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류성

無謬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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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은 진리의 성령께서 가톨릭 교회가 참된 신앙을 지켜 가도록 해왔으며, 항상 지켜 나가게 할 것이라는 교회의 믿음에 기초를 둔 교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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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류성은 진리의 성령께서 가톨릭 교회가 참된 신앙을 지켜 가도록 해왔으며, 항상 지켜 나가게 할 것이라는 교회의 믿음에 기초를 둔 교의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도록 위임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으로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교의. 일반적으로 무류성은 교황의 무류성으로 대표되지만, 세분하면 교회 전체와 주교단, 교황 등 세 가지 무류성으로 나누어진다.
I . 개 념
무류성을 뜻하는 라틴어 '인팔리빌리타스' (infallibili-tas)는 '속이다' 라는 의미의 '팔레레' (fallere)에서 유래하였다. 속임은 다른 사람을 속이는 '적극적 속임' 과 속임을 당하는 '수동적 속임' 으로 구분되는데, '인팔리빌리타스 는 이 두 가지 속임으로부터의 보호를 뜻한다. 따라서 무류성의 의미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 오류에 빠질 수 없다는 뜻이다.
무류성이란 용어의 긍정적 내용은 '진리' 혹은 '진실성' 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진리는 속이는 것과 반대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말라 2, 6 ; 잠언 11, 8 ; 12, 9). 본질적으로 무류성은 이미 주어진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성령의 선물이므로, 교회가 무류성에 근거하여 어떤 새로운 교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주어진 복음을 계속 믿고 그에 따라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교회는 자신의 무류성 때문에 어떤 종류의 오류나 잘못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이 말은 곧 교회가 성령의 특별하신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류성은 진리의 성령(요한 14, 16-17)께서 가톨릭 교회가 그 참된 신앙을 지켜 가도록 해왔으며, 항상 지켜 나가게 할 것이라는 교회의 믿음에 기초를 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교의이다.
교회의 무류성은 절대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성서의 무오성(無誤性, inerantia)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교회와 구약과 신약에서 계시의 증언을 하게 한 성령의 '감도' (inspiratio)와도 구별된다. 사도 시대 이후에 교회에 부여된 성령의 도우심(assistentia Spiritus Sancti)의 한 요소에 속하는 무류성은 예수 그리스도 이후, 계시의 종결로 말미암아 교회와 교의 역사의 발달에 대한 하느님 섭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에, 주어진 계시 진리에 대한 보다 깊고 폭 넓은 이해를 위한 교리의 발달에서 추론될 수 있는 명제이다.
II . 교회의 무류성
교회의 무류성은 교회 전체가 구원의 진리를 가르치거나 믿음에 있어서 오류에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에페 1, 23 ; 2, 15-16 : 갈라 3, 28 : 1고린 12, 13 : 로마 6, 5 ; 8, 2)이며, 그리스도의 정배(2고린 11, 2 ; 에페 5, 22-30 ; 묵시 19, 7 ; 21, 9-11)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골로 1, 18 ; 2, 19 ; 에페 1, 22 ; 4, 15-16 ; 5, 23 : 마태 25, 31). 이런 교회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질의 동일한 신앙을 가르치는 교 리에 오류가 있다면 그의 머리는 그리스도일 수 없고, 교회는 결코 그리스도의 몸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배필 일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전 신자를 대상으로 신앙의 진리를 가르칠 때 오류에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성서 내용(마태 16, 18 : 요한 14, 18 ; 마태 28, 20 ; 루가 10, 16)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성서 구절들은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을 오류에 빠짐없이 계속 수행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사도 시대의 사도들은 확신에 차서 교회 전체가 오류에 떨어질 수 없음을 선포하였다(갈라 1, 8 ; 4, 14 ; 2데살 2, 13 ; 1디모 3, 15). 이러한 성서 구절들은 사도들의 복음 선포가 무류함을 전제로 한 것이며, 교회 자신이 신앙의 진리를 수호하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의 사명과 역할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역할이 끝나고 그 다음의 사명과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의 사명과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의 보호 아래 그리스도처럼 인간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그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역할은 사도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마칠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무류성 역시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일 사도 시대 이후부터 교회가 오류에 빠질 수 있다면, 그런 교회는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에 빠지기 때문이 다(마태 15, 14). 무류성은 사도들에게 필요하였듯이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도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시오"(마르 16, 15 ; 참조 : 마태 28, 18-20 ; 사도 1, 8)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위임한 사명은 그 후계자들에게도 위탁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당신을 믿고 교회에 순종하는 신자들을 잘못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4장 11-14절에서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앎과 믿음으로 하나가 된 신자들은 신자로서 맡겨진 각자의 임무를 잘 수행해야 하며, 간교한 유혹과 속임수와 잘못된 교설에 빠지지 말라고 권고한다. 그런데 사도 시대 이후 교회가 오류에 떨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면,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특히 4장 13절은 믿음과 앎에 있어서의 참 그리스도의 충만한 실현을 가리킨다.
