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 [프]Montmar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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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대성당 뒤편에 있는 순교자 소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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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대성당 뒤편에 있는 순교자 소성당.

프랑스 파리 시내 북쪽 센(seine) 강 오른편에 위치한 해발 130m의 언덕. '순교자의 산 (Mont de Martyr)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랑스 가톨릭의 역사뿐만 아니라 문학사와 미술사의 중심지이다.
〔어원 및 기원〕 지질학적으로 제4기에 센 강은 석회암층을 침식하여 몇 개의 언덕만을 남기고 하나의 계곡을 형성시켰는데, 이 가운데 몽마르트르 언덕이 가장 높다. 신석기 시대 이래, 사람들은 주위의 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경사로 공격에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며, 수많은천연 동굴이 있어 쉽게 은닉할 수 있는 이곳에 정착하였다. 골(Gaule)족의 종교적 예식 장소였던 몽마르트르의 기능은 파리를 방어하기 위해 석고 채석장을 개발한 로마인들에 의하여 확인되었으며, 많은 고고학적 유적들은 이러한 갈로로망(gallo-roman, 골족과 로마인들)의 존재를 확인해 주고 있다. 7세기경에 쓰여진 한 연대기에는 몽마르트르가 '메르쿠리우스 산 (Mont de Mercure)이라는 이름으로 명기되어 있으며, 17세기의 역사가 소발(Sauval)이나 19세기의 건축가이며 고고학자인 바케르(Vacquer)는 언덕 위에 메르쿠리우스에게 바쳐진 사원과 마르스(Mars) 신에게 봉헌된 사원이 있었다고 하였다. 로마에도 이러한 지형에 종교적 전통이 남아 있는 것처럼, 몽마르트르의 기원은 메르쿠리우스 산 혹은 마르스 산(Montde Mas)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소발은 메르쿠리우스 (Mercurius) 신의 동상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엄청난 규모의 성벽이 그때까지 남아 있다고 하였는데, 이 성벽은 17세기 말에 붕괴되었다.
3세기경 파비아노 교황(236~250)은 골족의 복음화를 위해 7명의 주교급 선교사를 파견하였는데, 그들 중 파리 지역의 선교를 담당하였던 사람이 파리의 첫 주교였던 성 디오니시오(?~258)이다. 선교 활동 중 체포된 그는 신앙을 포기하라는 로마인들의 명령을 거부하고, 동료 루스티코(Rusticus) 신부와 엘레우테리오(Eleutherius) 부제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258년 이 언덕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생 드니 수도원장이었던 일뒹(Hilduin) 835~840년경에 몽마르트르의 기원에 관해 작성한 기록을 보면, 사형 집행 장소는 몽마르트르였으며, 디오니시오는 사형 집행 후 매장된 것이 아니라 피가 떨어지는 머리를 자신의 손으로 받쳐들고 오늘날 생 드니(Saint-Denis)라고 불리는 파리 북쪽 지역을 향해 걸어갔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교적인 어원의 설명이 그리스도교적으로 변형되어 몽마르트르는 '순교자의 산' 이 되었다.
9세기 이후 이 언덕으로 많은 순례객들이 몰려들자 순교자들의 유품을 모신 지하 성당 위로 또 하나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이 당시 몽마르트르에는 두 개의 성당이 있었는데, 하나는 일반 성당이고 다른 하나는 순교자 소성당(Chapelle des martyrs, Maryrium)으로 불렸다.
