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

巫敎

〔영〕sham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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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아 한국의 무속은 가장 오래된 종교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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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보아 한국의 무속은 가장 오래된 종교 현상이다.

무당과 굿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현상으로 한국의 민간 신앙 중 가장 대표적인 형태. 사제인 무당, 그에 의하여 집전되는 제의(祭儀) 믿음의 대상인 신령(神靈), 제의를 요청하는 사람을 구성 요소로 하며, 무당과 참여자들의 몰아적 경험(ecstasy)을 특징으로 한다.
〔정의 및 어원〕 무교는 무속(巫俗), 무(巫) 또는 국제적인 용어로 샤머니즘(shamanism)이라고도 불린다. 한국의 무교를 부르는 명칭이 이렇게 다양하듯이, 전세계적으로도 샤머니즘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샤먼(shaman)이니 샤머니즘이니 하는 용어는 본래 한국어와 동일한 언어 계통인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퉁구스어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샤먼이라는 단어의 어근은 알타이어의 동사 '사' (sa-)에서 유래하는데, 그 의미는 '알다' 이다.
퉁구스인들은 부족의 종교 기능자를 샤먼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샤먼은 특별한 신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로서, 신령들을 불러 자신의 몸에 모시고 그 신령들이 자신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말을 하도록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샤먼은 몰아에 돌입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시베리아, 북아메리카, 중앙 아시아의 토착 인종들 사이에서 이상과 같은 종교적 기능을 행사하는 사람들만을 샤먼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샤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세계 여러 문화권 안에서 다양한 종교적 과제들을 취급하는 사람들과 제도에 구별없이 사용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즉 신비가, 마술사, 주 술의(呪術醫, medicine-man) 등에게도 샤먼이라는 호칭을 남용함으로써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 한국의 무교는 가장 오래된 종교 현상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 무교의 유래를 단군(檀君) 신화까지 소급하여, '단군' 이라는 명칭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관(天官)이며, 몽골어에서 하늘이나 천신(天神)을 뜻하는 '탱그리' (tengri)와 관련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이 비교 언어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무교가 한국 종교의 가장 오래된 형태임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인정되고 있다.
〔내 용〕 몰아와 함께 신들림을 의미하는 빙의(憑依, possession)라는 샤먼의 종교 현상은 각 민족과 샤먼 각자의 개인적인 기질에 따라 차이가 난다. 그러나 비록 샤먼이 처한 주변 여건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기는 하지만, 순수한 의미의 샤먼은 신령에 대한 종교적 체험을 한 사람들만을 일컫는다. 샤먼의 신령 체험 내지 소명 체험의 첫 증상은 샤먼 후보자의 지속적인 정신 장애와 육체적 고통이다. 한국 무교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신병(神病) 혹은 무병(巫病)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샤먼의 직능을 수행함으로써 차차 극복된다. 영국의 사회 인류학자인 차플리카(M.A. Czaplicka)는 이러한 무당의 신병 현상을 '북 극권의 히스테리' 라고 하였고, 덴마크의 인류학자 올마르크스(A. Ohlmarks)는 그녀의 이론을 받아들여 샤먼의 강신 체험 내지 종교 체험을 '북극권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는 생활 조건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현상' 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종교 현상을 종교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다분히 서유럽의 우월주의적인 왜곡된 시각을 드러내 보였다.