성서는 교회의 무류성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명백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교부들과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학자들은 전체로서의 교회는 신앙에 있어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런 생각은 동방 교회뿐만 아니라 초기 프로테스탄트에서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의 이런 무류성 주장에 대해 근거가 없다며 반대하는 이들이 있어 왔고 현대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만일 교회에 주어져 있는 무류성의 특전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결과를 낳겠는가? 그리스도와 성령은 오류에 빠질 수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교회 내의 그리스도의 현존 약속과 성령의 활동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류를 가르칠 수 있는 교회를 통해 참된 신앙을 지닐 수 없게 된다. 참된 신앙은 의혹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가르치는 신앙 교리나 윤리 사항에 관한 한 오류가 없는 권위와 의심할 수 없는 신뢰성을 자기 직책의 본질상 갖추어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 12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천명하였다. "성령의 도유(塗油)를 받는 신도들의 총체(總體)는(1요한 2, 20. 27) 믿음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니,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같은 견해를 표시 할 때에 백성 전체의 초자연적 신앙심(sensus fide)에서 이 특성이 드러난다. 과연 하느님의 백성은 진리의 성령께서 일으켜 주시고 지탱해 주시는 이 신앙심으로 성스러운 교도직(敎導職)의 지도를 받으며, 탈선함이 없이, 성도들에게 일찍이 전해진 신앙(S. Th. I , 2, 2)에 충실하여, 바른 판단으로 그 신앙에 더욱 깊어지며 보다 충만히 그 신앙을 실생활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교도권을 충실히 따르는 사람은 이미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고 진실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S. Th. I, 2, 13)." 여기서 말하는 신앙심은 새로운 계시를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정통 신앙을 지닌 사람이 거의 본능적으로 신앙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분별력을 성령께로부터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앙심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접한 신자들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신자들의 신앙심이 옳은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가려내는 판단 기준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이며, 교회의 예언직이다. 교회의 예언 직무에서 나오는 목자들의 교도권은 신자 전체의 신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 전체의 신앙을 전제로 한다. 목자들도 목자로서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듣고 믿는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무류성이 이야기될 때는 전체 교회의 견지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교도권의 무류성은 전체 교회 신앙의 무류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Ⅲ . 주교단의 무류성
교회는 <계시 헌장>(Dei Verbum)에서 규정하고 있듯이 무엇보다 먼저 듣는 교회이고, 그 다음이 가르치는 교회이다. 무류성은 성령에게서 비롯되어 가르치는 조직체와 구원의 소식을 성실히 들으며 믿는 무리 양쪽 모두에게 흘러 든다. 따라서 무류성의 주체는 성령이 살아 계시고 작용하시는 전체로서의 교회이다. 가르치는 교회의 권위있는 기관은 교회의 구조상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전체 주교단이다. 주교단이 가르칠 때, 교회는 주교단이 교회를 대변한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이것은 각 지역 교회에대한 일반적 · 보편적 교도권에 해당된다. 보편 교회의 주교단의 대변성은 공의회에서 주교들이 만날 때 특별한 방식으로 확인되는데, 이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서의 무류성이란 권리를 소유하게 된다. 물론 각 주교들 이 개별적으로 무류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교들이 주교단의 단장인 교황을 중심으로 일치하여 신앙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도권은 오류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주교단의 무류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전체 교회가 교도권의 지도하에서 믿음을 가짐에 있어 오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체 교회의 무류성은 곧 주교단의 무류성의 토대가 된다.