〔수도원과 몽마르트르의 종교사〕 1096년 몽마르트르 언덕을 기증받은 생 마르탱 데 상(Saint-Martin des Champ-s) 수도원은 재원을 늘리고자 성지 순례를 독려하였는데, 아델라이드(Adélaïde) 왕비는 몽마르트르에 수녀원을 건립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대속하려 하였다. 이로써 랭스(Reims)의 성 베드로 베네딕도 수녀회 출신으로 구성된 수녀원이 몽마르트르에 세워지게 되었다. 1147년 4월 21일에는 아델라이드 왕비와 그의 아들 루이 7세가 참석한 가운데 교황 에우제니오 3세(1145~1153)에 의해성 베드로 성당이 축성되었고, 교황은 그 해 6월 1일 다시 방문하여 순교자인 성 디오니시오, 루스티코, 엘레우 테리오에게 중앙 제단을 봉헌하였다. 그 후 성당 주변에 상부 수도원 건물이 건설되었는데, 1180년 루이 7세가 사망할 무렵 수도원의 번영은 절정에 달하였다가 14세기 불영(佛英)전쟁으로 건물들이 참혹하게 파괴되었다. 수도원에는 복원할 재정이 없었으며, 모두 파리로 피신하여 1403년에 몽마르트르에 6명의 수녀밖에 남아 있지않았다. 더욱이 당시 파리 주변에 나타난다는 늑대 떼 때문에 1439년에는 마지막 남은 수녀들마저 떠나 버려 수 도원은 거의 황폐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르는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1164~1170년 프랑스에 망명하였던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Thomas Becket, 1118~1170)은 기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수도원을 방문하였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를 통치할 생각이 없느냐고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 도시의 왕이 되느니 차라리 복음서에 관한 성요한 그리소스토모의 주석본을 갖겠다" 라고 답변한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다. 잔 다르크(Jeanne d'Arc, 1412~1431)
역시 1429년 군대가 몽마르트르 근처에 숙영하고 있을 때 여러 번에 걸쳐 순교자들의 무덤을 방문하였다. 상부 수도원 아래쪽에는 성 디오니시오의 유품을 모신 소박한 성당이 건립되었는데, 하부 수도원이라고 불린이 성당은 가톨릭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1534년 8월 15일 몽마르트르 수도원의 순교자 성당에서 미사를 거행하던 르 페브르(Le Fèvre) 신부가 영성체 때, 이냐시오 로올라(Ignace de Loyola, 1491~1556)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로드리게스(Rodriguez) 등과 함께 세 가지 서원, 즉 청빈 · 정결 · 영혼 구제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로 맹세하였던 것이다. 이 약속이 예수회의 시
작을 알리는 것이었기에 예수회 회원들은 몽마르트르에 대해 각별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한편 교황 레오 10세(1513~1521)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1516년에 체결한 조약으로 수도원장과 수녀원장 임명권은 국왕이 갖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수도원의 재정 상태는 극히 악화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종교 전쟁은 이러한 상황을 더욱 심화시켰다. 이후 순교자 성당을 복원하고 마리 드 메디치(Marie de Medicis)의 후원으로 점점 순례객의 수가 증가하였으나, 1763년 수도원이 보유한 땅을 매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중한 부채는 여전히 해결하기 힘들어 결국 이 수도원은 종말을 예고하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몽마르트르〕 몽마르트르 언덕은 프랑스의 정치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도원의 재정 문제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던이 언덕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거의 황폐화되었으며, 혁명 후 구성된 새로운 의회가 파리 도시 구획을 새로이 정하면서 이 언덕을 양분하여 언덕 아래 부분만 파리시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혁명 초기에 이 언덕의 채 석장으로 도피하였던 마라(J.P. Marat)를 기념하기 위해서이 언덕을 '몽 마라' (Mont-Marat)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1814년에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이 파리에 입성한 후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역인 이 언덕에 12대의 대포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후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라 파리시의 인구가 급속도로 팽창하고, 지방이나 외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파리 외곽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몽마르트르 언덕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언덕은 1860년에 다시 파리시로 편입되었으며 1870년 보불전쟁(普佛戰爭)이 시작되어 그 해 9월에 스당(Sedan)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고 1871년 3월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하였을 때에도 이 언덕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1871년 3월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이 성립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고, 2개월 후 코뮌이 붕괴될 당시 이 언덕은 참혹한 진압 장소가 되었다.
