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말기의 이탈리아 작곡가. 태어난 날짜는 불 분명하지만, 1567년 5월 15일 크레모나(Cremoa)에 있는 철소의 성 나자로(St. Nazaro e Celso)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가문 이름에 대해서도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세례 대장에는 모드베르도(Modvero), 그의 첫 번째 출판물에는 몬테 베르데(Monte Verde) 혹은 몬스비리두스(Monsviridus), 생존시의 많은 인쇄물에는 몬테베르데(Monteverde) , 그리고 그의 편지 끝에는 '몬테베르디' 로 서명되어 있다.의사인 아버지 발타사르(Balthasar)와 어머니 막달레나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크레모나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정확한 기록은 없고, 다만 몇 년 동안인제네리(M.A. Ingegneri)의 강의를 즐겨 들었다는 것만전해진다. 1582년 발간한 《칸시운쿨레 사크레》(Cantiun-culae Sacrae) 책 표지에 스스로를 '인제녜리의 제자' 라고처음 표기하였고, 그에게 수업을 받던 때 출판한 다른 네권의 책에도 이렇게 표기한 것으로 보아 그는 8~10년동안 인제네리에게 수업을 받은 것 같다. 그는 이 시절에무반주 합창곡들을 담은 《마드리갈》(Madrigal) 제1권(1584), 제2권(1587), 제3권(1590)을 펴냈으며, 1591년만토바(Mantova)의 곤자가(V.I. Gonzaga) 공에 의해 현악연주자의 일원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배움은 끝이 난 것으로 여겨진다.
〔만토바 시기〕 밀라노 주교좌 성당의 폰치오스(P. Pon-zios)의 뒤를 이어 성음악 감독이 되려다 실패한 경험이있는 몬테베르디는 만토바에 정착하여 1594년에 성가대지휘자가 되었고, 1595년에는 궁정 가수 클라우디아 카타네오(Claudia Cattaneo)와 결혼하였다. 그는 두 아들을두었는데, 후에 가르멜 수도회의 수사가 된 프란체스코는 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테너 가수로도 활동했고, 의학 박사였던 마시밀리아노는 한때 이단으로 고발되어 체포되었다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오랜지병 끝에 1607년 9월 10일에 부인 클라우디아가 사망하자, 몬테베르디는 재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다가 말년에는 성직자가 되었다.
만토바 재직 초기부터 인정을 받아 1595년의 만토바군대 출정 때에는 곤자가 공을 수행하여 인스브루크, 린츠, 프라하, 빈, 헝가리의 도나우 강을 돌아보았으며,1599년 플랑드르 지방 수행 때에는 오늘날의 벨기에에속하는 주요 도시들을 많이 방문하였다. 브뤼셀(Brussel)) ,안트베르펜(Antwerpen) 등지에서 프랑스 플랑드르 악파의 음악가들과 만난 몬테베르디는, 이때 프랑스식 음악(Canto alla francese)을 알게 되었고, 《마드리갈》 제4~5권을 펴낸 것도 이즈음이었다. 1601년 만토바 궁정의 악장이 된 몬테베르디는 교회 음악은 물론 세속 음악에서도 최고의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보수적인 형태의 음악을 주장하는 아르투시(G.M. Artusi)가 그의 마드리갈들을비난하자 그와 크게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논쟁을 거치면서 그가 창출한 제2 작법(Seconda Pratica)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극음악을 위한 신예술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의 음악을 제1 작법(Prima Pratica)이라고 한다면, 제2 작법의 차이점은 시적(詩的)인 언어에이를 해석하는 음악이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1582년이래의 교회 음악곡집, 모방 미사곡(Missa, In illo tempore)1곡, 1610년에 발표한 <복되신 동정녀 축일 저녁 기도>(Vespero della Beata Vergine) 등에서는 네덜란드식의 다성음악과 피렌체식의 서창(敘唱) 형식이 서로 종합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오르페오>(Orfeo, 1607)를 시작으로 1608년에는 비극 오페라인 〈아리아나)(Ariana)와 무용 오페라인 <무례한 자들의 무도회>(Ballo dell Ingrate)를 발표하였다.
