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nihilum · 〔영〕nothing · 〔스〕n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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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무의 개념은 하느님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 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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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전통에서의 무의 개념은 하느님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 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I . 영성 신학에서의 무
개별적인 대상이나 형상(形相)이 없는 '순수 의식 상태' 혹은 차별성이 없는 세계, 즉 사물 사이의 차이나 다양성이 없는 세계, 또는 비어 있는 마음을 반영하거나 그렇게 드러낸 실재(實在)의 본질을 가리키는 개념. 역사적으로 이러한 '무' (無)의 개념은 신비주의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의미와 개념〕 마음을 온전히 비우거나 영혼의 미분화된 통일성을 얻는다는 무의 개념은 <우파니샤드>(Upani-sads)를 비롯한 중세 및 근대 서양의 신비주의 사상과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 중의 하나였으며, 도교와 불교에서의 '무' 의 개념, 유대교 신비주의에서의 '엔 소프(En Sof) 개념 등은 넓은 의미에서 '무' 의 개념을 정의하고 확장하는 유사 개념들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무신론과 관련된 무의 개념은 없다. 그리스도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의 개념은 근대 서유럽 사상에 나타난 허무주의에서 말하는 궁극적(窮極的) · 존재론적(存在論的) 대상이 없음을 의미하는 '부정적 무의 개념' 과는 다르다. 또한 철학적 관점에서 유사성을 지닌 도교나 불교를 비롯한 유대교 신비주의에서의 개념들과도 기본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내적 특수성과 개별성을 지닌 고유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신학자와 무 :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넓은 의미에서 무의 개념은 초월적 신(神)인 '스스로 있는 자' 〔自存者)가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 (Creatio ex ni-hilo)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새겨져 있는 무를 단순히 '선(善)이 결여된 형태' 가 아닌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린 죄의 원리' 로 인식하였으며, 그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초월적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비되어 나타나는 개념으로서 피조물에 대한 무의 개념은 그리스도교 내의 전통적인 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큰 조류를 형성하였으며, 그리스도교 역사의 많은 부분에서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하느님을 '무' 또는 '부정' (antiphasis)이라는 의미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Clemens Alexandrinus, 150?~215?)는 분석(analysis)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신학에 원용하면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을 알 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안다" (Stromates V , 11, 70~71)고 하였다. 즉 하느님은 존재하며, 존재로서의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라는 것이다.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 에서 '비존재' 또는 '무' 를 설명하는 것을 회피하면서 "하느님은 하나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저편에 있으며, 단자(單子, 만물의 원인)보다 우위에 있다" (Pedagogus I, 8, 71)고 하였다. 니사의 그레고리오(Gregorius Nyssenus, 335?~395?)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불가해성(不可解性)은 하느님을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 지으며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지식을 초월한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존재의 반대 편에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디오니시오 문집》(Corpus Dionysiacum)에서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언급보다는 초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즉 하느님이 초감각적이고 초지성적인 것은 비존재에 속하기 때문이 아니며, 그렇다고 하느님이 존재에 속하는 것은 더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진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준비하기 위한 '부정의 길' (Via Negativa)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후에 영성 신학자들이 언급하는 '영혼의 무화(無化)' 를 간접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14세기경 플랑드르 출신의 신비주의 작가 루이스브뢰크(Jan van Ruysbroeck, 1293~1381)는 인간적인 한계로부터의 '완전한 벌거벗음' 과 '홀로 있음' 이란 주제를 언급하면서, 무한한 존재인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유한한 인간 영혼의 무화를 언급하고 있다. 또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로 사변적인 면보다는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였던 타울러(JohannTauler, 1300?~1361)는 고행주의적 정화(淨化)의 개념으로서 '하느님의 신비한 어두움' 이란 주제를 사용하였다. 이 개념의 주제와 이미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둔 밤 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초자연적인 것과 신적인 것이 인간적 이해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신비가들은 '어둠의 빛' 이니 부정적 신학' , 또는 '미지의 구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많은 신비가들의 경우 그들이 표현한 개념들에 대한 해석이 신학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으로 치우치거나 그 해석의 비약이 심하고 기복이 크기 때문에 오히려 이해하기 쉽지 않아 '무화의 과정' 과 '무의 개념' 에 대해 자연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있지는 못하다.
