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 테오도르 Mommsen, Theodor(1817~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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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르 몸젠.

테오도르 몸젠.

독일의 역사학자. 법학자. 언어학자. 그의 저작들은 전통 고대 학문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기원의 역사와 관련된 문제들에 접근하였다. 그는 로마법에 대한 놀라운 인식, 각종 금석학(金石學) 자료의 수집, 사학과 연대기학의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었으며, 이는 더 이상 어떤 것을 추가하는 것이 불 필요할 정도였다.
〔생 애〕 1817년 11월 30일 슐레스비히(Schleswig) 지방의 가르딩(Garing)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38~1843년 알토나(Altona) 대학과 키일(Kiel) 대학에서 역사 · 철학 · 법학을 공부한 후, 1844~1847년 베를린 학술원의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연구를 했다. 독일로 돌아와서 발표한 첫 번째 저작 덕분에 1848년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가 된 그는, 시(詩)와 정치 때문에 일생 동안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과학적 갈등 속에서 비타협적인 신랄함을 나타내며 자신의 자유주의적 의견을 옹호하였기 때문이다.
1849년 5월 작센에서 일어난 봉기에 가담하였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될 뻔했던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해임되자 1852년 취리히(Ziinch)로 옮겨 법률학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854년에는 브레슬라우(Breslau)로, 또 베를린으로, 다시 라이프치히로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1858년에 프로이선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1861년에 비로소 베를린 대학교 고대사 교수가 되어 정착하였다. 그는 독일을 열광시키며 반향을 일으켰던 명예 훼손 재판에 비스마르크(Bismarck)와 함께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았으나 곧바로 특사(特赦)되었고, 1874년부터는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의 종신 서기가 되었다. 파리의 금석학 · 문학 아카데미에서는 그를 외국인 협조자로 선출하였는데, 이후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태두(泰斗)가 되었고 동시대인들에게는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 특히 1861년에 그가 베를린 대학 교수가 된 것 은 그의 대학 교수로서의 경력을 인정받는 것이었으며, 독일의 고대 그리스, 로마 연구자들 중에서 그의 탁월함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아 1873~1879년에는 프로이선 연방 의회 의원, 1881~1884년에는 독일 제국 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브레슬라우에 있을 때 서적상의 딸 라이머(M. Leimer)와 결혼하여 16명의 자녀를 두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였던 몸젠은, 1903년 11월 1일 베를린 근교의 카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에서 사망하였다.
〔연구와 저술 활동〕 몸젠이 관심을 갖고 있던 연구의 범위는 폭 넓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저작 역시 수적으로 엄청난 양이었는데, 각종 서적과 논문 및 학회 발표문을 합쳐 1,200편 이상의 간행물을 남겼다. 그의 연구 목록은 1887년 창마이스터(C. Zangmeister)에 의해 정리 · 보완되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많은 글 중에서 교회사 연구에 관련된 것은 소수에 불과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오히려 거의 저술하지 않았기 때문
이다.
그가 1943년 11월 8일에 발표한 그의 첫 학문적 저작이라 할 수 있는 박사 학위 논문은 공법(公法)에 관련된 주제였으나, 그 이듬해부터 발표된 것들은 그의 박사 논문과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었다. 그러나 그 후부터 그가 말년까지 보유했던 법학자로서의 입지를 표명하는 것은 가능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그의 마지막 주제는 법률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사망하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도 출판을 준비하였던 주제는 로마 형법론이었기 때문이다. 몸젠은1871년에 《로마 헌법》(Römisches Staatsrecht)을 발표함으로써 이른바 석학으로서의 명성을 확보하였으며, 아울러 이 책은 그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그는 또한 라틴어 금석학 연구에서도 괄목할 만한 연구를 하였으며, 1845년부터는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던 《라틴어 명문(銘文) 전집》(Corpus inscriptionum Latinarum)을 만들기 시작하여 매년 그 결과를 여러 권의 책으로 출판하였다. 금석학 연구를 위한 여행 중에 몸젠은 방언이나 이탈리아에 살던 고대 민족의 언어인 오스커어(Oscan language)로된 다수의 비명(碑銘)을 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이탈리아 언어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으나, 얼마 후 이를 포기하고 그의 본래 영역으로 돌아가 이를 확대하는 데 노력하였다.
몸젠의 순수한 역사적 저술은 전 3권으로 구성된 《로마사》(Histoire romaine)뿐인데, 그는 이 책을 '로마 제국치하에서의 이탈리아 역사' 라고 불렀다. 1854년, 1855년, 1856년에 각각 출간된 이 책에서 그는 순수 고전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몇 부분에서 강렬하고 대담한 문체를 사용함으로써 낭만적인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이 책은 일종의 설화(說話)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책이 저자가 말하려 했던 것이나 독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를 비난할 근거는 없다. 몸젠의 이 《로마사》는 미완성된 작품이지만 그의 가장 훌륭한 저작이라 할 수 있다. 《로마사》는 제3 권 체사르 시대에서 중단되었다. 30년이 지난 1885년에 제5권이 출간되었지만, 다른 나라와의 전쟁 설화가 혼합된 로마 제국 속주(屬州)들의 경제적 · 도덕적 · 정치적인 묘사에 불과하였다. 이 책에는 서방 각국에 대한 역사 서술은 제외되어 있으며, 로마나 이탈리아조차도 마치 황제들의 설화에 결부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다. 결국 이 책은 어떤 주요한 개념에 의해 동질성을 갖고 보다 충실하게 구성된 책은 아니지만, 몸젠은 그가 구현한 탐구들이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출간한 것 같다. 아마도 제국의 역사가 되었을 제4권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는데, 그는 결국 그 책을 완성하는 것을 포기하였던 것이 확실하다. 즉 그는 로마 제국이 가장 번성하였던 시기에 이르러 그 역사 저술을 포기한 것이다.
