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승들의 요람지. 이탈리아 중부,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위치한 라치오의 카시노시에 있는언덕. 수비아코(Subiaco)를 떠난 베네딕도 수도회의 창립자 성 베네딕도(St. Benedictus, 480?~550?)는 529년경 나폴리의 북서쪽에 있는 이곳 카시노 산에 수도원을 세웠 는데, 이 자리는 훗날 베네딕도의 제자가 된 플라치도 (Placidius)의 아버지인 로마의 지방 집정관이 선사한 곳이었다. 베네딕도는 이곳에 있던 로마 신전 자리에 성당을 지어 투르의 성 마르티노에게 봉헌하였고, 신전 제단자리에 또 하나의 성당을 지어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하였다. 그리고 그는 540년경에 이곳에서 《수도회 규칙서》를 작성하였으며, 그 후 그의 쌍둥이 여동생 스콜라스티카(Scolastica) 성녀와 함께 세례자 요한 성당의 지하묘지에 묻혔다.
6~12세기 : 581년경 롬바르드족의 침략으로 몬테카시노가 파괴되자 수도승들은 로마의 라테란 궁전 근처로 피신하였고, 약 140년 동안 그곳에서 머무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도움으로성 베네딕도의 정신은 이어 갈 수 있었지만, 베네딕도가추구하였던 수도회 생활을 실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후 몬테 카시노는 717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의 요청에 의하여 브레시아(Brescia)의 갑부인 페트로낙스(Petronax)에 의해 복구됨으로써 유럽 수도원의 모범이 되었으며, 성 보니파시오(St. Bonifacius)의 혈족으로 앵글로 색슨 수도승인 빌리발트(Willibald)는 729년에 이곳으로 순례를 온 후 739년 아이히슈태트(Eichstätt)의 주교가 되어 떠날 때까지 12년 동안 이곳에서 수도승으로 머물기도 하였다. 또 그레고리오 3세 교황과 자카리아 교황은 수도원의 복구를 후원하였고, 풀다(Fulda)의 초대 대수도원장인 스투르(Sturmi)는 "규칙의 실천을 장려하였으며", 보니파시오는 페트로낙스의 계승자인 옵타토
(Optatus)에게 몬테 카시노에 머물러 있도록 허락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특히 자카리아 교황은 몬테 카시노를 면속 수도원(Abbatia nullius)으로 지정하면서 이 수도원이교황의 많은 특권들 중 으뜸이며 오직 교황에 의해서만통제를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8세기 중반에는 베네벤토(Benevento)의 지술프 2세(Gisulf II ) 공작이 영토를 기증함으로써 수도원이 확장되었으며, 787년에는 카알 대제가 몬테 카시노를 방문하여 특권을 수여하고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회 규칙서》를 자신의 영토에서 표준 문서로 사용할 수 있도록요청하였다. 그 후 그의 친구이자 협조자인 롬바르드족의 역사가 바오로 부제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또 성 요한 성당을 세 개의 회중석이 있는 대성전으로 변형시킨지술프(Gisulf, 797~817) 수도원장은, 언덕 기슭에 성당을세워 구세주에게 봉헌하고 그 옆에 또 다른 수도원을 건립하였다.
883년에 사라센족의 침입으로 수도원장 베르타리오 (Bertharius)가 살해되자 수도승들은 테아노(Teano)로 또다시 피신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만 베네딕도의 친필 규칙서를 화재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914년에는 다시 카푸아(Capua)로 피신하였지만, 카푸아 공작들의 압박을받자 아가비도 2세(946~955) 교황은 수도원장 알리제르노(Aligernus, 949~986)에게 수도승들과 함께 몬테 카시노로 돌아가 그곳을 복구하도록 하였다. 계속되던 카푸아의 영향력은 테오발트(Theobald, 1022~1035)가 수도원장으로 선출되면서 끝이 났고, 몬테 카시노는 하인리히 2세 황제에 의해 관리되었다.몬테 카시노는 테오발트와 리처(Richer, 1038~1055) 수도원장의 재위 기간 동안 부흥되기 시작하여 수도원의재건을 지시한 데시데리오(Desiderius, 1058~1087) 때에는절정에 이르렀으며, 오데리시오 1세(Oderisius I , 1087~1105) 때까지 재건은 계속되었다. 몬테 카시노의 수많은수사들 가운데 스테파노 9세(Stephen IX )가 된 로렌(Lorraine)의 프레데릭(Frederick) , 빅톨 3세(Victor Ⅲ)가된 데시데리오, 젤라시오 2세(Gelasius II ) 등은 교황이되었으며 다른 많은 수사들은 교회로부터 최고의 지위를얻었다.