완덕과 무 : 무의 개념을 소극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가운데에서도 무의 개념을 오히려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적극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영성 신학의 흐름 속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 이론화의 가능성과 해석의 문제는 여러 영성 신비가(靈性神秘家)들의 주된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동시에 적지 않은 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영성 신학에서 무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이 비로소 중요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영성 신학에서 말하는 참된 그리스도교인의 삶이란 완덕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완덕의 과정이란 은총의 도움으로 덕행을 실천하는 모습과 성령의 중재로 하느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이룸으로써 영적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완덕의 삶을 위한 일련의 변화 과정을 보면, 피조물인 인간은 원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구원 사업의 신비적 역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 우선 자신의 죄를 정화하여 낡은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영혼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조금씩 변화되고 그 사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조명(照明)의 과정과,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하게 느끼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일치의 과정이라는 두 단계를 예비하는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완덕의 과정에서 정화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무' 로 변화시키는 '혼의 무화' (Annihilatio)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렇게 본질적으로 변화된 인간의 영혼은 완덕의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무의 개념은 영성 신학에서 특히 잘 발달되어 있으며, 신비주의자들은 이러한 무의 개념을 저마다 조금씩 다른 어휘와 표현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그 본질적인 내용에서는 매우 유사한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신비 체험과 무〕 신비 체험자 혹은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하는 신비 체험의 초자연적 실재가 과연 무엇이며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비 체험에서 나타나는 무의 과정과 그 체험을 논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또한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다. 신비 체험의 이러한 형언 불가능성(形言不可能性)이란 특징 때문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무의 개념이 정확하게 표현될 수는 없다. 따라서 무 체험에 대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분석과 해석도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완덕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무의 개념에 대해서 심도 있게 인식하고 이를 깊이 있게 표현한 대표적인 영성가로 십자가의 성 요한(San Juan de la Cruz, 1542~1591)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Santa Teresa de Avila, 1515~1582)를 꼽을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과 아빌라의 데레사에게 있어서 무의 개념은 완덕을 향한 기본적 수행 과정에서 잘 보여진다. 이들 영성가들은 하느님의 본성을 닮고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인간의 영혼이 하느님의 본성과 유사해져야만 하는데, 이렇게 영혼이 신성과 유사한 속성을 갖으려면 인간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집착과 욕망을 포기하는 철저한 '자기 무화의 과정' 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러한 단계는 하느님의 은총이 영혼을 비추기 전에 이루어지는 필수적인 기본 단계이다. '정화' 혹은 '무화' 의 과정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가르멜의 산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하느님과 영혼의 두 의지가 서로 모순되지 않으면서 상호 조화되어 일치를 이루는 과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무화하여, 즉 비워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준비함으로써 영혼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게 되고, '참여하시는 하느님의 은총' 에의하여 인간의 영혼은 본질적인 변화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변화된 영혼은 하느님의 신성과 하나로 결합될 수 있는 기본적 준비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감각의 수동적인 밤은 정화의 길에서 조명의 길로, 수덕적 국면에서 신비적 국면으로, 영성 생활 안에서 묵상하는 이들로부터 주입적 관상의 광채로 비춤을 받기 시작하는 이들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된다는 것이다.