〔예수 성심 대성당〕 파리 코뮌으로 인해 프랑스 여론은 많은 충격을 받았는데, 가장 당황한 것은 바로 가톨릭 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교황이 바티칸시로 유폐된 것과 나폴레옹 3세의 모호한 태도는 가톨릭측을 당혹하게 하였으며, 파리 코뮌에 가담하였던 사람들의 반종교적인 극렬한 운동과 그들에게 포로가 되었던 파리 대주교의 처형은 더욱 공포심과 혼란을 느끼게 하였다. 루르드와 샤르트르(Chartes)에 순례객들이 증가하면서 "예수 성심의 이름으로 로마와 프랑스를 구하자"라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1871년 '예수 성심에 대한 국민적 소원 협회' 가 구성되면서 성당 건립 모 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파리의 대주교인 길베르(Guilber) 추기경은 건립 장소를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정하였으며, 의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보수주의자와 가톨릭계 의원들의 참여로 1873년에 예수 성심 대성당(Sacré Coeur de Montmartre) 건설을 위한 법령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반교회적인 사람들과 일부 국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그들은 이 법을 폐기하려 하기도 하였다. 성당 부지 지하의 암석층으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기도 하였으나,
1891년에 성당 내부가 완성되었고 1899년에는 돔식 지붕이, 그리고 1912년에는 종탑이 완성되었다. 1876년에 기공하여 1914년에 공사를 마친 예수 성심 대성당의 축성식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을 항복시킨 후인 1919년에 거행되었다. 이후 이 성당에서는 세계 각처에서 모이는 신자들에 의해 주야로 끊이지 않고 성체 조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가의 언덕〕 예술사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예술가들은 이 언덕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다. 일찍이 1820년 화가 베르네(É.J.H.Vernet)와 게리코(Géricault)가 이 언덕에 살았고, 1830년 경에는 코로(J.B.C. Corot)가 정착하여 몽마르트르를 소재로 한 유명한 그림을 그렸으며, 1850년경부터는 마네(É. Manet)의 인도로 르누아르(P.A. Renoir), 모네(C. Monet) 세잔(P. Cézanne), 드가(H.G.E. Degas) 같은 소위 인상파 화가들이 이 언덕의 한 주점에 모여 회합을 갖기도 하였다. <까페의 여인들>과 <괴로움>이라는 작품을 남긴 드가는 이곳에 드나드는 손님들을 그렸다.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은 이 언덕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고, 그 후 반 고호(Van Gogh)와 툴루즈 로트레크(H. de Tou-louse-Lautrec)가 합세하였는데, 특히 툴루즈 로트레크는 물랭 루즈(Moulin Rouge)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매번 파리 여행 때마다 이 언덕을 방문한 피카소(P.R. y Picasso)는 네 번째 방문인 1912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입체파 화가로의 탄생은 바로 이 언덕에서 이루어졌다.
이 언덕은 비단 화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정신병 증세가 있던 네르발(G.deNeval)은 이 언덕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기 위해 이곳에 정착하여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오렐리아》(Aurélia)를 기초하였으며, 시인 베를렌(P.M. Verlaine), 소설가 도르즐레(Roland Dorgelès), 시인이며 소설가 카르코(Francis Carco), 오를랑(Mac Orlan) , 자콥(Max Jocob),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등이 이 언덕에서 살면서 중요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많이 사라졌으나, 여전히 이 언덕을 중심으로 많은 화가들의 작업실이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 파리 )
※ 참고문헌  P. de Lagarde · A. Fierro, Vie et histoire du XIIIe arron- dissement, Paris, Editions Hervas, 1991/ H. Leclercq, Dictionnaire d'Achéolo- gie chrétienne et de liturgie, vol. 11, Paris, Librairie Letouzey, 1934. [邊琪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