한자 문화권인 동북 아시아에서는 민간 신앙 체계를 무(巫)라고 표기한다. 이 글자의 본래 뜻은 소매가 긴 옷을 입은 의례 집전자인 무당이 신령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춤을 추는 형상이라고 한다. 엘리아데(M. Eliade) 같은 종교학자들에 의하면 한국, 중국, 일본, 몽골 등 동북 아시아의 신앙 체계는 북만주 지역에 분포하는 시베리아형의 샤머니즘에 속한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샤머니즘인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에 비해 한국의 무교는 그 틀이 상당히 고정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남부 지방의 무교는 강하게 의례화(儀禮化)된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한국의 무교는 한국 고유의 독특 한 종교 현상으로 샤머니즘과 동일시할 수 없으며, 굳이 서양말로 번역하자면 '무이즘' (muism)이라고 표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차이는 시베리아와 한반도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 지리적 배경을 감안해야 한다. 즉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에 대한 한국 무교의 변형은 지리적 · 기후적 차이로 인한 전이(轉移)와 타종교와의 교섭에 따른 편차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의 시작을 말하는 창세 신화도 시베리아의 북방식 '천지 창조형' 신화와 한반도 남부의 '우주 개벽형' 신화가 보여 주듯이 서로 다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현상은 시베리아의 샤머니즘이 사양길을 걷는 반면에, 한국의 무교는 여전히 활발하게 살아 있는 종교 현상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종교 현상으로서의 한국 무교는 신앙의 대상인 신령과 기자(祈者)로서의 인간, 그리고 신령과 인간을 중재하는 무당이 구성 요소가 되며, 이들은 굿이라는 제의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
① 사고 체계 : 무교의 신관(神觀)은 다신적 자연신관이며 신의 실재를 믿어 신이 만물의 운행자라고 한다. 무교에서 신앙하는 신은 자연신(自然神) 계통, 인신(人神) 계통, 그리고 기타 신 계통으로 분류되며, 이는 다시 가신(家神), 동신(洞神), , 자연 현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신, 사령신(死靈神) , 인간의 생명 현상과 관련된 신, 외래 종교의 신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 신들은 인간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특정한 직능 또는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신인 천신(天神), 상층신인 일월성신(日月星神) · 제석신(帝釋神) · 칠성신(七星神) 중층신으로 지상의 산신(山神) · 용신(龍神) · 지신(地神), 하층신으로 걸립신 · 하졸 · 잡귀(雜鬼) 등으로 계층화되어 있다. 이러한 신관을 갖고 있는 무교는 우주를 천상, 지상, 지하로 구분한다. 천상에는 천신을 비롯한 일신, 월신, 성신과 그 시종들이 살면서 우주의 삼라만상을 지배하며, 지상에는 인간과 새, 짐승 그리고 산신을 비롯한 일반 자연신이 살고, 지하에는 인간의 사령(死靈)과 그 사령을 지배하는 명부신(冥府神)들이 산다고 믿는다.
인간에 대해서는 인간의 생사, 흥망, 화복, 질병 등 운명 일체가 신의 의사에 달려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을 육신과 영혼의 이원적 결합체로 보며, 영혼이 육신의 생존적 원력(原力)이라 한다. 그러면서 영혼을 생령(生靈)과 사령으로 나누는데, 생령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몸속에 깃들여 있는 영혼이며, 사령은 사람이 죽은 뒤에 저승으로 가는 영혼이다. 이 같은 사령은 선령(善靈)인 조령(祖靈)과 악령(惡靈)인 원귀(寃鬼)로 나뉘어지면서 각기 선악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무교에는 영혼관을 기반으로 한 내세관도 갖고 있다. 즉 무교에서는 내세를 극락과 지옥의 두 가지 형태로 설명하는데, 이러한 내세관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불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무교의 내세관은 현세를 이승, 내세를 저승으로 하여 내세인 저승은 현세와의 관계를 일체 끊고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이상향(理想鄕)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무교의 내세관 속에는 미래에 대한 종교적 구원 관념은 없다. 무교의 내세는 현세에서의 일정한 신앙이나 종교적 구원과는 무관한 자연적 순환의 의미로 나타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근원지인 저승으로 돌아간다는 순환의
원리로 보았다.
② 제의(祭儀) : 무교의 제의는 규모에 따라 굿과 비손으로 구분된다. 굿은 여러 명의 무당과 잡이(樂工)들이 협력하여 가무와 실연(實演)을 위주로 제의를 하는 것이고, 비손은 축원을 위주로 한 사람의 무당이 하는 약식 제의이다. 동제(洞祭)인 당굿과 같이 규모가 큰 제의는 당연히 굿으로 제의가 진행되지만, 기자(祈子), 치병, 재수, 발원(發願) 등의 제의는 비손이나 굿, 어느 형식이든 가능하다. 그러므로 제의 종류는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비록 제의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제의의 과정은 공통적이다. 즉 제의의 진행을 거리(祭次)라고 하는데, 거리의 수와 종류는 굿의 규모에 따라 융통성 있게바뀐다. 그러나 신을 청하는 과정, 신을 접대하고 즐겁게 하는 과정, 신을 보내는 과정 등이 기본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주(祈主)의 소청에 대한 신의 응답인 공수, 그것을 전하는 인간의 대행자이면서 신의 대행자인 무당의 몰아 경험, 신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노래와 춤, 제의적 신성성을 서술하는 무가(巫歌)의 음송(吟誦) 등이 연출되고, 여러 가지 무구(巫具)가 이용된다. 이러한 제의에는 가신, 동신, 외계신(外界神)이 기본적인 제신(祭神)이 되며, 가신으로는 조왕신 · 삼신 · 지신 · 성주신 · 조상신 · 대감신 등이 있고, 동신으로는 산신 · 서낭신 · 당신(堂神) 등이 있으며, 외계신으로는 천신 · 천왕신 · 칠성신 · 용신 등이 있다.
