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작곡가. 18세기 빈 고전주의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Salzburg)에서 태어나 요안네스 그리소스토무스 볼프강구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Joannes Chrysostomus Wolfgan-gus Theophilus Mozart)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테오필루스는 라틴어로 아마드(Amad)였기 때문에, 그는 후에자신의 편지나 작품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는이름으로 서명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공식 이름이 되었다. 궁정 악단의 부악장 겸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작곡가이기도 하였던 아버지 레오폴트(1719-1787)로부터 체계적인 음악 수업을 받은 모차르트는, 6세 때부터 빈 ·파리 · 런던 이탈리아 등으로의 연주 여행을 통해 넓은음악 세계를 체험하였다. 이미 5세 때부터 미뉴에트와 소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한 그는 11세 때인 1767년에 빈에서 첫 번째 독일 오페라타인 <바스티엔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 50)를 작곡하였으며, 이듬해 12월 7일에는 바이젠호이스 성당 축성식을 위한 미사곡과다른 작품들을 작곡하였으며 황제 앞에서 그 작품들을 지휘하였다. 1769년 잘츠부르크 대주교로부터 작곡가 ·지휘자 · 음악 감독을 겸한 궁정 악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은 계속되었고 여행 중에 만들어진작품들의 공연도 계속되었다. 1781년 여름 새로 임명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의 불화로 12년 간 지켜온 자리를 사직하고 음악 도시 빈으로 간 후, 직장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 예술가' 로서 헨델(G.F. Hendel) 이후 공식적인 후원 없이 자립을 감행한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아버지의 끈질긴 반대에도 불구하고 1782년 8월 콘스탄체와장크트슈테판 성당에서 결혼한 모차르트는 일생 동안 그녀에게 애정이 담긴 편지를 썼으며, 콘스탄체가 변덕스러운 성격에 악처라는 비판도 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였다. '자유 예술가' 로서 모차르트의 생활은 개인지도, 작품 출판, 연주회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청중의 기호에 비례하였다. 빈에서의 첫 몇 년 동안 그는 뛰어난 음악가로 명성을 얻었으나 샘솟듯 솟아나는 그의 상상력은 이탈리아 음악에친숙한 빈 청중의 한계를 크게 앞지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탈리아 음악과 판이한 모차르트의 음악을 쉽게 즐길 수 없었다. 음악적 아름다움이 전적으로 청중 개인의청취 관습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그는, 더 이상 청중에게얽매이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높은 예술의 세계로 그들을인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모차르트를 더 어렵게 만든것은 1782년 요셉 2세 황제의 사치 금지령이었다. 빈의풍부한 교회 음악 전통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황에서그는 어떠한 교회 작품의 위촉도, 연주 청탁도 받지 못하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1787년 12월 요셉 2세 황제의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경제 사정은 안정적이지 못하였다. 1785년 이후에는 친구들, 특히 프리메이슨 단원들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 썼기에 경제적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주 여행을 떠났으나 수입이 형편없어 결국 파산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모차르트는 <레퀴엠>(Requiem)을 작곡하던 중 1791년 12월 5일 3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의 유해는 사망 다음날 묘를 파는 인부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크트마르크 묘지에 묻혔다.
