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동 본당

牧洞本堂

글자 크기
4
1943년 당시의 김유룡 주임 신부와 본당 신자들.
1 / 4

1943년 당시의 김유룡 주임 신부와 본당 신자들.

대전교구 소속 본당. 대전시 중구 목동 96-3 소재. 1919년 11월 12일에 설립된 대전 지역 최초의 본당으로 설립 당시의 명칭은 대전 본당(대전교구 주교좌 본당인 대흥동 본당의 전신이기도 함)이었으나, 1945년 10월부터프란치스코 수도회 관할이 되면서 목동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주보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관할 구역은 중구목동, 용두2동 전역과 용두1동, 중촌동 일부. 〔교 세〕 1921년 829명, 1959년 702명, 1965년 1,624명,1972년 2,009명, 1978년 1,871명, 1983년 1,987명,1988년 2,089명, 1991년 1,949명, 1994년 1,991명.〔역대 신부〕 초대 이종순(李鍾順) 요셉(1919.11~1923.5),2대 루블레(H.P. Rouvelet, 黃惠中) 헨리코(1923. 5~1927.10), 3대 폴리(D. Polly, 沈應榮) 데시데리오(1927~1930),4대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1930~1932), 5대 콜라르(R. Collard, 갈성렬) 라파엘(1932~1934), 6대 멜리장(P.Mélizan, 梅履霜) 베드로(1934~1939), 7대 코르미에(P.Cormier, 高) 베드로(1939~1941), 8대 김유룡(金裕龍) 필립보(1941~1944), 9대 오기선(吳基先) 요셉(1944. 12~1945. 10), 임시 코르미에(1945. 10~1946), 임시 로지에(A.Rosiers, 노) 아쥬톨(1946~1947), 임시 벨로즈(J. Bellerose,裵 유스티노(1947~1949), 임시 카다스(J.Cadars, 姜達淳)요셉(1949~1950. 7), 10대 안선호(安仙鎬) 베다(1958. 5~1959. 1), 11대 콩트와(A. Comtois, 공아영) 안드레아(1959. 1~1964.6), 12대 베젤리스(L. Vezelis, 박) 루도비코(1964. 6~1967. 5), 13대 콩트와(1967. 5~1971. 10), 14대베이티아(J. Beitia, 배의태) 요셉(1971. 10~1977. 1), 15대강효식(姜孝植) 야고보(1977. 1~1982.4), 16대 권용희(權龍喜) 도미니코(1982. 4~1985. 5), 17대 모린(L. Morin, 명일중) 레오나르도(1985. 5~1988. 2), 18대 최병철(崔炳喆)아우구스티노(1988. 2~1994. 2) , 19대 무르구수르(J.Murguzur, 문요섭) 요셉(1994.2~현재).
〔공소 시대 및 본당 신설〕 대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1913년 12월대전 지역의 신자 3명이 옥천 본당에 와서 당시 주임으로 있던 이종순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았던 것으로 보아1913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이종순 신부는 대전 지역의복음화를 위해 1915년 10월 말에 대전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후 1919년 초 외남면 방축리(外南面 方丑里)에9,220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그 해 11월에 이곳에 있던한옥을 수리하여 대전 본당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봄부터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5월 이전에 임시 성당이완공되었으며, 초창기에는 예비자가 거의 없었을 뿐만아니라 가난한 신자들이 생업을 찾아 타지로 전출하는현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뚜렷한 교세 증가 추세는 없었다. 2대 주임 루블레 신부 재임기 동안 교세가 확장되면서 1927년 3월에 새 성당(현 목동 96-2번지)을 건립한후 파리 외방전교회 및 교구 소속 사제들이 주임 신부로부임하였으나, 해방 무렵까지 실질적으로 큰 발전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성장과 변모〕 8· 15 광복과 함께 신자수가 급증하자 당시 주임 오기선 신부는 본당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해도심지로의 이전을 계획하였다. 이미 1937년에 대전에진출했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대전 본당 옆에 수도원을 건립하고 이듬해 대흥동에 부지를 매입하여 대흥유치원을 운영하다가 폐쇄 상태에 있었는데, 오기선 신부는 이 수도회와 협의하여 대흥동 부지와 대전 본당 부지를 상호 매매 형식으로 교환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10월 7일 대전 본당이 대흥동의 임시 성당으로 이전하면서 목동 본당은 수도회 소속의 준본당이 되었다.
