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미국 디트로이트(Detroit) 대교구의 초대 대주교. 일본 교황 사절(1931~193). 1882년 5월 9일 미국 메릴랜드(Maryland) 주의 마운트 새비지(Mount Savage)에서 아일랜드계의 아버지 토마스(Thomas Mooney)와 어머니 사라(Sarah Heneghan) 사이의 일곱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5세 때 오하이오 주의 영스타운(Youngstown)으로 이사하여 성 골롬바 본당 학교에 입학하였다. 쉴피스회에서 운영하는 성 찰스 대학(St. Charles College)과 볼티모어에 있는 성 마리아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학사와 교사 자격을 최고 점수로 획득한 무니는, 1905년 10월 22일 신학을 더 공부하기 위
해 로마의 북아메리카 신학원(North American College)에 입학하여 1907년에 철학 박사 학위, 1909년에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0일 클리블랜드(Cleveland) 교구 소속으로 사제품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와 클리블랜드의 성 마리아 신학교에서 교의 신학을 가르쳤으며, 1916년에 클리블랜드에 설립된 주교좌 라틴어 학교에서 그 후 6년 동안 교장으로 재직했다. 1922년 8월 영스타운에 있는 성 페트릭 성당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으나, 6개월 후 북아메리카 신학원의 영성 지도자로 임명되어 로마로 건너갔다.
외교관 생활 : 1926년 1월 8일 교황 비오 11세는 무니를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바티칸의 외교관으로 임명하여 인도의 교황 사절로 파견했는데, 그는 그 해 1월 31일 북아메리카 신학원 성당에서 포교성성 장관 롯숨(W.van Rossum) 추기경으로부터 이레노폴리스(Irenopolis)의 명의 대주교로 서품되었다. 인도에서의 그의 능력은 오랫동안 논쟁 거리였던 보호권(Padroado) 문제에서 발휘되었다. 이 문제는 인도인 교구장 주교들과 인도 동부 지역의 본당들을 맡고 있는 포르투갈 선교사들 사이의 관할권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에 무니는 지난 4세기 동안 포르투갈 교회가 인도의 일부 신자들을 관리하였던 것을 끝내도록 교황청과 포르투갈 정부 사이의 협정이 체결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0년 9월 20일에는 야곱파 교회의 주교 이바니오스(Mar Ivanios)와 부주교 테오필로스(Mar Theophilos)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 일치시켜 이들이 다른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평신도들을 교회로 인도하도록 하였다. 인도에서 무니는 11개의 새 선교지를 설립했고, 3개 교구에 인도인 주교가 임명되도록 힘썼다. 인도에 도착한 지 5년 만인 1931년 2월 25일 일본의 제3대 교황 사절로 임명된 무니는, 우상 숭배인 신도(神道) 문제로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알고 자세한 조사 없이 신도 예절은 종교적이거나 전례적인 것이 아니라고 정의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의 가톨릭 신자들이 신도 예식에 참석하게 되었다.
로체스터의 주교 시절 : 1933년 8월 28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로체스터(Rochester) 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10월 12일 착좌식을 거행한 무니는, 같은 해 가톨릭 구제회(National Catholic Welfare Conference)의 행정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사회 활동부(Social Action Depart-ment) 의장으로 임명되었다. 사회 · 경제적으로 혼란하였던 1930년대에는 특히 레오 13세와 비오 11세 교황의 회칙에 드러난 가톨릭 사회 교리의 입장을 지지하기도하였다. 무니는 1935년 11월에 가톨릭 구제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두 번(1935~1939, 1941~1945)이나 역임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미국 교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또 '전쟁 비상 조치와 구제 주교위원회' (Bishops' War Emergency and Relief Committee)와 '가톨릭 봉사위원회' (National Catholic Community Service)의 평위원회 첫 번째 의장으로서 그는 사람들에게 영성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미군 위문 협회' (United Services Organi-zation)의 성직자위원회(Clergy Committee) 공동 의장을 맡았다. 또 가톨릭 · 유대인 ·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144명이 서명한 <세계 평화를 위한 7개 선언>(Seven-point Declaration forWorldPeace)의 작성에도 참여하였다.