〔작 품〕 모차르트는 빼어난 피아니스트이자 특히 즉흥 연주에 능한 작곡가였다. 그는 모든 장르에 걸쳐 다양한작품들을 남겼는데, <요술 피리>(Die Zauberflöte)를 포함한 6개의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달리 음악이 주도하는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모차르트는 "시(詩)를 음악에 복종하는 음악의 딸"로 파악하여 가사를 음악으로심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오늘날 오페라 작곡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으나, 오페라는 그에게 주변 장르였고 그가살아생전에 오페라의 성공을 체험한 것도 예외적 사건이었다. 이 밖에 <오랑캐 꽃>을 포함한 30여 곡의 가곡,18개의 피아노 소나타 · 3개의 론도 · 3개의 판타지 · 변주곡 · <네 손을 위한 소나타와 변주곡> ·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라장조 소나타> · <푸가 다단조> 등의 피아노곡과 현악 4중주 ·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6곡 등의 실내악곡,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 24곡 등이 있다. 41개의 교향곡으로 그는 마지막다작(多作)의 교향곡 작곡가가 되었다. 극도의 경제적곤궁 속에서 불과 6주 만에 완성된 그의 3대 교향곡(39번 · 40번 · 41번 '쥬피터' )은 주문도, 연주나 출판의 계획도 없이 작곡되었다. 그러나 이 걸작들은 모차르트의 슬픈 삶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특히 <교향곡 39번>(Es,KV 543)은 매우 평온하고 서정적인데, 이 교향곡은 작품의 성격과 질을 결정짓는 것이 삶의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면 곧 예술 정신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모차르트는 하이든, 베토벤(L. van Beethoven)과 함께 고전 시대를 대표하는 탁월한 가톨릭 교회 음악가였다.교회 음악에서 당대의 다양한 양식들을 혼합하였던 그가작곡한 20곡의 미사곡 가운데 <참새 미사곡>(KV 220,1775)과 <대관식 미사곡〉(KV317, 1779)은 유명하다. 후자는 4명의 독창자 합창 · 관현악으로 편성된 일종의 장엄 미사곡으로 성모에 대한 작곡가의 각별한 애정이 잘드러나 있다. 기리에(Kyrie)는 그의 오페라 <코지 판 룻테>(Cosi fan tuttte)의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아리아 <바위같이>(Come scoglio)에 인용되는데, 이는 교회적인 것을세속적인 것으로 바꾼 희귀한 예이다. 빈에서 쓴 유일한<다단조 미사곡>(KV 427, 1782/1783)은 <그레도>(Credo)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아뉴스 데이>(Agnus Dei)도 없다.
<레퀴엠>은 어두운 라단조 음색과 반음계적 선율 · 화성 진행으로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다. 자주 나타나는 폴리포니 부분들과 기리에의 이중 푸가(Fuga)는 팔레스트리나로 소급되는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 양식이자 독일바로크의 전통 언어였다. 모차르트의 후기 작품을 성격짓는 이 옛 교회 양식은 모차르트의 오랜 관심사였는데,이는 그가 이미 1770년에 마르티니 신부(G.B. Martini)가주도하였던 대위법 양식의 '교회 음악 협회' (AccademiaFilarmonica)에 시험을 치르고 가입하였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레퀴엠>을 주문한 발제크 백작의 재촉에 자기 죽음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모차르트는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예술가의 죽음으로 준비하고자하였다. 그러나 부속가의 끝 부분 "눈물의 그날" (La-crimosa diees illa)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이작품은 제자인 쥐스마이어(F.H. Süssmayer)에 의해 스승의스케치와 관례를 따라 첫 기리에를 끝 부분에 다시 사용함으로써 완성되었다. 죽은 이를 위한 이 장엄 미사곡은그가 몸담았던 가톨릭 교회 음악의 전통과 전례 순서를충실히 따르며 그의 신앙을 음악적 성숙함으로 표현한것이었다.
모차르트는 또한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위한 모테트 <참 육신으로 나신 몸>(Ave Verum Corpus, KV618, 1791)을 작곡하였고, 이 모테트는 당시 성서 낭독후의 화답송 또는 그레도 이후 봉헌 성가 때에 연주되었다. <기뻐하라>(Exultate, KV 165, 밀라노, 1773)는 소프라노 가수 라우치니(Rauzzini)를 위해 라틴어 가사로 쓴 이탈리아식의 솔로 칸타타로 2곡씩의 아리아와 레치타티보, 종결 알렐루야로 구성되어 있다. 베스페레(Vespere,저녁 기도)는 5개의 시편과 마리아의 노래(Magnificat)로구성되는데 성무 일도에서 분리시켜 공개적으로 거행되었기 때문에 때때로 다성 음악으로 작곡되었다. 모차르트는 이를 위해 <주일 베스페레>(KV 321, 1779)와 <고백자의 장엄 베스페레>(KV 339, 1780)를 썼으며, <라우레타니아 리타니아〉(KV 195, 1774)와 <성체 리타니아> 등4개의 리타니아(Lianiae, 호칭 기도)를 다성 음악으로 작곡했다. <성체 리타니아>의 두 번째 곡 '생명의 빵' (Panisvivus)은 후에 <레퀴엠>의 '나팔 소리' (Tuba mirum)에 다시 사용되었다. 모차르트는 전례용 기악 음악도 작곡했는데, 2곡의 교회 소나타(KV 241, 1776 ; KV 278, 1777)가그것으로 바로크 트리오 소나타의 편성에 따라 단일 악장으로 작곡하여 화답송 때에 연주되었다.