몸젠은 탁월한 자료 수집과 처리 능력을 갖고 고대 로마의 '통사' (histoire totale)를 구성하려 시도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당시까지 각기 분리되어 있던 여러 학문들을 상호 결합시켰다. 실제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통사를 구성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권위가 있는 고증학적인 책을 저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자료집도 출간하였다.
[학문적 특성〕 몸젠의 연구 업적과 저술의 양을 보면 그가 대단한 정력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지 정열적 흥분에서 작업을 하였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점은 몸젠이 위대한 통치자들을 위해지나치게 일반화시켰던 원칙이나 이론들을 발견할 수 있는 그의 《로마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니부어(B.G. Nie-buhr)의 《로마사》 (Römische Geschichte)와 비교해 보면, 이두 저작은 어느 순간 놀라운 발전을 하였던 독일적 사고와 반세기라는 간격을 둔 독일 국민의 변모를 보여 준다. 니부어에 의해 표현된 역사와 몸젠에 의해 언급된 역사 사이에는 상상으로부터 실제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차이가 존재한다. 몸젠은 니부어가 시작한 '비판적 사실주의' 에 의해 저술하였으나, 보다 엄격한 방법론으로 니부어를 능가하였으며, 이 작품으로 1902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전설은 더 이상 역사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제외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시되었다. 즉 몸젠은 "왜곡된 민족의 이름과 그들의 혼란한 전설들과 함께 우리에게 전해진 전통은 말라 죽은 나뭇잎들과 마찬가지의 것들로, 우리는 단지 그것들이 한때는 초록색이었다는 것만을 겨우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잎들을 흔들거리게 하는 바람소리를 들으려 우리의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라고 하였다.
몸젠의 문학적 이론 또한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고대 민족들의 시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으며, 시가 실제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국가적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또한, "시는 대중의 생활과 연결될 때 그 특색을 갖는다. 따라서 사람이 정치로부터 소외될 때 시는 삶의 숨결을 결여하게 된다" 고 강조하였다. 결국 몸젠의 판단으로 정치란 시를 위한 자료에 불과한 것이며, 그에게 있어서 정치는 항상 새로운 오락이었으며 매우 즐거운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반박을 배제하지 않는 일종의 통렬함으로 사건들이나 사람들에 대해 끊임없이 판단하였다.
몸젠은 강력하고 엄격하게 되기를 바란 권위의 신봉자였다. 그는 로마 제국의 초기 법률에 나타난 가족적 규율이나 종속 관례를 칭송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것들에서 그는 입헌 군주제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몸젠은 민주 정치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으며, 보통 선거제를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간주하였다. 의회는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가증스러운 제도이며, 위험한 순간에는 방어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몸젠은 체사르의 신봉자였는가? 사실상 그는 그것을 부인하였다. 체사르 신봉자라는 비난은 단어가 잘못 이해된 것으로 19세기 후반 당시 적용된 제도를 고려하지 않고 말하
기는 어렵다. 더구나 전제주의는 과거에도 존재하였던것으로 몸젠은 이 제도의 근대적 적용에 대하여 신랄한 비평을 하였던 것이다. 과거에 전제주의는 그 장점을 보유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렇지 않으며, 그 개별적 기호는 전체와는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으로, 만약 자유주의가 존재한다면 이 자유주의는 강력한 절대주의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권력이 발견되는 모든 것을 좋아하고 경탄하였으며 그것을 제안하였다. 반대로 나약함과 불행은 그에게는 역겨운 것이었다. 즉 그의 생각으로는 정복된 국가는 다만 사라질 뿐이며 그 역할은 이미 끝난 것이 된다. 그 국가가 훌륭하게 종말을 맺거나 그 종말을 지연시키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되는데, 이는 잃어버린 시간이며, 다른 것을 더 이상 유익하게 채택할 수 없게 하는 시간이며 노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학문 방법론은 대단히 독일적인 것으로, 정확하며 완벽하다. 그는 역사가로서 직접 정리하지 않았거나 접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나 자료를 가지고 그의 연구를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그는 과학적 입증을 위하여 어떤 자료도 소홀히 다루지 않았는데, 즉 연대기, 금석학, 언어학, 법학, 종교학, 민속학, 인류학, 문헌학, 고전학 등에 관련된 모든 자료들을 섭렵하였다. 이러한 모든 자료들로 이루어진 방대한 규모의 기획을 한 저작일수록 그의 자료 정리 능력은 거의 완벽하였다.
몸젠은 19세기 독일 역사가들 중에서 그의 강렬한 자유주의적 확신으로 인해, 또한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 통일에 대한 그의 감격 이후 점점 더 엄격해진 비판 덕분 에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역사)
※ 참고문헌  E. Frangois, Theodore Mommsen, A. Burguiere ed. Dictionnaire des Sciences historques, Paris, P.U.F. 1986/ H. Leclercq, Théodore Mommsen, Dictionnaire d'Archéologie chrétienne et de liturgie, Paris, Librairie Letuzey, 1934.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