13~20세기 : 몬테 카시노는 오데리시오 1세 이후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노르만의 통치자들만이 아닌 독일의 계승자들도 수도원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아 수도원은불가피하게 남부 이탈리아의 소유 투쟁으로 고통을 받게되었다. 또 교황 요한 22세(1316~1334)가 수도원의 대성전을 주교좌 성당으로 바꾸고 수도원장을 주교의 지위로 격상시키자 그들 중 대부분이 재위 기간(1322~1365) 동안 수도원에 거의 거주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불행이시작되었다. 1349년 9월 9일 지진으로 인해 데시데리오의 수도원이 파괴되자 베네딕도 수도회 회원인 교황 우르바노 5세(Urbanus V , 1362~1370)의 지시에 의해 1357~1362년에 재건립되었으며, 1454~1504년에는 교황추천을 받은 대수도원장들에 의해 운영되기도 하였다.몬테 카시노는 1504년에 파두아(Pada)의 성녀 유스티나의 베네딕도회와 통합하면서 평화와 번영을 누렸는데, ,그때는 '파두아의 성녀 유스티나와 다른 카시노 수도회'(Congregatio Casinensis allias S. Justinae de Padua)라고 불렸다. 그 후로 수도원장들의 임기는 짧았지만 16~17세기동안 몬테 카시노의 성당과 수도원이 새로 지어졌고,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의 프레스코 벽화와 네아폴리탄 바로크 양식 최고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새 성당이1727년에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봉헌되었다. 수도원의 탁월한 학자들 가운데에는, 《몬테 카시노 연대기》(Chronicle ofMonte Cassino, 1668)의 편집자였던 노체의 안젤로(Angelo della Noce, ?~1691)와 박학한 기록 보관원이자 수도원의 역사가인 에라스모 가톨라(Erasmo Gattloa,1662~1734)가 있다.
나폴리 왕국의 멸망과 종교 건물의 징발과 더불어 몬테 카시노는 1866년에 이탈리아 국가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처음에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싸웠던 역사가 토스티(Luigi Tosti, 1811~1897) 수도원장은, 1870년 이후부터는 교회와 국가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때 학문은 번영을 이루었고 중요한 간행물들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몬테 카시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의해 점령되어 1944년 2월 15일 연합국의 항공 폭격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이때 수도승들과 보물들을 옮겨 놓았던 독일군은 폭격 후 재점령하고 이곳을 요새화하였으나, 5월 18일에 독일 전선이 무너지면서 폴란드 군대에의해 점령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레아(Ildefonso Rea) 수도원장은 이탈리아 정부가 제공한 기금과 수도회 자체의적극적인 협력으로 본래의 자리에 수도원을 재건하였다.세밀한 부분 장식들의 복구는 거의 불가능하였지만, 콘스탄티노플에서 데시데리오 원장을 위해 1066년에 주조한 청동문들은 이때 발견되어 복구되기도 하였다. 한편1964년 10월 24일, 문서 보관소, 도서관 등을 갖춘 몬테 카시노를 축성한 교황 바오로 6세는 성 베네딕도를유럽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 베네딕도 ; 베네 딕도회)
※ 참고문헌 H. Bloch,《NCE》, PP. 1080~ 1082/ C.E. Smith, 《CE》 7, pp. 328~3291 V. Redlich, 《LThK》 7, pp. 582~584/ R. Gazeau, 《Cath》, pp. 592~594. 〔편찬실〕
몬테 카시노
〔이〕Monte Cass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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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 카시노 언덕 위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