공의회는 주교단이 어떤 공통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갖는 회의이다. 이때 주교단의 공식 가르침은 특별히 명확하고 효율적이 된다. 다시 말해 이때 주교단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계시 말씀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일한 사도적 봉사의 위치에 있게 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의 말을 듣는 사람은 곧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 (루가 10, 16 ; 마태 10, 40 ; 요한 13, 20)이라고 하였다. 바오로 사도 역시, 디도에게 "내가 그대를 그레데 섬에 남게 한 것은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그대에게 명한 대로 도시마다 장로들을 임명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디도 1, 5)라고 하였다. 그리고 디모테오에게는 '사람들이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 (1디모 1, 3)하면서, "그대에게 맡겨진 것을 간직하시오" (1디모 6, 20)라고 하였다. 이 성서 구절에서 사도들은 주님을 대신하여 구원의 진리를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 그 사도들의 후계자들이 주교들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복음의 올바른 전파에 대한 관심은 교부 시대에도 줄어들지 않았다. 교부들은 과거의 규준과 신앙의유산을 보존해야 할 교회의 임무를 강조하면서, 성령께서 그릇된 가르침에서 복음을 보호해 주시리라고 믿었다. 사도적 가르침의 전통의 초기 역사는 명백하지 않으나, 2세기 말 특히 그노시스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교부들은 신뢰할 만한 사도적 가르침의 전파를 주교좌와 연관시켰다. 물론 주교좌 중에서도 로마가 특별한 중요성을 얻었다. 아타나시오(297-373)는 제1차 니체아 공의회(325)에서 선포된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무류성 문제에 관하여 결정적인 교의를 선포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에 대해서만 구속력 있는 선언(DS 3065~3075)을 하였고, 주교단의 무류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포괄적으로 표현하였다. "성서와 전승 안에 내포되어 있고, 또 교회가 장엄한 선언이나 통상 보편 교도권을 통해 믿을 교리로 제시한 모든 것들은 신적이고 보편적인 가톨릭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DS 3011).
이와 같이 교회 전통은 주교단의 무류성에 대해 의심없이 믿어 왔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주교단의 무류성에 대해 <교회 헌장> 25항에서 다음과 같이 개괄적으로 천명하였다. "각 주교들이 무류(無謬)의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온 세상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서로 일치하고 또 베드로의 후계자와 일치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정을 유권적으로 가르칠 때에 결정적인 한 가지 판단에 의견의 일치를 본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교리를 오류 없이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주교들이 공의회에 모여서 세계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가르치고 판단할 때에 무류성은 더욱 명백한 것이니, 이 결정 사항은 신앙의 순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 헌장>은 주교단의 무류성을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그중 하나는 전체 주교단의 공통된 가르침을 의미하는 '통상 보편 교도권' 이고, 다른 하나는 주교들이 공의회를 통하여 가르치거나 교황이 교황의 직위를 발동하여(ex cathedra) 가르치는 것으로 비상 교도권 (magisterium extraordinarium)이라고도 하는 '장엄 교도권'이다. 어느 형태이든 중요한 것은 교황과의 사도적 일치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에,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의 교류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교단의 으뜸(Collegii Episcoporum caput)인 교황이 단체 행위에서 그만의 특별한 역할을 행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최고의 단체적인 가르침의 행위도, 무류성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주교단은 단장인 로마 교황과 더불어 세계 교회에 대하여 완전한 최고 권한의 주체가 된다. 그러나 이 단장 없이는 이 권한의 주체가 결코 될 수 없으므로, 로마 교황의 동의 없이는 이 권한을 행사할 수 없다...이 주교단이 교회 전체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최고의 권한은 공의회에서 장엄하게 행사된다. 그러나 베드로의 후계자가 공의회로 확인하거나 적어도 공의회로 받아들여야만 공의회가 성립될 수 있다" (교회 22항)고 명백하게 밝혔다.