데레사 성녀는 이러한 자기 정화의 과정에서의 무의 개념 이외에도 완덕의 절정인 하느님과의 일치의 순간에도 무를 체험하고 있다. 일치의 순간에 체험하는 무의 실체는 인간적인 속성에서는 알 수 없는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성녀는 자서전에서 "나는 무아경이 지속되는 동안 육체가 종종 죽어서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느낀다"고 하였다. 변화된 인간 영혼의 신비적 결합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연적 감각 세계를 뛰어넘는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경험이므로 결국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죽은 상태와 같은 무의 체험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완덕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무화의 과정' 혹은 '정화의 과정' 을 보다 깊이 있게 다루면서 전통적인 신비 신학의 관점에 따라 영적 합일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개별적 주체성을 스스로 잃는 적극적 행위로서의 무의 개념을 설명하였다. "영혼은 이 모든 형상과 심상들을 온전히 비워야만 하며, 영혼이 영적 합일에 도달하는 경우 이러한 내적 감각들은 어둠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는 말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교나 불교, 인도의 신비 사상에 나오는 공통된 의식인 '신비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심상과 표상들을 제거해야 하는 필요성' 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느 종교와 사상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그리스도 교적이고 독창적인 사상이 담겨져 있다. 그에게 있어서 어두움은 감각이 가져다 주는 상상이나 환상들이며 동시에 영혼이 비워야 할 상상의 형태와 심상들이다. 신비 체험을 위해서는 이러한 상상이나 공상, 심상들은 그 작용을 멈추고 고요한 어두움 안에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정화의 과정을 통해 감각적이고 정신적인 욕망과 그릇된 상상들은 완전한 어두움의 심연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영혼이 모든 형상이나 심상들로부터 순수해지고 정화되었을 때, 영혼은 어둠 속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것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의 정화를 거치면서 영혼은 모든 자신의 기능이 공허하고 쓸모없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영혼은 어둠 안에서 신앙의 길을 가면서 오히려 길을 잃지 않고 올바로 걸을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의하면, 영혼은 어둠이 깊을수록 자연적 기능들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더욱 안전하게 완덕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성 요 한에게 있어서 '어둔 밤' 의 주제와 이미지는 무의 개념과 무화의 과정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개념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영혼이 걷는 가장 궁극적인 완덕의 길에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인 것이다.
〔의 의〕 완덕의 과정에서 구도자의 영혼은 내적으로 자아와 궁극적인 절대자와의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간격을 의식하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이 지적하듯이 영혼은 하느님을 닮아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정화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정화의 과정' 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영성가에 따라서는 '자기 부정의 과정' 혹은 '무화의 과정' 으로 인식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화의 과정' 을 거친 영혼이 영적 합일을 이루기 위한 완전한 준비를 마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영혼은 '수동적인 정화' 를 거쳐야 하는데, 이 수동적인 정화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개념에 의하면 '영혼의 어둔 밤 에서 이루어지며 이는 순수한 영혼이 사랑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 신비신학 ; 영성 신학 ; 은총 ; 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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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 도교에서의 무
노장 사상(老莊思想)의 기초 개념. 현상 세계의 근원 내지 진상(眞相)을 표현한 것으로 도(道)의 개념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다. 이 무(無)는 천지 만물을 존재하게 하 고, 의미를 부여하는 궁극적인 원인이며, 만물을 통일시 키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 도교(道敎)에서 무의 표명 은 《노자》(老子)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며, 《노자》에서의 무는 원리(原理) · 공간(空間) · 기(氣) 등의 의미로 쓰이 고 있다.