〔평 가〕 모차르트의 작품들은 그가 죽은 후에 재평가 되었다. 그의 작품들은 예술보다 생활을 앞세우거나 생활을 위하여 예술을 버리지 않았던 그의 승고한 예술 정신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에게 예술은 곧 삶이고, 삶은 바로 작품이었다. 때문에 온갖 속박을 거부한 모차르트가 자유 예술가로서 겪어야 했던 역경들은 그의 창작열을 고취시키고 그를 보다 내면의 세계로 침잠하게 하여그로 하여금 존재의 깊숙함에서부터 새로운 음악을 창작하도록 하였다.
모차르트는 천재 음악가였다. 예민한 청각, 비범한 기 억력, 핵심에 대한 직관적 파악 능력, 탁월한 상상력 등 어려서부터 나타난 그의 천재성은 소위 '머리 속 작곡'이라는 그의 독특한 창작 관습이 완성될 때까지 쉼 없는 고뇌와 노력으로 닦아졌다. 그의 편지에는 "나는 음악속에 빠져서 살고 있다. 나는 온종일 음악만을 생각하고고민하며 연주하고 숙고한다"(1778)고 적고 있고, 또"나는 부리나케 써야만 한다. 내 머리는 이미 작곡을 끝낸 곡들로 가득하다"(1780)고 쓰여져 있다. 작품 창작을머리 속에서 완전히 끝내는 이 별난 작곡 방법은 200년후 레거(M. Reger)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부단한 자기 훈련을 전제로 한다. 모차르트는 머리 속에서 완성시킨 작품을 시간이 날 때 정서하여 연주 가능한 작품으로만들어 냈다. 현대의 모차르트 연구는 그가 단 한 곡도 먼저 스케치하지 않고는 작곡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그러나 그의 스케치는 베토벤이나 다른 작곡가들의 연구스케치와 달리, 머리 속 작품을 짧게는 한두 시간, 길게는 몇 주 동안 기보(記譜)하는 과정에서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일종의 기억 스케치였다. 예컨대 오케스트라 총보를 한두 줄의 5선보에 압축하는 식으로 대략적인 윤곽만을 속기한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근본적으로 단순하고 자연스럽다.특히 선율에서 부각되는 이 특성은 모든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는 음악을 써야 한다는 그의 보편적 음악관에서비롯된다 할 수 있다. 그는 '이해의 선' 안에서 감정과이성,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통해 자신의 음악을 시대를초월한 고전 음악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낙관주의와 계몽주의라는 18세기의 시대 정신과도 관련된다. 낙관주의는 생을 긍정하는 종교적 힘으로 그의 음악에 표현되고, 봉건주의적 · 절대주의적 옛 질서를 붕괴시킨 계몽주의는 그가 쇠퇴하는 귀족 문화에서 벗어나 익명의 대중을 위해 창작하고 연주하도록 요청하였다. 모차르트의 교회 음악이 갖는 광채와 내면성 그리고 따뜻함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의 작품은 1862년 쾌헬(Köc-hel)에 의하여 정리되었고(약어 KV는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를의미한다), 전집은 라이프치히에서 1876년부터 1905년까지 69권이 발간되었으며, 새로운 전집은 잘츠부르크와 카셀에서 1955년부터 발간되고 있다. (-> 가톨릭 음악)
※ 참고문헌 조선우 · 홍정수, 《음악은이》 I~I II , 세광음악출판사, 1990~1991, pp. 389~393, 398f, 418f, 430f/ F. Blume · F. Lippmann,《MGG》 pp. 699~839/ S. Sadie, 《NGDMM》 12, pp. 680~7521 W. Gurlitted., Riemann Musik Lexikon, Personenteil 2, Schott's Söhne, 1961, pp.266~276. 〔趙善字〕
((Reference en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1756~1791)
Mozart, Wolfgang Ama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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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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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