디트로이트의 대주교 : 1937년 5월 22일 디트로이트 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되면서 무니는 그 해 8월 3일 교황사절 치코냐니(A.G. Cicognani) 대주교에 의해 디트로이트 대주교로 서임되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불경기와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에 무니 대주교는 노동 조합을 결성하려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의무를 강조하였으며, 대교구 내에서의 구체적인 사회 활동 계획을 만들고 그 적용을 위한 교육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대교구 내에 노동위원회를 설립하고 교황의 사회 교리를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192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했던 디트로이트 교구는 불경기로 인해 위기를 맞았는데, 무니 대주교가 부임하였던 1937년에는 빚이 약 18만 달러에 달하였다. 이에 그는 본당들의 재정 형태를 재편성하고 대교구에서 필요한 발전 자금을 모금하여 조성하였다. 이러한 결과로서 디트로이트 대교구는 100개가 넘는 새 본당 터를 사들였고, 노인들을 위한 가르멜 홀(Carmel Hall)과 마틴 쿤딕센터(Marin Kundig Center)를 개관하였다. 또 6만여 명의 가톨릭 어린이들을 위한 주교좌 회관이 세워졌고, 대교구의 8개 주에 사회 봉사 회관을 세웠으며, 비행 청소년들을 위해 마콘(Macon)에 보이스빌(Boysville)의 건립을 추진하였고 가톨릭 청년 기구(Catholic Youth Organization)를 발기하였다. 그리고 1949년에는 미시간 주의 플리머스(Plymouth)에 성 요한 교구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무니 대주교는 비오 12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어 1946년 2월 21일 추기경단 회의 때 서임되었다. 그가 디트로이트 교구장으로 재임했던 21년 동안 신자수는 55만 명에서 128만 8,000명으로 늘어났고, 본당수는 201개에서 300여 개로 증가하였다. 사망하기 얼마전에는 정신 박약 소녀들을 위한 자비의 성모학교(Our Lady ofProvidence School)를 축성하기도 하였던 무니 추기경은, 1958년 10월 25일 교황 선거를 위해 로마에 갔다가 북아메리카 신학원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여 10월 31일 디트로이트의 주교좌 성당에 묻혔다.
〔한국과의 관계〕 일본의 교황 사절로 부임한 무니 대주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1931년 9월 13일부터 13일 동안 개최된 한국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 당시 각 교구별로 작성하여 사용되던 지도서의 통일을 주제로 개최된 이 공의회를 위해 무니 대주교는 7월 18일부터 24일까지 대구대목구의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초대하여 일본에서 공의회 준비를 하였다. 9월 11일 부산을 통해 입국한 무니 대주교는 다음날 예비 모임을 명동 성당에서 갖고 13일에 장엄 미사로 한국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이 기간 동안 사회를 담당하였다. 공의회 행사 후 10월 8~11일 대구대 목구를 방문한 후 일본으로 돌아간 무니 대주교는 한국 공의회에서 정리된 결정문을 받아 포교성성에 보고하고, 교황청의 승인을 받아 1932년 6월 26일 공포하였다. 이 공의회의 결정문에서는 신사 참배를 미신으로 규정하였고 신자들의 참여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1932년 5월 상지대학교 학생들의 신사 참배 거부 사건으로 인하여 가톨릭계 학교와 신자 학생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무니 대주교는 신사 참배가 종교적인 것이 아닌 애국 정신의 표현이라는 공식 성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9월 30일 신사 참배가 국민적인 애국심의 표현이라는 문부성의 답변을 얻어낸 무니 대주교는, 1933년 1월 신사에서 행해 지는 예식에 신자들이 참석할 수 있다는 공식적인 지침을 교령으로 발표하였다. 이로 인해 가톨릭 신자들의 신사 참배가 가능해졌고, 일본 신자들만의 입장을 생각한 무니 대주교의 결정은 조선의 신자들에게는 일본의 억압이 더 심해지는 원인이 되었다. (→ 한국 공의회)
※ 참고문헌 F.X. Canfield, 9, pp. 1103~1105/ M. Claudia, 《CE》 7, pp. 335~337/《드망즈 주교 일기》, 가톨릭신문사, 1987/ 《가톨릭 사전》 Acta et Decreta Primi Concilii Regionalis Coreani 1931, Hongkong, 1932. [편찬실]
무니, 에드워드 프란시스 Mooney, Edward Fancis(1882~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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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니 추기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