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재야(在野) 성서학자이며 신학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문하생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는, 일본을 중심으로 전개된 급진적 신학 운동과 주장.
조직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반대하고, 형식과 의식 중심의 예배 행위를 거부하는 무교회주의는, 하느님 말씀은 오직 성서를 통해서만 주어지고, 구원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 중인 서양 중심의 그리스도교에 대항하여 일본 중심의 주체적 그리스도교를 모색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무교회주의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적 그리스도교 라고 할 수 있다.
〔기원 및 전개〕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우치무라는 무사(武士) 계급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동경 외국어학교를 거쳐, 1881년 삿포로 농학교(札幌農學校, 국립 북해도 대학의 전신)를 졸업한 후 잠시 농상무성 ( 農商務省)의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농학교 재학 시절 선배들의 강요로 미국 감리교 선교사인 해리스(M.C. Harris, 1846~1921)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후 우치무라와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 각별한 형제애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그들 나름의 집회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 무교회주의의 실질상의 기원인 '7인 형제의 작은 교회' 였다. 이들은 한 주일에 세 번 모여 집회를 가졌는데, 이때 일곱 명 중 당번 한 사람이 그날의 이른바 목사, 사제, 교사가 되어 특별한 형식 없이 서로 둥글게 단좌(端坐)한 상태에서 성서를 낭독하고 설교를 하였다. 이러한 모임 후에는 함께 다과를 들면서 설교에 대해서 토론을 하였다.
이러한 그들에게 '무교회주의' 로의 방향을 자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당시 선교사들의 지나친 경쟁에 대한 환멸감으로 인한 깊은 실망과 번민이었다. 선교사들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각기 따로 교회를 세우고 서로 경쟁하며 집중 전도를 진행하였는데, 이러한 선교사들의 교파주의적 경쟁은 그들에게 실망과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하였고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우치무라의 미국 유학 경험이다. 그는 1884년 11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모스트 대학을 졸업하고 하트호드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미국의 교회와 신학에 실망하고 고심 끝에 1888년 일본으로 귀국하였다. 그의 미국 체류 기간은 그에게 신앙의 재발견이란 도움을 주었지만, 심각한 교파 대립과 반목에 실망하여 자신의 조국에서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귀국 후 그는 기다(北越) 고시학교, 1890년 9월에는 제일고등학교의 촉탁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891년 1월 '불경 사건' (不敬事件)으로 사직당하고, 잠시 오사카의 태서(太西)학관 교사로 있다가 이후에는 저술 활동과 강연을 통하여 무교회 운동에 전념하였다. 1890년 9월 《성서의 연구》(聖書之硏究)를 창간하였고 '일요 성서 연구회' 와 '하기 강연회' 를 지속적으로 개최하여 많은 제자를 얻은 그는 1930년 3월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성서의 연구》는 그 해 4월에 종간되었고, '성서 연구회' 도 같은 시기에 해산되었다.
그가 태어나서 활동하던 시기는 일본이 새로운 서유럽 문물을 접하면서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그 당시 일본은 명치 유신(明治維新) 이후 국가 신도(國家神道)를 중심으로 문화적 통합을 유지한 채 서유럽 문물을 수용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1888년 미국에서 귀국한 우치무라의 신앙과 애국심을 연결시키려는 주장은 동료들과 선교사들 양쪽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러한 대립 충돌 과정을 통하여 무교회주의는 독특한 신학 운동으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주요 사상〕 무교회주의 자체가 우치무라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저술과 강의를 기초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무교회주의는 우치무라의 사상과 주장으로 이해되어도 크게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교회관 : 우치무라는 제도와 형태로서의 교회를 부정한다. 그는 에클레시아(έκκλησία)란 용어가 본래 제도적인 교회나 교회 건물을 의미하지 않고 '규칙에 의하지 않고, 법률에 의하지 않으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하는 자발적인 인식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을 기초로한 영적 회중' 을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진정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사랑에 의해서 결속된 영적 교제의 단체여야 하며, 인위적 · 제도적 교회여서는 안된다고 역설하였다.
성사관 :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성사를 부정한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기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이외의 모든 것은 구원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교회의 의식인 세례와 성찬을 믿지 않는다. 의식은 아무리 장엄해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세례의 물은 어디까지나 물이다. 이것이 죄를 씻는 힘은 없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어디까지나 빵이고 포도주이다. 이것이 영생을 얻게 하는 힘은 없다. 하느님의 은혜는 의식에 의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로 세례를 받은 악인도 있고 또 이것을 받지 않은 선인도 있으며 날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를 받으면서도 모든 악한 일을 하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교회에서 행해지는 세례와 성찬 의식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는 아무 관계도 없다"(《세례와 성찬》 전집 제6권)라고 하였다. 그리고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사를 행하는 것보다 오히려 성서를 연구하고, 말씀에 따라 살려는 노력이 보다 좋은 방법이라고 하였다.
교계 제도 : 우치무라는 교회의 교계 제도 일체를 부정하였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진정한 교회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제나 목사, 전도사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가 하느님이 그를 놓아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선한 사제가 될 수 있다. 쟁기를 잡는 사제, 도끼를 잡는 사제 ··· 우리들은 어느 지위, 어느 직업에 종사하든 간에 좋은 사제가 되어서 일할 수가 있다"(《사제장이란 무엇인가?》 전집 제6권)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구원관 : 우치무라는 미국에 체류하고 있을 때 유니테리안(Unitarian)교도로부터 영향을 받아 '만인 구원론' 을 주장하였다. 물론 그는 성서에 '소수 구원론' 에 대한 구절이 있음을 인정하였지만, 소수 구원론의 필연적인 결과는 편협과 배척이며 이것으로 인해 수많은 종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때때로 부분을 사랑하시는 것은 이것으로 전체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소수를 구원하시는 것은 만인을 구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느님이 소수의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우주와 인류를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큰 이단이다" (《만인 구원》 전집 제5권)라고 하였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소수 구원론보다는 만인 구원론이 옳다는 것이다.