[역 사] 한국 무교의 유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단군 신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단군의 이야기가 신화인가 역사적인 사실인가에 대한 논란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나, 통설대로 단군을 신화적인 존재라고 할 때, 종교의 세계에서 신화의 의미부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신화의 기능을 종교학에서는 대개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한다. 먼저 윤리적으로는, 신들의 이야기를 통하여 의례(儀禮)를 포함한 모든 인간사(人間事)의 규범적인 전형(典型)을 확립하는 기능을 한다. 다음으로 사회적인 의미에서는, 동일 문화권에 속하는 인간을 같은 신의 피조물 내지 후손으로 상정함으로써 사회를 통 합하고 지배자의 통치권을 강화하는 일을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 신화는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 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P.Tilich) .
신화가 지니는 의미로 볼 때, 고조선의 통치자인 단군은 정치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한 몸에 지닌 절대 통치자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한 권위의 근거는 바로 땅으로 보내진 천신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땅으로 강림한 천신 환웅(桓雄)은 지모신(地母神)인 웅녀(熊女)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지배자를 창출하는데, 이 인물이 바로 단군이다. 단군이란 이름이 무당을 뜻한다는 점과, 환웅이 신단수(神檀樹)를 통해 하강한 점, 그리고 북아시아의 샤머니즘에서 시조수(始祖獸)로 신앙되는 곰의 등장 등은 바로 이 시기에 무교가 한국 문화 속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하늘' 의 아들임을 내세워서 지배자의 위치를 강화하는 메커니즘은 고조선(古朝鮮)뿐만 아니라,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로 이어지는 주몽(朱蒙) 신화와 신라(新羅)의 혁거세(赫居世) 신화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하늘' 은 구체적인 공간 개념이라기보다는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이 세상 모든 현상을 다스리는 '힘의 등장' (力顯, Kratophanie)을 말한다.
시조 신화에 반영된 신앙의 양상 외에 고대의 제천 의례(祭天儀禮)를 통해서도 무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삼국지》(三國誌) <위지 동이전>(魏志東夷傳)에 따르면, 부여에서는 북을 쳐서 신을 맞이하는 영고(迎鼓), 고구려에서는 시조 동명왕(東明王)에게 제사지내는 동맹(東盟), 동예(東濊)에서는 춤으로써 하늘에 제사지내는 무천(舞天)이 있었으며, 삼한(三韓)에서는 성역(聖域)인 소도(蘇塗)에서 음주 가무로 신들을 즐겁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의례 풍속들은 바로 무교적 요소를 바탕으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 : 고조선 이후 일련의 사회 변동은 제정(祭政)의 분리를 가져왔다. 삼한의 소도에서 나타나듯이, 제사만을 담당하는 천군(天君)의 존재는 삼한의 사회 단계에서 이미 제정이 분리되었음을 보여 준다. 삼국 시대의 무교는 이러한 과정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즉 왕들은 정치 권력에만 치중하고 종교적인 측면은 차차 전문 무당들이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당들은 이때부터 두 가지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왕의 자문역 내지 보좌관으로 기능하는 나라 무당[國巫, 師巫, 神巫)과 민중의 종교 전통을 형성하는 서민층 상대의 민간 무당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라 무당의 위상은 세월이 지나면
서 점점 약화되는 현상을 보여 준다. 다음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몇 가지 예이다.
