뮐러, 요한 아담 Möhler, Johann Adam(1796~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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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아담 묄러.

요한 아담 묄러.

신부. 교회사가. 독일 가톨릭 튀빙겐 학파(Katholische Tübinger Schule)의 대표적인 신학자. 1796년 5월 6일에 독일 남부 메르겐트하임(Mergentheim)의 이게르스하임(Igersheim)에서 마을의 이장이며 여관과 빵집을 경영하는 안톤 뮐러(Anton Möhler, 1769~1834)와 안나 마리아 (Anna Maria, 1772~1808)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김나지움(Gymnasium)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해 1813년 엘방겐(EIlwangen)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815년부터는 프리드리히 대학교(Friedrichs Universität)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여기에서 될러는 스승이며 나중에 가톨릭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가 된 드라이(J.S. Drey)와 그라츠(A. Gratz) , 헤릅스트(J.G. Herbst), , 히르셔(J.B. Hirscher) 등을 만났는데, 그들을 통해 계몽주의의 장단점을 알게 되었고, 교회를 성령이 활동하는 곳으로보는 신학적 사고를 접하게 되었다.
1817년 국왕 빌헬름 1세는 엘방겐의 대학을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뿌리깊은 튀빙겐 주립 대학으로 이전시켰는데, 이로써 가톨릭 튀 빙겐 학파가 생겨났다. 엘방겐에서 튀빙겐으로 옮겨 남은 과정을 마친 묄러는, 로텐부르크(Rottenburg)의 신학원에서 사목 교육을 수료하고 1819년 9월 18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 보좌 신부로 고향 메르겐트하임과 봐일 데르 슈타트(Weil der Stadt) 등지에서 사목한 후 1820년 다시 튀빙겐으로 돌아와 '교사 준비 연구소' 에서 교직을 준비하다가 복습 지도 교사로 임명되어 가톨릭 대학 기숙사에서 신학생들에게 교회사와 철학을 지도하였다. 1822년에는
튀빙겐 대학에서 교회법과 교회사를 강의하던 드레쉬(G.L. Dresch) 교수가 사직하자 묄러는 교회사 강사로 임명되었는데,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당시의 관례대로 독일의 유명한 대학들을 방문하고 교수들을 만나는 7개월 동안의 학술 여행을 하였다. 그는 이 여행에서 당대의 주요 신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사상과 방법론 등을 배울 수 있었고, 이때 받은 자극과 영향은 될러의 삶과 신학적인 연구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깊은 인상을 심어 준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 즉 괴팅겐의 교회사학자 플란크(G.J. Planck), , 베를린의 교의 신학자 슐라이어 마허(F.E.D. Schleiermacher), 그리고 교회사학자 네안더(J.W.A. Neander) , 신조학(信條學, Symbolik)의 창시자 마르하이네케(K. Marheineke) 등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교파간의 대립과 자신의 가톨릭적 입장을 깊이 생각하게 하였다. 여행 중 괴팅겐에서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에 대한 그의 개방적인 태도는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고, 최초로 교회 일치에 관해 강한 의지를 보여 준 것이었다.
묄러는 1823년 여름 학기부터 교회사 외에도 교회법, 교부학 등을 강의하였으며, 대학에서 발행하는 잡지 《튀빙겐 신학 계간지》(Tübinger Theologischen Quartalschrif)에 여러 편의 논문과 평론을 발표하는 등 학문적인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또한 교부들과 초기 교회의 방대 한 원전(原典)들을 수집 · 정리하고 연구하는 데 열중하여 1825년에는 성령 중심의 교회론적 입장을 서술한 첫 저서 《교회의 일치, 또는 초기 3세기 교부들의 사상에 나타난 가톨리시즘의 원리》(Die Einheit in der Kirche, oder das Prinzip des Katholizismus, dargestellt im Geist der Kirchen- väter der drei ersten Jahrhunder)를 출판하였다. 이 저서에 대해 뮌헨의 될링거(Ig. von Döllinger) 교수는 그리스도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극찬한 반면, 쾰른의 슈피겔(F.A. von Spiegel) 대주교는 그의 교회관이 가톨릭적이 아니라고 혹평하였다. 더욱이 1828년에 될러가 본(Bom)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을 때도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이 이단적이고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본 대학 헤르메스(G. Hermes) 교수의 평가를 받아들여 오스트리아 제국에 이 책이 보급되는 것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주목 받는 신학자가 된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지만 응하지 않았고, 1826년 3월 튀빙겐 대학 조교수로 승진하였다. 가톨릭 교회론의 역사적인 대전환을 이룬 이 저서는 교회사 연구를 자신의 평생의 과제로 여기는 저자의 고백록이며, 자아 탐구 과정의 신학적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될러는,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교리가 아니고 삶이며 교회사는 그 삶의 발전 과정이기 때문에, 교회사를 연구하려면 스스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생활해야 하고,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삶 안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교회 전승 안에 살아 있으므로,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초의 충만함' (im Angang die Fülle)을 지닌 초기 교회와 교부들을 연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런 입장에서 그는 당시의 시대적 사상들(인문주의, 계몽주의, 낭만주의, 관념 철학 등)에 대해 개방적으로 대처 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새로이 정립하려 하였다. 즉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제도주의적인 교회관이나 모든 제도를
거부하는 진보적인 교회관에도 반대하여 공동체성과 제도성을 함께 교회의 본질적 요소로 여기고, 그리스도 몸의 신비체 사상과 하느님의 백성 개념을 연결시켜, 성령 중심의 '친교로서의 교회관' (die Kirche als Communio)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교회관이 되었다.