교황과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주교단은 결국 전체 교회의 대표이기 때문에 이들의 무류성은 바로 전체 교회의 무류성이 드러난 특별한 예가 된다. 따라서 주교단의 무류성과 교황의 무류성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필요와 경우에 따라 전체 교회의 무류성을 드러내는 두 가지 방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IV . 교황의 무류성
〔공의회 결정 내용〕 주교단의 무류성과 함께 전체 교회의 무류성의 특별한 예인 교황의 무류성은 1870년 제 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정적인 교리로 선포되었다. "교황이 교황좌에서(ex cathedra) 선언할 때, 다시 말해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자요 스승으로서의 그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그의 최고의 사도적 권위로 전체 교회에서 견지되어야 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의를 결정할 때, 그는 성 베드로를 통하여 약속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하여 무류성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의 이러한 최종 결정들은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ex sese, non autem ex consensu ecclesiae) 변경될 수 없는 것들이 된다. 이것은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교의이다" (DS 3074). 이 말은 교황이 최고의 사도적 권좌에서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 최종 판결을 내릴 경우, 그 결정은 무류하다는 선언이다. 교황은 공의회에서 주교단의 단장으로서 다른 주교들과 함께 장엄 교도권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단독으로 장엄 교도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판결의 독립성은 결코 고립적 독자성은 아니다.
신앙 선포의 목적은 요한 복음 19장 35절에 명기되어있는 대로 신자 대중이 믿게 하려는 데에 있다. 따라서 교황이 단독으로 내린 무류한 결정은 사실상 교회의 동의(consensu ecclesiae)에 그 목적이 있고, 그것에 의해 생명력을 가진다. 그러므로 동방 교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표현인 "교회의 동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는 단지 법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비준의 행위만을 배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류적 선언들은 전체 교회에서 나와, 전체 교회의 신앙 의식 안에 흡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헌장>을 통해 교황의 결정은 "로마 교황이 개인 자격으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교회 자체의 무류의 은사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세계 교회의 최고 스승" 으로서의 행위라고 가르친다(25항).
[〔조 건〕 교황의 무류성은 직무 자체의 자격이 아니다. 즉 교황이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무류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들의 최고 스승으로서 교리상의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에 무류성을 지닌다는 말이다. 따라서 "교황에게는 무류성이 있다" 라는 표현보다는, "교황에 의한 교도권 행사는 일정한 조건하에서 무류성을 지닌다"라고 함이 옳다.
교도권은 성서와 교회 전승에 의하여 규제를 받는 규범이다. 그러므로 무류성에 의한 교리 결정의 목적은 특정한 가르침이 사실상 하느님에 의해 계시된 것임을 확정하는 데에 있다. 무류성은 계시의 보존과 해설을 위해 약속되어졌기에 계시와 관련되며, 그 내용은 신앙과 도덕 문제에 제한되어 나타난다. 따라서 무류성은 무류성의 주체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대상에 의해서도 결정되는데, 이는 무류성을 일률적으로 적용함으로써 무류성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말 것을 경고하는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으로부터 무류성의 위엄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황의 무류성이 란, 교황이 어떤 특별한 계시 진리나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교황은 새로운 계시를 받는 이가 아니라, 다만 이미 주어진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최고의 스승일 뿐이다. "베드로의 후계자들에게 성령께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의 계시로 새로운 교의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도들이 전한 계시, 즉 신앙의 유산을 훌륭하게 보존하고 충실히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DS 3070).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의 양 전체를 돌 볼 책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성서와 전승에 의한 증명〕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에서 알 수 있듯이,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기초이고(이사 28, 14-18),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목표로 하는 교회의 관리권을 주는 것이며, 무엇을 맺고 푸는 권한은 그것에 대한 전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의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인 로마 교황이 교회의 토대가 되고 교회를 지탱할 기초가 되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약 교황의 사도좌 선언의 장엄 교도권이 무류하지 않다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은 결코 교회의 토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시몬. 시몬. 보시오, 사탄은 여러분을 마치 밀알처럼 키질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당신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언젠가 돌아오거든 당신 형제들을 굳세게 하시오"(루가 22, 31-32). 