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천주교를 배척하는 데 앞장선 남인(南人) 여와계(餘窩系)의 중심 인물.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유선(幼選). 호는 여와(餘窩). 숙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목천성(睦天成, 1630~1687)의 증손이며,부친은 조우(祖禹). 1759년(영조 35) 문과 별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탕평 정국 아래서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1782년(정조 6)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노론 세력에 밀려 일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자그와의 의리를 지키지 않고, 아들 목인규(睦仁圭)와 함께 채홍리(蔡弘履), 홍수보(洪秀輔) 계열에 가담함으로써 기호 남인(畿湖南人)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이후 그는 1786년(정조 10) 도사(都事)로 있으면서 다시 문과중시에 장원 급제하여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으나, 1789년 태산(泰山) 현감으로 재임하던 중에 불법을저질러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목만중이 천주교를 비판하고 남인 안에서도 천주교와관련이 깊은 친서계(親西系)의 인물들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은 홍낙안(洪樂安) 이기경(李基慶) 강준흠(姜浚欽 , 성정진(成鼎鎭) 등과 함께 여와계를 형성한 다음부터였다. 특히 1784년에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그문제가 재야와 조정에서 거론되기 시작하자 여와계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벽사위정(闢邪衛正)의 입장을 고수하였고, 1787년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용(丁若鏞,요한) 등이 천주교 서적을 강습하다가 발각된 이른바 반회(泮會) 사건이 다음해 홍낙안의 진술로 조정에 알려지게 되자 친서계 인물들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공서계(攻西系)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목만중은1795년 중국인 주문모(周文謨, 야고보) 신부가 입국한사실이 알려지자 재야에서 소북(小北)의 박장설(朴長卨)을 사주하여 천주교 배척 상소를 올리게 하였으며,노론의 편에 서서 정치적으로 남인 친서계의 인물들을 공격하였다.
1797년 목만중은 승지(承旨)로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반면에 천주교의 3흉(三兇)으로 지목되어 온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 · 정약용은 1795년 이후 정치적 입지를 위협받고 있었고, 이들과 가까웠던 채제공 또한 반대파들의 공세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채제공에 이어 정조가 사망하고 순조가 즉위하게되자, 이듬해인 1801년(순조 원년) 초부터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 각처에서 신자들이 체포되고 친서계의인물들은 정치적으로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목만중은 노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배척해 온 인물이라 하여 대사간(大司諫)이 제수되었는데, 이를 기화로남인 안에서는 4흉 8적(四兇八賊)의 논의를 통해 목만중의 공서계와 정약용의 친서계가 서로를 비판함으로써남인의 입지가 점점 어려워지게 되었고, 결국 박해 과정에서 친서계가 정치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목만중은그 후에도 계속 정계에 머무르다가 1807년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유저로 《여와문집》(餘窩文集) 16권 9책이 전한다. (-> 남인과 천주교)
※ 참고문헌 《正祖實錄》 《國朝榜目》 《闢衛編)李基慶 편 및 李晚采 편) 《餘窩文集》필사본), 奎章閣 소장/ 洪時濟, 《訥菴記略Ⅹ필사본), 切頭山殉教記念館 소장/ 洪以燮, 〈闢編 纂集者 李基慶의傳記資料 姜浚欽纂 弘文館校吏李公墓誌銘의 紹介〉, 《崔鉉培先生還甲紀念論集》, 思想界社, 1954/ 朴光用, 〈朝鮮後期 蕩平 研究>,서 울大學校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4/ 車基真, 〈星湖學派의 西學認識과 斥邪論에 대한 연구>, 韓國精神文化院 韓國學大學院, 1996.〔車基真〕
목만중(1727~?)
睦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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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목만중이 1801년에 대사간으로 제수되면서 받은 교지와 호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