묄렌도르프, 파울 게오르크 폰 Möllendorff, Paul Georg von(1847~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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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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묄렌도르프.

조선 왕조 고종(高宗)의 초대 법률 · 외교 고문. 한국 이름은 목인덕(穆麟德) . 공식적인 관직명은 협변 교섭 통상 사무(協辨交涉通商事務) · 전 환국 총판(典圜局總辨) · 공조 참판(工曹參判) · 병조 참판(兵曹參判) · 해관 총세 무사(海關總稅務司). .1847년 2월 17일 북부 독일 위베르마르
크(Uebermark)의 체데닉(Zedenick)에서 태어나 경제 참사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괴리츠(Görlitz)로 이사하여 동생 오토(Otto Franz)와 함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1865년에는 할레(Halle)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학 · 언어학 · 동양학을 공부하였다. 8개 국어에 능통하였던 그는, 이곳에서 법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하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1867~1868년 군복무를 마치고 북부 독일 연방 수상실 영사과에 근무하였는데, 이때 그의 친구 폰 게르즈도르트(von Gersdort)로부터 청국(淸國)의 세관원으로 독일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갔다. 그는 정식 외교관으로 중국에 간 것은 아니었으나 주청 독일 공사인 폰 홀레벤(von Holleben)의 요구로 그의 비서가 되었으며, 후에 잠시 천진 주재(天津駐在) 독일 영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스 폰 브란트(Max von Brandt) 공사가 부임한 이후 그와의 불화로 영사직을 사임하였으며, 1869년 북양 대신(北洋大臣) 직례 총독(直隸總督)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의 권유로 천진의 해관 사무(海關事事務)를 맡으면서 마건충(馬建忠)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급박한 주변 정세에 대응하고 각국과의 수교 및 상업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제3국인 고문관 초빙을 청국에 요청하였는 데, 이때 마건충은 묄렌도르프를 적임자로 생각하고 이홍장에게 천거하였고, 그는 묄렌도르프를 고종의 고문으로 추천하였다. 그 해 11월 8일 사은 진주사(謝恩陳奏使)로 중국에 와 있던 조영하(趙寧夏, 1845~1884)와 고용 계약을 맺고 한국 최초의 서양인 고문으로 조선에 부임하였다.
이홍장이 묄렌도르프를 조선에 추천한 것은 자신이 신임하고 있는 그를 이용하여 한반도에서의 청의 종주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조선은 본래부터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서양의 열강들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서양인으로서는 서울에 상주하게 된 최초의 공식 거주자가 되었다. 조선에서의 체류는 1882년 12월부터 1885년 12월까지 만 3년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 기간 동안 장기 체류했던 중국보다 조선과 더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홍장에 의해 소환되어 중국으로 되돌아간 그는, 다시 내한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54 세 때인 1901년 4월 20일 중국 영파(寧波)에서 사망하였다.
〔한국에서의 활동〕 묄렌도르프가 3년 동안 이룬 업적을 요약하면, 대외적으로는 문호를 개방하여 서양 열강과의 수교에 이바지하였고, 대내적으로는 해관(海關)의 운영, 양잠(養蠶) 공장 및 유리 공장 설립, 광산 개발, 전신 가설, 학교 설립, 화폐 주조, 외아문(外衙門, 즉 統理衙門)의 창설 등에 힘썼다. 그는 영국 · 독일 · 러시아 · 이탈리아와의 조약 체결에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사신(使臣) 자격으로 상해 · 천진 · 일본으로 파견되어 조선 외교 초기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또 조선의 경제 개발을 위해 1883년 1월에 천진, 이듬해 7월에 상해를 방문하여 차관을 교섭함으로써 조선의 경제적 발전 을 위해 헌신하였고, 1885년 5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어 영 · 러간의 외교적 조정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묄렌도르프가 조선에 부임하였을 당시는 한반도 지배를 둘러싸고 청 · 일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허약한 조선 왕조는 두 세력 사이에서 희생물이 될 절박한 상황이었다. 한반도에서의 세력 균형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청 · 일보다 훨씬 강력한 제3 세력이 있어야 조선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북으로부터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인아거청' (引俄拒淸) 정책을 주장하였다. 조선 정부의 친러 정책 추진으 로 청 · 일 두 세력을 견제할 수 있었고, 러시아와의 비밀 협정 체결설이 나올 정도로 친러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묄렌도르프의 정책 노선은 그를 고종에게 천거한 이홍장에게는 배신 행위였다. 그래서 묄렌도르프는 청국을 위해 일하지 않고, 조선의 이익을 위해 활약하는 배신자로 간주되었다.