〔원리 또는 본체〕 '무' 는 《노자》의 제1장에서부터 나 오기 시작하나 같은 '무' 를 다루면서도 구두(句讀)의 차 이에 따라 의미가 현격하게 달라진다.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를 “無名, 天地之始 ; 有名, 萬物之母” (이 름없는 것이 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있는 것이 만물의 모
체이다)와 "無, 名天地之始 ; 有, 名萬物之母”(무는 천지 의 시작을 이름하는 것이고, 유는 만물의 모체를 이름하 는 것이다)로 각기 달리 읽는 데서 의미상의 분기(分岐) 가 생긴다. 다음에 나오는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 其"의 경우도 구두상의 차이는 “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 以觀其" (항상 무욕으로써 도의 오묘함을 보고, 유욕으로 써 도가 밝게 빛남을 본다)와 “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 (항상 무에서 도의 오묘함을 보고, 유에서 도 의 밝게 빛남을 본다)처럼 앞의 예와 마찬가지이다. 《노 자》에 대해 주석서를 낸 왕필(王弼)과 하상공(河上公)은 이것을 다 '무명' 과 '무욕' 으로 연독(連讀)하였으나 여 기서는 제가(諸家)의 구두 내지 해석의 이동(異同)을 설 명하는 일은 생략하고, 후자의 해석을 취하기로 한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 여기에 나오는 무(無)와 유(有) 의 대비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고 도(道)와 연결 할 수 있는 두 가지 측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 는 만물이 있기 전에 만물을 있게 한 원동력으로, 눈에도 안 보이고, 귀로도 들을 수 없고, 감각으로도 만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무' 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도는 인간의 감각 세계 앞에서는 없는 것 같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일단 도가 발동하여 유형화하면 모든 만물로 나타난다. 도는 바로 만물로 나타나는 근원적인 힘, 에너지 자체이 다. 따라서 도를 유상(有象), 유물(有物), 유정(有精)이 라고도 한다. 이렇게 유형적인 면에서 도를 볼 때, '무' 는 도의 체(體)이고, '유' 는 도의 용(用)이며, '체' 가 '용' 에 앞선다. 이 점은 《노자》 제40장에 나오는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겨나고 유는 무에서 생겨난다" 天天下萬 物生於有, 有生於無)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무' 는 감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원 리' · '본체' 의 뜻을 지닌 형이상의 것을 가리키며, '유' 는 감관을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기능' . '작용' 의 뜻을 지닌 형이하의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서의 '무' 는 결코 부존재(不存在)를 의미하지 않으며, 감지할 수 없 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간 또는 공허〕 《노자》 제11장에는 '무' 가 4차례에 걸쳐 나오는데, 이는 공간 내지 공허의 개념으로 쓰여져 있다. "30개의 수레바퀴 살은 그 수레바퀴 통을 함께하 고 있는데, 그 '무' (공간)를 만나 수레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무' (공간)를 만나 그릇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을 없애고 방을 만드는데, 그 '무' (공간)를 만나 방의 쓰임이 생긴다. 그러므로 '유' 는 편리함이 되고, '무' 는 쓰임이 된다" (三十輻共 一, 當其無, 有車之用. 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 戶爽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 用).
상이주(想爾注)에는 제11장에 대한 주석이 비교적 많 고 긴 편인데, 수레바퀴 통을 다룬 첫머리의 주는 이렇 다. "우매한 자가 수레를 얻으면 이익을 탐낼 뿐이고 도 를 행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가 보고서야 도의 은혜를 알고, 묵묵히 스스로 면려(勉勵)하고 도의 진실 됨을 소중하게 지킨다." 여기서 도의 은혜와 도의 진실