〔베네치아 시기〕 곤자가 공을 승계한 큰아들 프란체스코 4세(Francesco Ⅳ)에 의해 1612년에 해고당한 몬테베르디는 고향으로 돌아와 좌절 속에서 지내다가, 이듬해베네치아의 성 마르코 대성당 성음악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마침내 그의 황금기인 베네치아 시대를 맞게 되었다.악단은 30명이 넘는 가수들과 20명이 넘는 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몬테베르디는 이곳에서 30년동안 봉직하면서 많은 작품들을 썼을 뿐만 아니라 가수들과 연주자들의 질적 향상에도 전력을 다하여 악단을옛 전성기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만토바의 프란체스코 4세가 전염병에 걸려 직위를 내놓자 그의 동생페르디난도 곤자가(Ferinand Gonzaga) 추기경이 궁성을다스리게 되었다. 그도 처음에는 몬테베르디와의 관계를무시하였으나 1615년 이후에는 그에게 새로운 무대 작품들을 의뢰하여 1630년까지 10편 정도의 오페라나 발레곡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1630년의 만토바 약탈 때거의 다 소실되고 말았다.
1627년 만토바를 다스리던 빈천초 2세(Vincenzo Ⅱ )가 죽으면서 일어난 만토바의 계승권 전쟁, 1630년 합스부르크 군대에 의한 만토바 약탈, 베네치아에서의 16개월에 걸친 페스트 창궐이 지나가자 이를 감사하는 대미사가 1631년 11월 28일 성 마르코 대성당에서 봉헌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거치면서 마음에 큰 동요를 느낀 몬테베르디는 깊은 영적인 안정을 갈구하게 되어 1632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1614년에 《마드리갈》 제6권, 1619년에는 제7권, 그리고 1638년에는 제8권을 펴냈으나 이 시기에 쓴 그의오페라들은 다 소실되었다. 1637년 베네치아에 처음으로 시민 대중을 위한 오페라 극장(Teatro San Cassiano)이세워지면서 4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그 가운데<율리시스의 귀국>(Ⅱ ritorno d'Ulise, 1640)과 <포페아의대관>(L'Inoronazone di Poppea, 1642)만이 남아 있다. 베네치아 오페라의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던 이 시기의 그의 오페라들은 폴라롤로(C.F. Pollarolo, 1653~1722)와 헨델(G.F. Händel, 1685~1759)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또 이때 그는 베네치아에서 만든 교회적 · 세속적 작품들의 목록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크레모나와 만토바를 방문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온 몬테베르디는, 1643년 11월 29일 사망하여 프라리(Fran) 성당의 성 암브로시오 무덤 경당에 묻혔다.
〔평 가〕 그의 음악은 크게 마드리갈과 오페라와 교회 음악곡으로 구분되는데, 그의 음악 저변에 흐르고 있는사상은 아르투시와의 논쟁에서 얻은 제2 작법 이론에 따라 '언어가 음악의 주인이지 결코 심부름꾼일 수는 없다' 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가사에 따른 극적인 표현이 풍부하게 흐르고 있다. 교회 음악과 관계된 작품으로는 5개의 미사곡과 독창곡부터 합창곡까지 188개 의 성악곡이 있으며, <복되신 동정녀 축일 저녁 기도>는매우 유명하다.
※ 참고문헌 Die Musik in Geschichte und Gegenwart DeutscherTaschenbuch Verlag, Barenreiter Verlag, 1989/ The New Grove Dictionary ofMusic and Musicians, Macmillan Publisher, 1980. 〔白南容〕
((Reference en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 (1567?~1643)
Monteverdi, Claudio
글자 크기
4권

몬테베르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