 중에서도재난과 침략은 계속되었다. 1547년에는 두 차례의 화재로 대부분의 지역이 잿더미가 되었고, 1571년에는크림 반도에서 온 몽골족에 의해 모스크바가 점령당하고 크레믈린을 제외한 모든 곳이 불태워졌다. 1601~1603년에는 극심한 굶주림에 허덕였고, 1605~1612년에는 폴란드인들과의 소규모 충돌로 인한 폭동과 소요도 자주 발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발전하여 1686년에러시아 최초의 고등 교육 기관인 슬라브어 · 그리스어 · 라틴어 아카테미가 설립되었으며,1701년에는 표트르 대제가 수학 · 항해 학교를 세웠고,1703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이 발행되었다. 1712년산크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로 수도가 옮겨져모스크바의 인구 증가는 잠시 주춤하였으나, 18세기에도모스크바는 러시아의 문화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계속하였다. 1755년 러시아 최초의 대학인 모스크바 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공업이 발전하여 18세기 말에는 300여 개의 공장이 모스크바에 들어섰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으로 약탈과 거대한 화재가 있었으나, 프랑스군이 철수한 후 대규모의 재건이 이루어짐과 동시에공업도 발전했다. 1837년 모스크바 증권 거래소가 설립되었고 철도 개통으로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890년 이후부터는 중공업과 금속 가공업의 발달로 새로운공장들이 많이 세워졌다.
1905년 러시아 혁명 때 모스크바에도 소규모의 소요가 발생하여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이듬해 3월 레닌이 모스크바를소련의 수도로 정하고 정부 청사들을 옮김으로써 옛 지위를 되찾게 되었다. 1922년 전(全) 소련 연방 의회에서'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의 창설을 입법화함으로써 모스크바의 지위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28년부터 시작된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소련은 몇몇 경제분야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였으며,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국가 중 하나로 성장하여모스크바는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의 공산당이 무너진 뒤, 소련의 공화국들이 이룬 독립국가 연합에서도 많은 행정 기능의 중추 역할을 계속 맡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 수도로서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동방 교회〕 14세기 초 키예프(Kiev, 소비에트-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의 동방 교회 수석 대주교들은모스크바의 대공(大公)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1441년 바실리 2세(Wassilij II ) 즉위 때 이들 수석 대주교들 중 이시도로(Isidoros)는 로마 교회와의 일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 후 1448년 리아잔의 요나스(Jonas vonRjasan)가 바실리 2세를 계승하면서, 이때부터 러시아 동방 교회가 뿌리내릴 전조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붕괴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들은 모스크바가 콘스탄티노플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주장하면서,'제3의 로마' 라는 이념을 가지고 러시아 황제와 비잔틴의 수석 대주교들은 특별한 유대 관계를 맺었다. 그 후러시아 황제 표트르(1584~1598)가 1589년에 러시아에총대주교좌를 창설함으로써 모스크바의 관구 대주교 욥(1589~1605)이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가 되었는데, 이에대해 그리스인들은 반대하였다. 그러나 1593년 콘스탄티노플에 모인 동방 교회의 총대주교 4명이 모스크바의 총대주교에게 동방 교회 총대주교좌의 다섯 번째 지위를부여함으로써 모스크바 총대주교좌를 승인하였다. 러시아인의 종교적 · 민족적 구심점 역할을 한 러시아 교회는황제 치하와 러시아 혁명 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 고통을겪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1961년에는 '세계 교회 협의회' 에 가입하였고 1988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전래 1천년 축제를 모스크바에서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라틴 전례의 가톨릭 교회〕 러시아 정교회 신자가 대부분인 러시아에서 가톨릭 교회의 선교 활동은 일찍부터불가능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모스크바의 성 베른하르트 수도원의 수사들과 예수회의 활동이 있었고, 18세기에는 외국인 가톨릭 신자들을 대상으로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의 활동이 이루졌다. 이 당시 1721년에 모스크바 대주교좌가 설정되었고, 베드로-바오로 성당이건립된 데 이어 1789년에는 루드비히 성당이 건립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 집권 이후 공산당에 의해 모질레브(Mogilev)의 대주교좌가 해체되고 가톨릭 성직자와수도자 및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었으며, 많은 수의 신학교와 수도원, 성당 등을 빼앗겼다. 1933년에 와서 미국은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가톨릭사제의 성무 활동을 소비에트 정부측에 정식으로 요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톨릭 미사는모스크바의 성 루드비히 성당에서 거행되었는데, 여기에는 폴란드인들과 다른 외국인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 러시아 ; 러시아 정교회)
※ 참고문헌  Galia Burgel, 《EU》 15, pp. 816~817/ B. Stasiewski, 《LThk》7, pp. 657~658/ B.J. Comaskey, 10, pp. 7~10/ G.A. Maloney, 《CE》7, p. 3671 p. 578. 〔편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