① 고구려 제2대 유리왕(琉璃王) 19년에 왕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 하였다. 제물로 쓰려고 한 돼지가 달아나자 왕은 그 돼지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사람들은 그 돼지를 어느 연못에서 건져냈는데, 그만 다리를 부러뜨렸다. 왕은 진노하여 돼지 다리를 부러뜨린 자를 죽여 버렸다. 나중에 왕이 병에 걸리자 무당은 임금이 죄 없는 신하를 죽였기 때문에 병에 걸린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은 하늘에 용서를 빌었고 병이 나았다.
② 고구려 제7대 차대왕(次大王)은 재위 3년째 되던 해에 사냥을 나갔다. 그때 하얀 여우 한 마리가 뒤따라오며 울자 왕은 그 여우를 활로 쏘았으나 맞지 않았다. 왕이 사무(師巫)에게 그 이유를 묻자 사무가 말하기를, 여우는 불길한 징조인데 그중에서도 흰 여우가 더욱 그렇다. 이것은 하늘의 경고이니 왕은 천신의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자신을 돌이켜 생각하고 덕을 닦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화가 나서 그 무당을 죽였다.
③ 백제 의자왕(義慈王) 22년 봄에 왕궁에서는 귀신이 나타나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라고 외치고는 땅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땅을 파 보게하였더니 거북이 한 마리가 나왔다. 거북이 등에는 백제는 보름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보름달은 기우는 것이요, 초승달은 찬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자 왕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이상의 세 가지 이야기가 보여 주는 예는 국정 자문역으로서의 무당의 위상이 차츰 쇠락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자문 내용이 왕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들은 마침내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왕권은 아직 무왕(巫王)적 성격을 탈피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의 왕호(王號)인 차차웅(次次雄)이 무(巫)를 뜻한다든지신라의 왕들이 기후와 농사의 풍흉을 점쳤고, 적병의 침입을 예언하였다는 것은 이 시기의 왕들도 무교적 신념 과 관행에서 권력의 원천을 찾았음을 보여 준다.
한편 유교, 도교, 불교 등이 한국에 전래되면서 한국 무교의 역사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교 내지 유학의 전래는 한사군(漢四郡, 기원전 108~서기 313)의 설치와 관련이 있으며, 도교는 대개 7세기 초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는 고구려(372)와 백제(384)에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유입되었지만 신라(528)에서는 이차돈(異次頓)의 순교 등 심한 저항을 겪은 후에야 수용되었다. 무교와 관련해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신라의 불교 수용이다. 당시 토착 종교인 무교를 배경으로 하는 귀족층과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통하여 지배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왕족 사이에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었 다. 이것은 양자의 타협을 통하여 해결되었지만, 불교를 공인한 후 무교는 점차 주류적인 위치에서 밀려나는 한 편, 불교의 영향하에서 그 내용이나 성격도 불교적으로 정리 · 개편되었다.
이처럼 무교는 외래 종교들과의 교섭 관계를 통해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특히 무교 자체가 승화된 가운데 새로운 종교 사상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하였는데, 신라의 화랑도(花郞徒)가 대표적이다. 화랑도의 이념은 무·불 · 도 · 유에 두루 근거하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유오산수(游娛山水)하며 심신을 단련하는 무(巫)의 정신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현재도 경상도 지방에서 남자 무당을 화랑 또는 화랭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신라의 화랑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고려 시대 : 고려 시대는 처음부터 종교 혼합적이었다. 겉으로 나타난 지배 이데올로기는 불교였으나, 실제 내용상으로는 여러 종교의 요소들이 뒤섞여 있었다.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觀會)가 불교를 빙자한 무교적인 종교 행사였으며, 태조(太祖)의 훈요 십조(訓要十條)에서 천신 신앙, 용신 신앙, 산신 신앙을 강조한 것은 고려 왕조의 종교적인 성격을 잘 보여 준다. 이와 함께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체계화된 풍수 도참(風水圖識)도 고려에 와서 활성화되었다. 이것은 무(巫)의 기반 위에서 도교의 음양 오행과 불교의 업(業, karma) 사상이 혼융되어, 땅과 공기의 기운이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다 는 이론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무교의 정치적 의미는 크게 축소되었지만, 신앙으로서의 무교는 여전히 성행하여 생활과 의식 구조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특징을 지니고 있던 고려 시대에는 나라 무당과 민간 무당의 분화도 심화된다. 