6 · 25 동란으로 당시 주임 카다스 신부가 그 해 7월공산군에 의해 체포된 후 9월경 피살된 후 1958년 4월까지 본당이 폐쇄되는 시련을 겪었으나, 1958년 5월에대전 역과 도청을 기점으로 북쪽 지역을 관할하는 정식본당이 되었다. 1960년 무렵에는 환등기와 오디오 테이프의 시청각 교재를 이용한 교리 교육 프로그램을 본당에서 자체 개발하여 이 교리 교육에 매회 600~700명의신자 및 예비자가 참석하는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해마다 100여 명의 영세자를 배출하였는데 이 가운데는 개종자만도 20~40명에 달하였다. 그 결과 1960년대 전반기 동안 신자수가 배가해 본당 내 단체들이 이용할 회합실이 부족하게 되자 1962년 4월 4일 강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그 해 8월 29일 총건평 170평 규모의 2층강당을 완공하였다. 또한 1966년 3월에는 '호수(護守)유치원' 을 설립하여 대전 지역 천주교 유아 교육 사업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성당 증축 및 발전〕 그 동안 사용해 오던 성당 건물이노후되어 잦은 보수 공사에도 불구하고 문제점들이 발생하자 1970년 8월 16일 현 본당 소재지에서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71년 5월 8일에 165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옛 성당은 1967년 대전에 진출한 '거룩한 말씀의회' 에 이관하였다. 그 후 대전 지역의 교세가 점차 확장됨에 따라 1973년 9월 30일에 유천동(柳川洞) 본당,1977년 2월 7일 괴정동(槐亭洞) 본당, 1980년 8월 27일 대사동(大寺洞) 본당, 그리고 1985년 3월 4일에 태평동(太平洞)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으며, 1990년 3월12일에는 관할 구역 조정에 의해 중촌동 일부 지역의 신자 411명의 교적을 선화동(宣化洞) 본당으로 이관시켰다. 한편 1980년에는 기존의 레지오 마리애 11개 쁘레시디움 가운데 7개를 구역별로 재편성하여 활동의 조직화를 꾀하였으며, 청양(靑陽) 본당과 자매 결연을 맺어친선을 도모하였고, 1985년에는 신자들의 신심 강화를 위해 네 차례에 걸쳐 종교 영화를 상영하였으며, 연중14차례에 걸쳐 각 단체별로 성지 순례를 하였다.
지방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989년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주변 도시로부터 인구 유입이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신자수 증가로 인해 주일학교 교리실이 부족해지자 교육관 건립 문제가 대두되었다. 하지만 교육관 건립보다는 성당 신축이 더 시급하였기 때문에 1990년 3월 25일 공사에 착수하여 이듬해 11월 10일 현 본당 소재지에 총 524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성당을 완공하고, 옛 성당은 교육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본당내 단체로는 성소 후원회, 주일학교 후원회인 데레사회, 성모회, 안나회, 대건회, 신우회, 연령 기도회와 기타 여러 단체들이 있다. 특히 1994년 4월 6일에 발족한 빈천시오 아 바오로회는 거택 보호자들에게 정기적인 도움을주는 것 외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지급하거나 자녀가 없는 신자 가정에 고아를 입양시키는 등 다방면에 걸쳐 사랑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 대전본당 ; → 대전교구 ; 대흥동 본당 ; 프란치스코 수도회)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천주교 대전교구 편, 《대전교구 30년》, 대전교구 홍보국, 1988/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대전교구 교세 통계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옥천 본당사 편찬위원회 편, 《옥천 본당사》 上, 천주교 청주교구 옥천교회,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 대전교구 홍보국 역편,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서한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5/ 오기선, 《순교자들의 얼을 찾아서》 상, 한국 천주교 성지 연구원, 1988/ 《경향잡지》 1107호(1960. 6), 1110호(1960. 9), 1113호(1960. 12), 1118(1961. 5), 1127(1962.2). 〔편찬실〕
((Reference 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