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딕도회 신부. 교부학자. 프랑스 고전학자. 고문서학의 창시자. 1655년 1월 16일 프랑스 술라즈(Soulage)성(城)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3세 무렵 페르피냥 아카데미(Académie de Perpignan)에서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웠으나, 플루타르크(Plutarch, 46~119)의 《영웅전》 같은 역사 문학 작품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몽포콩은, 프랑스 역사가들이 쓴 책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로 된 저술까지 탐 독함으로써 다른 나라의 역사에도 깊은 조예를 갖게 되었고 지리학에도 관심을 쏟아 여러 여행기들을 읽기도 하였다. 또한 기억력이 비상하여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과 사건의 날짜들을 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암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서를 통해 전쟁사나 무기 사용에 호감을 갖게 된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1672년에 독일로 가서 2년 동안 튀렌(Turenne, 1611~1675) 백작 밑에서 장교로 자원 근무하였으나 전염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7세 된 그의 동생과 어머니가 이 병에 전염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은 그가 수도원에 입회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고, 결국 1675년 툴루즈(Toulouse)에 있는 생 모르(Saint-Maur) 베네딕도회
에 입회하여 이듬해 5월 13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소레즈(Soreze)의 수도원에서 2년 동안 생활하면서 그리스어를 익히고 그리스 역사에 관해 쓴 저술들을 탐독하였으며, 카르카손(Carcasome) 지방의 그라스(Grasse) 수도원에서 보낸 8년 동안도 역시 그리스 역사 저술들을 읽고 라틴어본에서 원 저자의 의도에 충실하지 못한 부분을 수정하거나 역사 신학을 연구하기 위한 자료들을 수집하는 데 전념하였다. 1686년 8월 보르도(Bordeaux)에 있는 생 크르와(Saint Croix) 수도원으로 간 몽포콩은, 그곳에서 그리스어 · 히브리어 · 고대 시리아어 · 아랍어 등을 공부하고, 처음으로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토스(Herodotôs, 기원전 484~425)의 저술을 읽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아타나시오와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저서를 새로 편집하기 위하여 파리의 생 제르맹 데 프레(Saint Germain des Prés)로 간 그는, 당시까지 출판된 교부들의 그리스어 저서나 필사본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정리하여 1688년에 출판하였다. 1698~1701년에는 이탈리아와 로마의 도서관에서 브리와(Paul Briois)와 함께 요한 그리소스토모의 필사본과 다른 역사 자료를 찾기 위하여 연구 조사를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교황 인노천시오 12세(1691~1700)의 초청으로 로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1719년 '금석학-문학 아카데미' (Académie des Inscrip-tions et Belles-Lettres) 회원으로임명된 몽포콩은, 새로운 연구 계획을 준비하던 중 1741년 12월 21일 파리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생 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 묻혔다.
〔저서와 업적〕 몽포콩은 개인적 저술을 비롯하여 편집 및 번역서 등 많은 저서를 출간하였는데, 그리스 교부들의 저술을 정리 · 번역하여 1688년에 출간한 《그리스 선집》(Analecta Graeca)이 그의 첫 작품이고, 1690년에 출간되어 매우 호평을 받았던 《유딧 전기의 실제》(La verité de I'histoire de Judith)가 그의 첫 번째 개인적 저서이다. 1690년에 이미 첫 권이 인쇄되어 나왔던 《아타나시오에관한 연구》는, 처음부터 함께 작업하던 동료들이 중도에 사망하거나 다른 곳으로 가버려 결국에는 혼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1698년까지 연장하여 전 3권으로 출간하였으며, 1698년 자료 조사를 위해 이탈리아를 출발하여 여러 곳을 여행했던 경험을 틈틈이 기록한 《이탈리아 일지》(Diarium Italicum)를 1702년에 출간하였다. 또 수집한 자료 특히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고대 유물 도해 주석》(L'Antiquité expliquée et représentée en figures, 1719) 전 10권과 《프랑스 군주 정치의 유물》(Les monuments dela monarchie frangaise, 1729~1733) 전 5권을 출간하였으며, 3세기경 오리제네스가 편찬한 《육공관(六共觀) 구약 성서》
(Hexaplorum Origenis quae supersunt, 1713)와 《요한 그리소스토모에 관한 저서》(전 13권, 1718~1738)가 유명하다.
고문서학 : 몽포콩이 1708년에 출간한 《그리스 고문서학》(Palaeographia Graeca)은 탁월한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이 당시 그는 처음으로 고문서학을 아주 광범위하게 발전시켰는데, 특히 필사본과 각종 서적의 서체에 관한 연구에 중점을 두면서 부수적으로 공문서와 기록문의 서체에 대한 연구도 진행시켰다. 몽포콩과 그의 후계자들이 정립한 고문서학의 원칙과 규칙들은 몇 가지 점만 보완 · 수정되었을 정도로, 이후 고전학을 연구하려는 모든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몽포콩은 그리스 시대 필사본에 나타난 각종 서체들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였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옹시알 (Onciale) 글자체로 이는 대문자만으로 구성된 사자체(寫字體)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문자로 구성된 글자체를 지칭하는 연결 서체이다. 파피루스에 나타난 그리스 문자체를 보면 9세기까지 대문자체가 통용되다가, 이후 소문자체로 바뀌어졌는데, 그때부터 소문자체가 인쇄술이 발명된 시기까지 계속 통용되었음을 볼 때, 고문서학은 또한 인쇄술의 역사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문자체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라틴어 학자로부터 그 명칭을 원용하기는 하였지만, 파리에 있는 예증 자료가 너무 적어 이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지 못하였던 것 같다. 실제로 그는 대문자체로 된 파피루스는 30여 편밖에 볼 수 없었지만, 소문자체에 대해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영 향] 몽포콩이 발전시킨 광의적 의미에서의 고문서학은 단지 고대 필사본의 판독만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고대 자료의 해석을 역사학에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베네딕도 수도회 회칙과 교육 등을 엄격히 준수한 생모르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그 당시의 지식인들 특히 베네딕도 수도회 학자들 중 젊은 세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생 모르 학파)
※ 참고문헌 J. Baudot, 《DTC》 10, pp. 2388~2390/ H. Leclercq, 《DACL》 11, pp. 2608~2672/ F.X. Murphy, 《NCE》 9, p. 1092/ J. Daoust, 《Cath》 9, pp. 648~651. [편찬실]
몽포콩, 베르나르 드 Montfaucon, Bernard de(1655~1741)
글자 크기
4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