그가 이홍장에 의해 실각 · 소환된 이유는 첫째로, 될렌도르프는 1884년 천진 주재 러시아 공사 베베르(C.Waeber, 韋貝)와 제휴하여 한 · 러 수호 통상 조약이 체결되게 함으로써 청 · 일 양세력을 견제하였는데, 이 조약으로 청 · 일 양국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둘째로 조선 왕조가 청 · 일 양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려면 강력한 군대가 필요하였으므로 이를 위해 러시아 군사 교관을 초빙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1885년 일본 방문 때 주일 러시아 공사 다뷔도프(Davidov)와 이 문제를 비밀리에 협의하였다. 그런데 군사 교관 초청 문제는 청 · 일의 후원과 권고에 의해 미국 교관을 초빙하기로 하고 이미 교섭 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강한 반발을 일으켰고,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서기관인 폰 스페이어(von Speyer)를 서울로 불러들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셋째로 영국군함이 1885년 3월 1일(음) 거문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는 조선의 사신으로 분쟁 조정에 나서면서 조선 국왕의 이름으로 영국 함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당시 러시아와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문제로 분규를 벌이고 있었으며, 청 · 일 · 영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경계하고 있었으므로 영국은 묄렌도르프의 행위를 배신 행위로 규탄하였다.
이 사건 발생 직후 청 · 일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될렌도르프에 대한 나쁜 여론을 유포함으로써 이홍장은 그를 해임시키도록 고종에게 요청하였다. 결국 1885년 6월 외무 협판에서 해임되었고, 7월에는 해관 총세무사에서도 해임되어 조선을 떠났다. 이후 그는 다시 한국에서 근무하기를 원하여 1888년 5월 이홍장의 허락을 받고 내한하였으나, 주청 독일 공사 브란트가 서울의 영사 대리로 있는 크린(G. Krien)에게 반대 공작을 지시함으로써 중국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1889년 청국 세관에 다시 취직하였고 상해의 통계국장 대리가 된 묄렌도르프는, 그 후 '왕립 아시아 협회' (The Royal Asiatic Society)의 중국 지부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종교관이나 가톨릭과의 관계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없으나, 그의 부인 로잘리(Rosalie)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신자였고, 그가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신자인 서상륜(徐相崙, 1848~1926)에게 로스(J. Ross)가 번역한 성서 수천 권과 편지를 전달해 주었으며, 조선에 재임시 프랑스 신부들과의 접촉이 금지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만났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저서로 1892년에 상해에서 출판한 《만주어문전》(A Manchu Grammer)과 《조선의 개혁》(Die Reorganisation Koreas, 1897)이 있으며, 1930년에 그의 부인이 저술한 《묄렌도르프의 전기》(Paul Georg von Möllendorff : Ein Lebensbild, 고병익 역으로 《진단 학보》 24 · 25 · 26합집, 1963, pp. 149~ 196에 게재)가 있다.
※ 참고문헌  최종고, 《法史와 法思想》, 박영사, 1980/ ─,《한국 의 서양법 수용사》, 박영사, 1982/ 홍순호, 《한국 국제 관계사 이론》, 대왕사, 1993/ 이현종, 〈구한말 외국인 雇聘考〉, 《한국사 연구》 8호, 한국사연구협의회, 1972/ 최종고, <묄렌도르프와 한국 선교 문제>, 《교회사 연구》 6집, 이원순 교수 화갑 기념 한국 교회사 논문집, 한국교회사연구소, 1988, pp. 337~348. 〔洪淳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