됨을 거론한 것이 "무를 만나 수레의 쓰임이 생긴다"는 부분을 설명한 것이다. 끝 부분의 "그러므로 유는 편리 함이 되고, 무는 쓰임이 된다"에서의 '유' 는 수레바퀴 통 · 기물 · 방 같은 구체물을, '무' 는 공간을 각각 가리 키는데, 이 단계의 상이주 첫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 세 가지 물건은 본래 만들기 어렵고, 도가 아니면 이루어 지지 않는다. 속된 사람이 그것들을 얻으면 다만 그 이 (利)만을 탐내고 그 무(無)는 모른다. 현명한 자가 그것 들을 보면 돌아와 그 쓰임을 지키고, 도를 씀을 근본으로 삼는다." 이처럼 '무' 는 쓰임이 되는데, 도를 씀을 근본 으로 삼는다고 하였으니 '무' 를 동사적인 의미의 '용' (用)으로 본 것이다. 이것은 《노자》의 본뜻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당시 도교측의 <노자> 해석의 일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고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무' 라는 말은 쓰지 않았으나 공간 개념이 적용된 예가 있다. 《노자》 제6장은 곡신(谷神)의 이야기인데, "골짜 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그것을 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 묘한 암컷의 문은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면면히 이어져 존재하는 것 같고 그것을 써도 다하지 아니한다" (谷神不 死, 是謂玄牡. 玄牡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 勤)라고 하였다. 왕필은 곡(谷)을 양(養)의 뜻으로 보아 오장신(五臟神)을 기르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하상공은 도의 상징으로 해석하지만 글자 그대로 골짜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 또는 뭍과 뭍 사 이에 생기는 공간으로 그 공간의 쓰임은 변화 무쌍하고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공간의 쓰임을 신(神)이라고 한 것이다. 작은 골짜기로 이루어지는 실개울부터 시작하여 도도한 하천과 온갖 것을 수용하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한계는 크게 확대된다. 이제 그것을 현묘한 암컷으로 부르니 그 어간에는 여자의 생식기도 공간이 있는 골짜 기의 한 가지로 본 것이다. 그래서 현빈(玄牝) 곧 현묘한 암컷이라는 표현을 쓰기까지 하였다. 곧 암컷의 불가사 의한 생식력과 연결시켜서 공간을 생각하였던 것으로 '무' 의 공간의 뜻과 연계되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 다. 상이주에도, "빈(牝)은 땅[地]이다. 여자가 그것을 본떴다. 음공(陰孔, 여자의 생식기)이 문이다. 죽음과 삶 의 주관자[官]이다. 가장 요긴하기 때문에 뿌리(根)라고 이름한 것이다. 남자의 생식기〔男茶〕 역시 뿌리라 이름 한다" (牝 地也, 女像之. 陰孔爲門, 死生之官也. 最要, 故 名根. 男茶亦名根)라고 하여 여자의 생식기와 연관시킨 풀이를 시도하였다.
〔기(炁=氣) 또는 동력〕 북송(北宋)의 장군방(張君房 ) 은 도교에 있어서 중요한 서적인 《대송천궁보장》(大宋天 宮寶藏)과 《운급칠첨》(雲笈七籤) 122권을 편찬하였다. 《대송천궁보장》은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도장(道藏)으 로 도교의 전적(典籍)을 집대성한 것이고, 《운급칠첨》은 도서(道書)의 정요(精要)한 부분을 뽑아서 정리한 것이 다. 특히 《운급칠첨》은 《대송천궁보장》의 제요서(提要 書)로서, 《대송천궁보장》이 없어진 오늘날에 있어서, 당 시의 방대했던 도서의 개요를 파악하게 하고 도교의 요
체를 터득하게 하는 요긴한 도교 참고서이다. 이러한 《운급칠첨》에 '무' (無)를 정의하고 설명한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우선 <대계상품>(大戒上品)에는 "대저 도 는 무이다" (夫道, 無也)라고 하여 도는 곧 무임을 말하 고, "유로 말미암아 무로 들어간다" (因有以入無)고 하였 다. 이것은 무가 곧 도임을 뜻하기보다는 '도' 가 추상적 인 성질의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한편 <노군태상허무자 연본기경>(老君太上虛無自然本起經)에서는 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무엇을 '무' 라고 하는가? 무라는 것은 '기' (炁=氣)이다. 기는 볼 수 있는 형상은 있으나 잡을 수 있는 바탕(質)이 없기 때문에 무가 되는 것이다"(何 爲無, 無者, 炁也. 炁有形可見, 無質可得, 故爲無). 그리 고 도교 수련의 한 가지인 <존사>(存思)의 축언(祝言)으 로서 "기는 무에서 생겨난다”(氣生於無)는 말이 있다. 이렇듯 '무' 를 '기' 라고 한 정의는 우리의 주의를 끈다.