이 구절은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보다 한층 더 베드로의 특수한 지위를 강조한다.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인 그리스도의 기도 덕분에, 베드로는 하느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받아 그의 신앙은 반석같이 되어 동료 사도들에게도 힘이 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의 수위권과 무류권의 보장을 여실히 보여 준다. 요한 복음 21장 15-17절에서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내 어린 양들을 먹여 기르시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양 떼의 목자로 임명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게 하는데, 이는 교회 내의 양과 어린 양, 즉 교회 내의 모든 구성원들을 돌볼 책임과 권한이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주어졌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특히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가톨릭 교회와는 달리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말씀들은 베드로 사도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지 그 후계자들에게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는 후계자 문제를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으나, 그리스도가 세상 종말까지 계속될 교회를 세운 점(마태 28, 20 : 요한 13-17장)을 감안한다면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교회 20항 참조). 사도들의 직무 중에 교회 창립에 필요한 권한은 계승될 수 없는 것이지만, 교회를 구성하여 유지하고 계시 진리를 보존 · 해석 · 교도하는 데 필요한 권한은 계승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전통의 근거〕 초대 교회 400년 동안 로마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뚜렷한 기록은 없지만 로마 교회를 신앙 일치의 중심으로, 혹은 신앙과 도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확실하고 안전한 규준으로 여기는 여러 정황들로 보아 로마 주교의 무류성을 인정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5세기에 교황 인노첸시오 1세(402~417)는 썩지 않는 원천에서 나오는 깨끗한 시냇물처럼 모든 교회는 로마로부터 그들이 행해야 할 모든 것을 받아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써 교황의 무류성을 분명히 드러냈다(DS217). 그는 <카르타고 교회에 보낸 서간>에서 "당신들은 교의상의 문제를 결정하는 데 있어 오랜 전통의 모범을 지키기 위
해 결정하기 전에 로마와 상의함으로써 교회의 힘을 강하게 하였다. 그것은 당신들이 사도 성좌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 판단에 따를 것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며, 호르미스다 교황(514~523)은 로마에서 "가톨릭 교회는 언제나 때묻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져 왔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로마가 늘 신앙의 순수성을 보호한다는 확신은 중세까지 지속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경의 새로운 편집은 교황만의 권위에 속하는 것이며, 교황은 오류를 범할 수 없는 보편 교회를 대변하기 때문에 신앙 문제에 있어서는 그의 판단을 따라야 한다고 하였다. 또 1439년부터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는 완전한 교도권이 로마 교황에게 주어져 있음을 선언함으로써 교황의 무류성을 인정하였다. "교황은 사도들의 으뜸인 성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전 교회의 머리이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아버지이고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참 대리자이다. 그리고 교황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맡긴 전체 교회를 사목하고 통치하는 완전한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DS 1307). 그 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의 무류성을 신조로 선포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앞서 열린 공의회의 결정을 재확인함으로써 교황의 무류성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주교단의 으뜸이신 로마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 신도들의 최고 목자와 스승으로서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루가 22, 32)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적으로 선포할 때에, 교황은 직무상의 무류성을 향유한다·····로마 교황이나 교황과 더불어 주교단이 교리를 결정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하고 일치해야 할 계시를 표준 삼아 선언하는 것이다"(교회 25항).
V . 무류성 교의의 역사 초대 교회 시대에는 "로마는 결코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로마 교회와 로마 주교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주장이 견지되었는데, 이것은 로마가 새 교리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주교 회의와 공의회에 의해 시도된 '재형성' (refor-mulation)을 물려받았음을 확언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커짐에 따라, 신앙 문제에 있어 교 황의 결정은 최종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6세기에 처음 나타난 "제일의 주교좌는 누구에 의해서도 판단받지 않는다" 라는 합법적인 문구는 신앙과 도덕 문제에 있어서 교황의 최고 가르침의 권위를 보증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무류성' 이란 단어는 교황의 교도권과 관련되었는데, 신앙 문제에 관한 로마 교황의 가르침이 '오류 없는' 진리라고 처음으로 표현한 사람은 14세기의 신학자 테레니(GuidoTerreni, 1260~1342)였다.