나라 무당은 천신제, 시조제 등 국가의 주요 행사가 있을 때에 동원되었는데, 인종(仁宗) 때에는 무당 300여 명을 동원하여 기우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역할도 차츰 불교, 도교, 유교 등과 분담하게 되면서 그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유학자들로부터의 비판이 거세지면서, 무는 음사(淫祀)로 매도되어 무당의 궁중 출입 금지, 무당의 도성 밖 축출 등 여러 가지 제약이 가해졌다. 그러나 무교의 전통은 매우 뿌리깊어서 이에 대한 배척과 금압(禁壓)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된 <노무 편>(老巫偏)에는 당시의 굿의 양상을 간접적으로 전해 주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고려 시대의 무의(巫儀)는 오늘날의 형태와 매우 흡사한데, 이것은 오늘날의 굿의 형태가 이미 12세기경에 정형화되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조선 시대 :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표방한 국가였다. 그리하여 무교는 유신(儒臣)들에 의해 사도(邪道)로 금지되었으며, 무당은 사회의 최하층으로 전락하여 8천민(八賤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비록 무교가 사회적인 차별 속에서 금기시되었지만, 실제로는 민중의 신앙과 생활 철학을 지배하면서 크게 성행하였다. 특히 왕녀(王女)들에 의한 궁중 무속은 무당들이 다시 왕궁에 출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왕녀들은 지배층 종교와 민중 종교의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보면 조선의 무당 박해는 제한된 박해였으며, 은근한 차별과 멸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이미 안정된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를 위협하지 못한다는 강자의 아량일 수도 있겠고, 민중들이 갖는 불만을 분출하는 언로(言路)의 구실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다. 양반들이 체제 도전적인 성격이 다분히 들어 있는 굿이나 탈춤을 장려하고 즐기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그러한 심증을 굳혀준다. 이외에 조선의 무교는 동서 활인원(東西活人院)을 통해 구병(救病) 활동을 함으로써 국가와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으로 볼 때 비록 국가와 사회적 차원에서는 무교의 의미가 크게 쇠퇴하였지만, 개인 특히 부녀자와 서민층의 양재 초복(禳災招福)을 위한 무교는 성행하여 대제국(大韓帝國)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병합기에 이르러 무교는 한국인들의 민족 의식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탄압되었다. 그들은 전국의 경찰 조직을 동하여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사회 인류학 등의 방법론으로 무교를 연구한 후에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다. 민중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무교적 종교 신앙은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최근 동향]〕 1945년 이래 현대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서양식 모델에 따른 무비판적인 민주화와 현대화의 추진은 전통적인 가치 체계에 대한 소실을 비롯해 근본적인 문화 적응(acculturation)을 가져왔다. 특히 미국식 가치 체계에 따라 성장한 새로운 세대에게 있어서 무교는 부끄러운 미신' 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하루빨리 버리고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치부되고 있다. 무교 현장 내부의 현실도 이에 못지않다. 무당의 수련 기간은 점점 단기화되는 경향이며, 무의(巫儀)를 진행하는 시간도 계속하여 단축되고 있다. 또 무당들이 종교적인 수련이나 희생보다 물질적인 성공에만 관심을 둔다는 전통 무당들의 개탄의 소리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무당 단골들의 신앙 태도도 전과 같지 않다. 성조신 조왕신 · 터줏대감을 집에 모시는 이들은 적어지고, 무당들의 정기 의례인 진적굿에 참가하는 것도 뜸해졌고, 한 무당을 정해 놓고 다니는 제도인 단골판마저 사라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늘날 고유 문화에 대한 관심과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정신적인 공허감에 발맞추어 무교 신앙은 새로이 득세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무당들의 전국 조직인 '대한 승공 경신 연합회' 의 통계에 따르면, 1994년 8월 현재 전국적으로 등록된 무당의 숫자가 8만여 명에 이르며, 등록되지 않은 무업자(巫業者)들을 모두 합하면 15만 명 정도로 추산하기도 한다. 또한, 점차적으로 무당들의 학력이 높아지고 평균 연령은 낮아짐으 로써 일종의 현대화 양상을 보이는 동시에 물질적으로도 현저히 향상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1986년 경상도 문경의 산골 마을에서 행해진 별신굿에서는 무당 일행(남 1, 여 4)에게 50만 원의 사례비를 지급하였으나, 1995년에는 오히려 규모가 축소된 무당 일행(남 1, 여 3)에게 500만 원의 비용을 지불하였다. 이와 함께 각 지역 무교 대표자들은 1988년 5월 '천우교' (天宇敎)를 창교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천우교 교리서》까지 발간함으로써 제도 종교로의 발돋음도 시도하고 있다.