도교에는 우주 생성론이 있는데 거기에도 '무' 와 '기' 의 관련성이 설명되고 있다. 즉 <공동>(空洞)에는 도군 (道君)의 말로써 우주 생성의 요리(要理)를 밝히고 있 다. "원기' 는 아득하고 거친 안과 그윽하고 어두운 밖에 서 '공동' (空洞)을 생겨나게 한다. 공동 안에서는 '태 무' (太無)가 생겨난다. 태무가 변해서 3가지 '기' (氣)가 밝아진다. 3가지 '기' 가 혼돈하여져 '태허' (太虛)가 생 겨나 '동' (洞)을 세우고, 동으로 말미암아 '무' (無)를 세 우고, 무로 말미암아 '유' (有)를 생겨나게 하고, 유로 말 미암아 '공' (空)을 세우고, '공' 과 '무' 가 '허' 로 변하여 '자연' 을 생겨나게 한다. 윗 '기' 가 시(始)이고, 중간 '기' 가 원(元)이고, 아래 '기' 가 현(玄)이다. '현기' (玄 氣)가 생겨나는 것은 '공' 에서 나오고, '원기' 가 생겨나 는 것은 '동' 에서 나오고, '시기' (始氣)가 생겨나는 것 은 '무' 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는다. 셋이라는 것은 변화하여 생겨나 '구현' (九 玄)에까지 이른다. 아홉으로부터 하나로 돌아가야 도진 (道眞)으로 들어간다. '기' 가 맑아 하늘을 이룩하고, 찌 꺼기가 엉겨 땅을 이룩하고, 중간 '기' 가 화 (和)가 되 어서 사람을 이룩한다. 3가지 '기' 가 나뉘어 만 가지 조 화가 생겨나고 해와 달이 비추고, 다섯 별자리가 빛나게 된다. 위에 있는 세 하늘은 3가지 '기' 의 맑음에서 생겨 나 위가 없는 위, 극이 없는 극에 처해 있다."
여기서 '공동' 은 우주의 무한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 공동 안에 '태무' 가 생겨나 그것이 변해서 3가지 '기' 가 밝아진다고 하였다. 이 태무는 곧 가장 큰 '무' 로, 3가지로 나뉘는 우주의 '기' 가 그 기능을 발휘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3가지 '기' 중에서 '시기' 가 '무' 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위에서 언급한 "무라는 것은 기이다" 라고 한 것과 큰 차이가 있 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기' 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기는 하지만 다름아닌 '기운' 으로, 활력 내지 동력을 의미하 는 것이다. '무' 가 곧 '기' 라든가 '무' 가 '기' 를 밝게 해 준다든가 하는 것은 '무' 가 그러한 기운을 나타내는 표 현이라 하겠다. 도교에서 '무' 가 이치 내지 원리의 뜻과 아울러 기운 내지 동력의 뜻으로 이해되는 것은 송유(宋
儒)의 이기논변(理氣論辨)과 대비해서 고찰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 노자 ; 도교)
※ 참고문헌  Index Du Yunji Qiqian, Par K.M. Schipper, Ecole Frangaise D extrême-Orient Paris, 1982/ 尹張燮 역, 《建築空間과 老子 思想》, 技文堂, 1985/ 金敬琢 역, 《老子》, 光文出版社, 1965/ 陳鼓應 註 譯, 《老子今註令譯》, 臺北, 臺灣商務印書館, 1985/ 도병선, 《老子想 爾注解釋》 西江大學校 宗教學科, 油印本, 1994/ 吉岡義豊, 《道敎와 佛教》 東京, 國書刊行會, 1980/ 余培林 註譯, 《新譯老子讀本》, 臺北, 三民書局, 1985/ 張君房, 《雲笈七籤》, 四部叢刊本, 臺北, 臺灣商務印 書館, 縮印, 1966/ 車柱環 《韓國의 道教思想》, 同和出版公社, 1984. [車柱環]
: Ⅲ . 불교에서의 무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존재(非存在) , 비존재성(非存在 性)을 나타내는 개념. 유(有, 存在)와 대립되는 일반적 의미의 무(無, 非存在)와 유 · 무의 대립을 넘어선 근원의 무〔絶對無〕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불교에서 설명하는 실 재(實在)의 본질 · 속성, 혹은 불교의 공(空)과 동일선상 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후자의 '무' 이다. 특히 불교는 종교적 수행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 (涅槃)과 '공' 에 관 한 사색을 더욱 심화하여, 다른 종교 사상보다 더욱 분명 하게 '무' 를 명확하게 표명하고 있다.