또한 그는 대규모의 교의적 · 교회사적 · 교부학적인 연구의 결과들을 연달아 발표하여 《교회의 일치》에서 제시하였던 신학적 관점을 엄밀하게 규정하면서 교회 일치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펼쳐 나갔다. 1827년에 발표된 《특히 아리우스 사상과 논쟁한 대(大)아타나시오와 당시의 교회》(Athanasius der GroBe und die Kirche seiner Zeit, besonders im Kampfe mit dem Arianismus)는 교파간의 차이를 논리적으로 분명히 제시하였다. 즉 프로테스탄티즘과 대립하고 있는 그 당시 교회의 입장을 아리우스 사상과 대립해 있었던 4세기 교회와 비교하여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옹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모>(Anselm, Erzbischof von Canterbury, 1827/1828)라는 논문에서는 《교회의 일치》에서 논증하였던 교황 수위 권과 교계 제도를 다시금 분명히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성과 계시에 관해 헤겔 철학과 긍정적인 논쟁을 벌이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이나 신학이 이성과 대립되지 않으며, 교회가 계시와 이성을 똑같이 근거로 삼고 있음을 중세의 스콜라 신학을 통해 증명하였다. 브레스라우 대학과 본 대학, 그리고 뮌스터 대학에서의 교수직 제의를 거절한 묄러는 연구 실적과 능력을 인정받아 1828년 튀빙겐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정교수와 교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동료이며 프로테스탄트 튀빙겐 학파의 창시자인 바우르(F. Chr. Baur) 교수의 1828~1829년의 신조학 강의와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1817년과 1830년에 다시 살아난 신조주의(Konfessionalismus)에 자극을 받은 될러는, 1830년 여름 학기부터 신조학에 관해 강의하면서 가톨릭 입장에서의 답변을 시도하였다. 종교 개혁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측의 '가톨릭 교회 타락 이론' (Verfallstheorie)을 반박하기 위해 루터, 츠빙글리, 칼뱅 등 종교 개혁가들의 저서를 연구하기 시작한 그는, 교회 분열이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고, 종교 개혁 당시의 학문과 사상의 발달, 신심과 교회의 번영을 반증으로 제시하며 종교 개혁의 필연성에 관한 성급한 판단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계속하여 역사적인 자료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교파간의 문제에 답변하려고 하였는데, 그 결실이 교파 간의 문제에 관한 연구의 결정체이자 대표작이 된 《신조학 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에 따른 교의적인 대립에 관한 비교 서술》(Symbolik oder Darstellung der dogmatischen Gegensätze der Katholiken und Protestanten nach ihren öffentlichen Bekenntnisschriften, 1832)이다.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30 판 이상 출판된 이 책은 교회 일치와 논쟁 신학(Kontro-verstheologie)의 고전으로 간주되며, 묄러에게 논쟁 신학의 창시자, 신조학자, 교회 일치 운동의 선구자라는 세계적인 명성을 부여해 주었다. 이 책에서 그는 16세기 종교 개혁으로 생겨난 그리스도교 여러 교파들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Bekenntnisschriften=Symbola)에게 나타난 교리적인 차이를 비교 · 평가함으로써, 수백 년 동안 이어 온 교파간의 호교론적이고 논쟁적인 입장에서 방향 전환을 이루려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교 일치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더 이상 서로를 판단하지 않고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여긴 그는, 종교 개혁가들의 신빙성 있는 진술을 가능한 한 긍정적이고 공정한 태도로 연구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교리를 제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신이 아닌 인간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본 반면, 가톨릭 교회를 성령의 기관(Organ)으로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교파간의 논쟁을 유발하였고, 가톨릭측 에서의 대대적인 환영과 함께 프로테스탄트측으로부터는 수많은 반대 논증과 냉혹한 비판을 받았다.
프로테스탄트측은 될러가 불필요한 논쟁을 삼가고,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근원적인 부분을 제시하였음은 인정하면서도, 반발 역시 커서 이 책에 대항하는 학문적인 논박서들이 속출하였다. 1833년에는 마르하이네케 교수가 《묄러 박사의 '신조학 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공식적인 신앙 고백서에 따른 교의적인 대립에 관한 비교서술' 에 대하여》(Über Dr. J.A. Möhlers Symbolik oder Darstellung der dogmatischen Gegensätze der Katholiken und Protestanten nach ihren öffentlichen Bekenntisschriften)를 발표한 데 이어, 니취 (J. Nithsch)는 《묄러 박사의 신조학에 대
한 프로테스탄트의 답변》(Eine Protestantksche Beantwortung der Symblik Dr. Möhles, 1835)을 통해 광범위하게 대응하려고 시도하였다. 특히 바우르가 먼저 프로테스탄트측의 대학 잡지인 《튀빙겐 신학 잡지》(Tüibinger Theologischen Zeitschrift)에 <교리 이해의 원칙과 기본 교의에 비추어 본 가톨리시즘과 프로테스탄티즘의 대립>(Der Gegensatz des Kathlizismus und Protestantismus nach den Prinzipien und Hauptdogmen der beiden Lehrbegriffe)을 발표함으로써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될러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차이점에 관한 새로운 연구〉(Neue Untersuchungen der Lehrgegensätze zwischen den Katholiken und Protestanten)로 반박하였다.