타종교관 : 무교회주의는 다른 종교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스도교의 적은 불교가 아니고 불교의 적은 그리스도교가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다른 종교들과의 관련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종교이다. 세계에 있는 많은 종교 중의 하나이며, 그것이 우수한 종교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독특하고 둘도 없는 유일한 종교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제는 그리스도교에 있는 것이 다른 종교에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불교 또는 유교 또는 신도는 그리스도교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그리스도교에는 다른 종교에 없는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교는 우주 유일의 종교이다"(《유일한 종교》 전집 제7권).
〔한국의 무교회주의 운동〕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당시의 한국 유학생(대표적으로 김교신, 함석헌)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한국의 무교회주의 운동에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한국에서의 무교회주의 운동은 우치무라의 일본 무교회주의 운동과는 달리, 즉각적으로 일제 치하의 한국 교회들로부터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당시, 김인서(金麟瑞)가 조선 장로교 평양신학교의 기관지 《신학지남》(神學之南) 제17권 4호(1930년 7월)에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씨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실어 무교회주의를 공박한 것은 이러한 공격과 저항의 한 실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김인서의 주장과 논조는 무교회주의의 옳고 그름과 본질은 차치하고라도 왜 하필이면 우리 민족을 통치하고 있는 일본 제국으로부터 그런 신앙을 받아들여야 하느냐는 식의 소박한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초한 반박이었다. 이에 대하여 김교신은 《성서 조선》 1930년 8~9호에 <우치무라 간조론(論)에 대하여>라는긴 반박문을 실어, 김인서를 정치적 열등 의식에 기초한 지나친 신경 과민이라 지적하고,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던 수많은 조선의 목사들을 예로 들면서 '일본' 을 다만 정치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좁은 도량을 질타하고, 일본 안에도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고 천황 불경(不敬) 사건으로 동경 제일고등학교 교수직까지 박탈당하였던 우치무라 같은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이라고 변호하였다. 또한 1957년에는 당시 정치 · 사회적 격변이나 국가적 논점이 제기될 때마다 서슴없이 발언해' 온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사상계》, 1957년 3월호)에 당시 가톨릭 경향신문사(京鄉新聞社)의 사장으로 있던 윤형중(尹亨重) 신부의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사상계》, 1957년 5월호)로 시작된 논쟁은 두 차례의 상호 공방전으로 끝났지만, 무교회주의자의 사회와 교회-여기서는 당시의 기성 교회, 특히 함석헌의 비판은 결국 가톨릭 교회로 향한다-를 향한 비판은 철저히 비판적이었고, 도전적이었다.
〔비판 및 평가〕 우치무라가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밝힌 신학적인 조직 체계는 뚜렷하지 않다. 또 그의 일반적인 성향에 비추어 볼 때 그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어떤 시도보다는 개개인의 변화와 당시의 일본이 처한 상황에서 이에 대한 현실적인 대답으로서 무교회주의를 주창하였고, 그의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절박한 어떤 신학상의 사정에서보다도 오히려 구미(歐美) 그리스도교에서 독립하고자 한 민족 자존적 자립 욕구와, 세속적 제도로 변한 일본의 교회와의 타협을 배격하는 정신에 의해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하나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무교회주의는 일본적인 주체적 그리스도교의 모색, 반(反)서양 그리스도교적 저항, 교회의 형식화에 대한 도전이요, 주체성 확립과 토착화의 모색 그리고 본질을 향한 개혁 의지가 그 토대를 이루고 있었다고 평가 할 수 있다. (→ 김교신 ; 함석헌)
※ 참고문헌 강돈구, <한국 무교회 운동의 종교사적 의의>, 《종교 다원주의와 종교 윤리》, 서울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4/ 양현혜, 《윤치호와 김교신 근대 조선에 있어서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기독교》, 1994/ 사와 마사히꼬(澤正彥), 《일본 기독교사》, 대한기 독교서회, 1995/ 노평구 편, 《김 교신과 한국 - 신앙 교육 애국의 생애》,경지사, 1975/ 유동식, 《한국 신학의 광맥 한국 신학 사상사 서설》,전망사, 1982/ 민경배, 《교회와 민족》, ,대한기독교출판사, 1981/ 경지사 편, 《김교신 전집》, 전 6권, 경지사, 1975/ 안병무 외 편, 《함석헌전집》, 전 20권, 한길사, 1983~1988/ Raymond A. Moore ed., Culture and Religion in Japanese-American Relations : Essays on Uchimura Kanzo, 1861~1930, Michigan Papers in Japanese Stuclies, No. 5, Ann Arbor, 1981/ John F. Howes, Uchimura Kanzo, Pacifism in Japan : The Christian and Socialist Tradition, Kyoto, 1978/ H. Byron Earhart, The New Religions of Japan : A Biblography of Western Language Materials, 2nd ed., Ann Arbor, 1983/ Alphonso M. Nebreda, Japanese Youth Confronts Religion : A Siciological Survey, Tokyo, 1967/ Charles W. Iglehart, A Century of Protestant Christianity in Japan, Rutland, Vt., and Tokyo, 1959/ Charles H. Germany, Protestant Theologies in Modem Japan, Tokyo, 1965/ Richard Henry Drummond, A History of Christianity in Japan, Grand Rapids, Mich., 1971. 〔吳將均〕
무교회주의
無敎會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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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무교회주의를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