〔연구 동향〕 근대적인 연구 방법론을 이용하여 한국 무교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첫 시도는 서양인 선교사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의 교세 확장을 목적으로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호교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를 모두 무신론 또는 미신으로 폄하(貶下)하였다. 특히 민간 신앙의 대표격인 무교는 이들로부터 공격의 주된 대상이 되어서 처음부터 극복되어야만 할 미신으로 매도되었다. 이어서 일제 식 민 당국은 식민지 정책의 효과적인 수행을 위하여 민간 신앙인 무교를 연구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치밀하고 방
대한 자료를 수집하였으며, 아키바(秋葉隆)나 아카마츠(赤松智城)는 사회 인류학적인 연구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무교 전반을 혹세 무민의 사이비 종교요 유사 종교로 몰아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8 · 15 광복 이후 한국 무교에 대한 연구는 몇몇 국문학자들의 구비 문학 (口碑文學)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여 산발적으로 진행되었다가 1970년대 이후부터 문화 인류학 · 정신 분석학 · 연극학 · 종교학 등 여러 방면에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가톨릭의 입장과 방향〕 무교와 한국 교회와의 관계를 살피기 전에 먼저 가톨릭 교회 전체의 전통 종교에 대한 태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의 신자들이 무교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 그 지침을 정하여 주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는 1975년에 반포한 사도적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Evangelii Nunti-andi)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세기를 통하여 이루어진 가톨릭 국가나 다른 포교 지역에 있어서 신과 신앙을 찾고자 하는 특수한 표현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오랜 동안 순수한 것이 못 된다고 때로는 무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는 이러한 표현들을 어디서나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그런 것들이 적절히 선도되고 특히 복음 선교의 방향으로 선도된다면 가치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민간 신앙은 순박하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은 신앙을 위해서라면 헌신과 영웅적 희생도 할 수 있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부성, 섭리, 사랑, 현존 등 하느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예리한 감수성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데서는 보기 드문 인내심, 일상 생활에 있어서의 십자가의 의의, 해탈, 귀의심, 신심 등 내적 자세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민중의 종교심이라고 하기보다 민간 신앙 즉 민중의 종교라고 기꺼이 부르고자 하는 것 입니다. 선도만 잘된다면 이 대중적 신앙심은 오늘의 일반 대중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하느님과의 참된 상봉을 이루게 해줄 것입니다" (48항) .
위의 글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개별 문화권의 전통 종교 내지는 민간 신앙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 그 지침을 정해 주는 공식 문헌이다. 그 이전에도 가톨릭 교회는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공포한 일련의 문헌을 통하여 비그리스도교에 대한 교회의 태도라든가 종교의 자유에 대한 진일보한 자세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전통 종교라든지 민간 신앙을 지적하여 이렇게 명확한 자세를 정리한 것은 역사적으로 최초의 일이다. 또 교황 요한 바오로 2 세가 1990년에 반포한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에서도 '복음과 민족 문화와의 융합' 이라는 소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 다. "다른 나라와 교회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은 출신 지역의 문화 환경을 초월하여 파견된 지역의 사회적 · 문화적 환경에 자신들을 적응시킬 필요가 있다. 그들은 활동하고 있는 지방의 언어를 습득하고, 주요한 문화재와 친숙해지고 체험으로 그 장점을 발견해야 한다. 이런 것을 알고서야 감추어진 신비를(로마 16, 25 ; 에페 3, 5) 신빙성 있게 효과적으로 그 백성에게 알려 줄 수 있다··(53항). ··전통적 가치의 보존은 성숙한 신앙의 결과이다" (54항). 그 외에도 교황청 타종교위원회는 1993년 11월 21일에 발표한 <전통 종교에 대한 사목적 관심>에서 여러 나라의 고유한 '전통 종교' 의 가치를 재확인하고 있 다.