〔인도 사상에서의 무〕 우파니샤드(Upanisad) 철학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대 인도인들은 이미 인도 특유의 사 유에 입각한 '무' 의 개념을 정확히 갖고 있었다. 즉 범아 일여(梵我一如) 사상에 있어서, 만물에 내재하는 '아' (我, atman)는 보이지 않으나 보는 자, 알려지지 않았으 나 아는 자로서 '아니다' [非]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통해 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비록 부정적인 방법을 통 해서 실재에 접근하고 있지만, 범아(梵我)는 항상 불변 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불교는 실체적인 '아' 의 존재를 부정하고 무아(無我, anatman)와 무상(無 常, anitya)을 주장하였다. 불교가 인도 정통 사상에 정면 으로 반기를 들고 무상과 무아를 주장한 것은, 근본적으 로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아' 도 아닌 것을 '아' 라 고 여겨서는 안된다는 사상이고 '나라고 하는 관념' ,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 을 배제하려고 한 것이다. 즉 '유· 무' 의 대립을 넘어선 '근원의 무' 를 추구하였다고 평가 할 수 있다. 불교에서 사용되는 '무' 는 단순히 '유' 의 반 대어가 아니라, '유 · 무' 의 대립, 혹은 논란의 차원을 초 월한 정각(正覺)의 차원,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 jnana)의 차원, 또는 연기(緣起)의 도리를 체득한 차원에 서, 궁극의 심원한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 다. "속제(俗諦)에서의 유(有)가 진제(眞諦)에서는 공 (空)하다"는 주장은 바로 이를 일컫는다. 이러한 인도 사 상을 기초로 용수(龍樹, Nagarjuna)는 〈중론〉(中論, Mula- madhyamaka-karika)에서 공 사상(空思想)을 전개하였다. 용수의 주장은 '유' 도 '무' 도 아닌 중도(中道)의 묘유 (妙有, 眞空의 異名)를 추구하는 인식론적 접근이며, <팔 불중도>(八不中道)에 나타난 그의 공 사상은 이후 대승 불교의 사상적 기조를 이루어 불교의 존재론적인 전형을 보여 주었다. 즉 현상계(現象界)를 실재로 파악하는 유 견(有見, 常見), 또는 무견(無見)을 깨뜨려 버리고 일체
는 무자성공(無自性空, nihsvabhava)일 뿐이라고 주장하 며, 더 나아가 공에 집착하는 '공견' (空見, 斷見)마저 초 월하는 중도를 취할 때 해탈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 은 유 · 무' 의 쌍방에 얽혀 있는 허망을 탈피하기 위해 서 '공' 을 비우는 '필경공' (畢境空)의 입장이며, 진공 (眞空)이야말로 묘유(妙有)임을 자각하는 입장이다. 무 르티(T.R. Murty)가 그의 주저 《불교의 중심 철학》(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 럼, 대승 불교의 변증론에서는 실재에 대한 긍정적인 주 장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주장마저도 부정하는데, 이는 결국 실재란 인간의 생각과 언어를 초월한 것임을 명확 히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대무 사상은 실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견해 · 입장 또는 주장에 대 한 철저한 부정이다.