그러나 학문적인 범위를 넘어 될러가 불순한 동기에서 그 책을 저술했다는 인신 공격까지 이어지자 심약하고 조용한 성격인 그는 충격을 받아 심한 피로와 함께 병을 얻게 되었다. 튀빙겐을 떠나 조용히 연구할 곳을 찾다가 가톨릭 도시인 뮌헨의 대학에서 초빙하자 이를 받아들인 그는, 1835년 3월 12일 교수로 임명되어 교회사 외에도 신약성서의 주석과 교부학 등을 강의하였다. 많은 계획과 착상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교의사를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나, 건강이 극도로 쇠약해져 더 이상 적극적으로 활동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1세는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그를 르츠부르크(Würzburg)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 회장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못하고, 1838년 4월 12일 콜레라와 폐렴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평 가〕 될러는 성서에 근거한 교회론을 통하여 19세기 독일 신학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근대 가톨릭 교회의 교회 일치 운동에 초석을 놓았으며, 시대와 교파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이 신학에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반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시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와서도 상이하게 나타나는데, 한편에서는 그를 신스콜라주의자로 여기는가 하면,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신프로테스탄티즘의 가장 뛰어난 성과를 가톨릭 신학에 도입한 인물이라는 긍정적인 평가와 반대로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무지하다는 혹평도 있다. 이처럼 서로 상반된 평가에도 불구하고 교회사학자 로서, 가톨릭 신조학자(Symboliker)로서, 또한 가톨릭 교회 내 일치 운동의 창시자로서 그가 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독일 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짧은 생애와 비교적 적은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신학사에 미친영향은 방대하며, 또한 19세기의 교회에 내적인 그리스도교와 새로운 교회상으로 방향 전환을 이룬 인물로 칭송되고 있다. 그가 갈망한 교회 일치는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조금씩 실현되기 시작하였으며, 1957년 독일 파 더본(Paderborn)에 설립된 가톨릭 교회 일치 연구소는 '요한 아담 될러 연구소' (Johann Adam Möhler Institut)로 명명되었다. 그의 비문에 쓰여진 "신앙의 옹호자, 문예의 자랑, 교회의 위안" (Defensor fidei, Literarum decus, Ecclesiae solamen)라는 칭호는, 그가 일생을 통하여 증언한 교회와 신앙에 대한 열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 신조학 ; 교회사학 ; 튀빙겐 학파 ; 신학사)
※ 참고문헌  J. Köhler, Gestalten der Kirchengeschichte, Hrsg. von M. Greschat, Stuttgart u.a., Bd. 9, Die neueste Zeit. 1, 1985, pp. 139~159/ P.W. Scheele, Katholische Theologen Deutschland in 19. Jahrhundert, Bd. 2, 1975, pp. 70~98/ M. Weitauff, Neue deutsche Biographie, Bd. 17, Berlin, 1994, pp. 616~620/ S. Merkle, Historisches Jahrbuch 58, 1938, pp. 249~267 59, 1939, pp. 35~68/ H. Wagner, Fakten und Überlegungen zu seiner Wirkungsgesschicte, Catholica 43, 1989, pp. 195~208/ Ders., Möhler auf dem Weg zur 'Symbolik' , Catholika 36, 1982, pp. 15~30/ Ders., 《TRE》 23, pp. 140~143/ H. Wolf, 《BBKL》 5, pp. 1584~1593/ St. Lösch, 《LThK》 7, pp. 256~2571 J.R. Geiselmann, 《LThK》 7, pp. 521~522/ H. Wagenmann, (EPTK) 13, pp. 203~208/ H. Geisser, Glauberseinheit und Lehreentwicklung bei Johann Adam Möhler, Göttingen, 1971/ J.R. Geiselmann, Lebendiger Glaube aus geheiligter Überliegerung, Der Grundgedanke der Theologie Johann Adamm Möhlers und der Katholischen Tiibinger Schule, Freiburg, 1966/ Ders., Die Katholische Tiibinger Schule, Ihre Theologische Eigenart, Freiburg, 1964/ Ders. Hg., Dr. J.A. Möhler's, Gesammelte Schriften und Aufscize, Regensburg, 1840/ St. Lösch Hg., J.A. Möhler(I), Gesammelte Aktenstück und Briefe, Miinchen, 1928/ 심상태, 《그리스도와 구원 - 전환기의 신앙 이해》, 성바오로 출판사, 1981, pp. 201~211. [吳善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