이상에서 소개한 교회 교도권의 최근 문헌들은 그리스도 신앙의 '문화 순응' (inculturation) 및 '문화 적응' (ac-culturation)과 관련하여 각 민족의 문화와 종교가 갖는, 그중에서도 특히 전통 종교가 가지는 적극적인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가톨릭 교회의 경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다양한 전통 문화와 종교를 보존하면서 현대 세계에 교회를 적응시키는 문제(aggiomamento)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사정도 이러한 세계 교회의 기류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즉 1960년대를 시발점으로 한국 교회 내에서도 토착화라든가 한국화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토착화를 운위(云謂)하는 교회 내부의 분위기가 한 세대를 경과하고 있지만, 아직도 민간 신앙이나 전통 종교를 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는 여전히 부정적이다. 무교를 대표로 하는 민간 신앙은 바로 수치스러운 과거의 유물로서 하루빨리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는, 첫째 한국의 종교 문화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 부족과, 둘째 불교와 함께 무교를 배척하였던 조선조의 배
타적 종교관에 대한 무비판적 추종, 셋째 서유럽 문화의 우월주의에 입각하여 선교 활동을 하던 과거 서양 선교사들의 영향에 주로 기인한다. 이들은 민중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전통 종교적인 특성을 현실 도피라든가 기복(祈福) 행위 따위로 여기면서 극복되고 소멸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반면에-소수이기는 하나-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전통 종교가 한국 문화의 근저를 이루고 있으므로, 전통 종교에 대한 깊은 연구와 이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한국에서 토착화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다양한 세계관과 문화 유산을 지닌 세계가 심리적으로 나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고 있는 오늘날, 가장 먼저 판독되어야 할 시대의 징표는 다원주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을 종교 문제에 국한해서 보면, 종교들 사이의 상이성과 저마다의 타당성을 존중해 주는 일에서 시작한다. 즉 지구촌 안에서 다른 종교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나라와 그의 구원 사업을 체현(體現)하기 위한 바른 실천(orthopraxis)에 더 많은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의 전통 종교에는 자기 부정적인 요소라든가 남을 위한 헌신적인 측면들이 개인적 차원이나 가족의 범위 안에서 많이 발견되지만, 한 차원 높은 사회 비판 의식이나 개혁 실천적인 측면은 부족하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는 전통 종교에서 역동적이고 살아 있는 종교성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며, 무교를 대표로 하는 한국의 전통 종교는 굿 정신' 의 이상적인 모습인 공동체성을 체현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불교와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리스 도교와 무교는 상호간에 지평의 확대와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하게 된다. 이렇게 만나는 종교들은 상대방을 흡수 · 병탄(倂吞)하는 파괴적인 개종의 강요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상호 선교를 실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 모두를 비옥화시키는 종교성의 심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사회 의식, 역사 의식, 예언자적 사명을 깨우치고 올바로 실천해야 할 근본 과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전통 종교를 보는 시각을 교정할 필요가 있다. 무교를 위시한 전통 종교를 성급하게 원시적 미신으로, 우상 숭배로, 사회 근대화와 발전의 장애물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막연하게 호감을 나타내어, 전통 종교야말로 한국 종교의 모태(母胎)라든지, 종교 심성의 기반이라고 하는 등 찬양 일변도의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민간 종교성의 기능과 공헌을 제대로 평가하는 한편, 민간에 국한되는 계층성이나 피지배층의 종교성 대변이라는 한계를 균형 있게 보는 태도가 요구된다. 민중 종교의 강한 역동성, 그 내적인 폭발력은 고등 종교의 예언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의식과 조우할 때 물신주의(物神主義, mam-monism)가 팽배한 현대 사회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한국의 문화와 분리할 수 없는 무교 · 불교 · 유교의 (신앙 내용과) 그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말씀의 씨를 기쁨과 경이를 가지고 발견하도록 노력' 하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이상과 같은 자세는 하나의 역사, 특정한 문화로 제한되지 않는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인류 정신사에 나타난 제종교들이 같은 하느님의 다양한 현현(顯現)임을 살펴서, 신앙 체험을 재조명하고 심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속 신앙 ; 샤머니즘 ; → 몰아 ; 무가 ; 무당 ; 민간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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