〔중국 불교에서의 무〕 인도로부터 전래된 불교의 '무 . 공' 사상이 중국에 정착하여 중국 불교로 심화 발 전되기까지는 중국의 노장(老莊) 사상이 그 기초적 토양 을 제공하였다. 즉 유가(儒家)의 정명론(正名論)에 날카 롭게 맞섰던 노장 사상의 기조는 불교의 공 사상과 접목 되어 보다 심원한 불교의 '무 · 공' 사상을 꽃피우게 하 였다. 일찍이 중국 불교에서는 공이나 무에의 집착을 악 취공(惡取空), 완무(頑無), 허무회(虛無會) 단무견(斷 無見) 등이라 하여 엄히 금하고, “무주(無住)의 본(本) 에서 일체법을 세운다"(《維摩經》)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더욱이 초기 중국 불교를 체계화한 승조(僧肇)는 불교의 존재론적 근본 입장을 '유 · 무' 를 초월한 본무(本無)에 있음을 분명히 하여, 노장 사상과 중관(中觀) 사상을 자 연스럽게 연결하였다. 이후 공 · 무 사상은 삼론종(三論 宗)의 절대중(絶對中), 유식종(唯識宗)의 원성실성(圓成 實性), 천태종(天台宗)의 공가중(空假中)이라는 원융삼 제(圓融三諦) 화엄(華嚴)의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 界) 등의 사상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제각기 입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유에 집착하는 상견(常見)과 무에 집착하는 단견(斷見)을 끝까지 배제하여 불교 본래 의 '무' 의 입장을 주체적으로 철저화시킨 전형적인 예라 고 할 수 있다.
〔불교의 무와 서양 사상에서의 무〕 불교의 무는 단지 존재를 부정하는 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부
정과 긍정의 대립을 초월하는 '절대 긍정의 원리' 이며, 일체를 그 고유성에 따라 존재하게 하는 궁극적인 원리 이다. "유무(有無)의 이견(二見)을 떠난다"는 표현은 바 로 불교의 무가 '유와 무' , '긍정과 부정' 이라는 존재론 적 혹은 인식론적 범주까지도 초월하였음을 보여 주는 예라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틸리히(P. Tillich, 1886~1965) 는 존재의 상대적 부정인 '무' (非有, μή ὤν와 존재의 절 대적 부정인 '무' (ούκ ὤν)를 구별하였다. 또한 플라톤 (Platon)은 '우크 온' (ούκ ὤν)을 사유할 수도, 인식할 수 도 없는 것이라 거부하였고, '메 온' (μή ὤν)에 대해서는 존재와 관련하여 설명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용수로 대표되는 불교의 '무' 와 '공' 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로 대표되는 서양 형이상학의 '유' (ούσία, 본 질)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현대 사상과 무〕 서양 철학사에서 불교의 영향을 받 았다고 판단되는 쇼펜하우어(A. Shopenhauer)와 니체(F. Nietzsche)는 '무' 의 개념을 새롭게 해석하였고, 이러한 '무' 의 개념은 이후 사르트르(J.P. Sartre), 하이데거(M. Heidegger) 등에서 한층 세련되고 심화된 표현으로 나타 났다. 또한 신학 사상에 있어서는 베르자에프(N. Ber- jajev)와 틸리히 등도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실례로, 존재와 무 같은 형이상학적 주제에 관해서는 '불교의 선(禪)과 하이데거' , '용수의 공(空)과 그리스 도교의 하느님' , 언어 문제에 관해서는 '중관학(中觀學) · 선(禪)과 비트겐쉬타인' , 논리학에서는 용수, 디그나 가(Dignaga), 다르마키르티(Dharmakirti) 아리스토텔레 스, 러셀(B. Russell), 콰인(W. Quine)에 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 공 ; 도 ; 무기 ; 불교)
※ 참고문헌  E. Conze, Buddhist Thought in India, London, 1970/ T.R.V. Murty, The Central Philosophy of Buddhism, 2nd ed., London, 1970/ R.H. Robinson, Early Madhyamika in India and China, Madson, Wis., 1967/ F.J. Streng, Emptiness : A Study in Religious Meaning, New York, 1967/ M. Kiyota, Mahcryana Buddhist Meditation, Honolulu, 1978/ G.C.C. Chang, The Buddhist Teaching of Totality, University Park, Pa., 19771 D.T. Suzuki, The Zen Doctrine ofNo-Mind, London, 1949/ Nishitani Keiji, trans. by J. van Bragf, Religion and Nothingness, Berkeley, 1982/ E.J. Thomas,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London, 1933/ B.A. Elman, Nietzsch and Buddhism, Journal ofthe History ofldeas, XLIV, No.4, 1983. [吳將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