중세의 교회법학자들 : 13세기 중엽까지 교황의 무류성을 포함한 교회 구조의 제반 문제에 대한 연구와 탐색은 신학자들보다 교회법학자들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졌다. 교회의 오류 없는 신앙 유지에 대한 문제를 거듭 논의한 교회법학자들은, 교황만이 그 신앙의 안정을 위한 보증이 될 수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교회법학자들은 루가 복음 22장 32절은 베드로에게 통치에 있어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어 최후까지 인내할 은총을 약속하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베드로에게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은 무류성의 보장이 아닌 교회의 영속성의 보장으로 여겼다. 그로 인해
중세의 교회법학자들의 논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교황과 그 신앙이 결코 없어질 수 없는 보편 교회를 구분짓는 정도에 그쳤고,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현대 교리에 가까운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보나벤투라 : 1254년 탁발 수도회와 파리 대학 교의 학자들 사이의 복잡한 갈등이 기폭제가 되어 새로운 교회론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일반인들은 탁발 수도회의 행동을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생활 양식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당시 탁발 수도자들은 전적으로 교황의 지지에 의존하였기에, 그들은 자연적으로 교황이 지닌 힘의 본질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의 학자들과의 논쟁 중에 교황 무류성의 교리만이 아니라, 그 교리의 발달 과정에서 연계 된 많은 신학적 문제들, 예를 들면 성서 권위에 대한 문제, 성전(聖傳, tradition)의 의미, 교의적 선포의 불개정 성(imefommability) 등에 대한 새로운 평가도 생겨났다.
당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보나벤투라(St. Bonaventura, 1217~1274)는 "모든 교회적 판단은 교황에게 집중되어있다" 고 주장하였다. '13세기 교황 군주 정치의 주요 이론가' 라고 불려진 그는 교황 무류성 역사에 있어 과도기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그리스도의 절대적 가난에 관한 교리의 고수와 교회의 생활에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co of Assisi)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보나벤투라가 프란치스코의 계시 적 역할을 되풀이해서 주장하고, 프란치스코를 새로운 계시의 보유자로 분명하게 규정 지은 것은 새 계시가 어떻게 증명될 수 있느냐라는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보나 벤투라는 교황의 사도적 청빈에 대한 가르침에 잘못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확신하였으나, 로마 교회의 모든 교의적 선포가-교황 개인의 선포를 포함하여 -반드시 무류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 로마 교 회는 '신앙과 도덕의 진리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나라 중에서 격상된' 것이었고, 교황의 권위는 너무도 뛰어나 모든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보나벤투라는 신앙의 문제에 있어 교황이 최고의 재판관이라는 교회법 학자들의 교리를 인정하기는 하였으나, 교황의 판단이 반드시 무류적이고 개정할 수 없다는 문제에까지 접근하지는 못하였다.
올리비 :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있어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관해 긍정적으로 대답한 최초의 사상가는 올리비(Petus Joannes Olivi, 1248/1249~1298)였다. 그에게 있어서, 교황은 신앙 문제에 관한 한 최고의 재판관이었다. 교황은 신적 진리에 대해서 '함축적이었던 것을 해명해' 낼 수 있으며, 새로운 계시를 인증한다는 의미에서 신앙의 내용을 덧붙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리비는 교황은 이미 확립된 신앙의 진리를 뒤집을 수는 없고, 만약 그렇게 시도를 한다면 이단이 되거나 가짜 교황(pseudo-pope)이 된다고 《포기에 대한 문제》(Quaestio de renuntiaione)에서 주장하였다. 올리비의 전체적인 입장은 프란치스코회의 생활 방식을 인정하는 교황 선포에 대한 불침범성을 전제로 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프란치스코의 청빈 교리를 단순한 교회 규율의 문제가 아닌 신적 계시 진리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었다.
또한 올리비는, 교황의 보편적인 힘은 교황이 오류가 없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불가능하고, 그 힘이 고귀하고 독립적일수록 더욱 무결하다고 주장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이 잘못된 규칙을 따르도록 허락하시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은 교황이 물려받은 것을 믿고 따르도록 되어 있다. 하느님은 직접 세우신 로마좌를 언제나 보호하시므로 교황은 오류를 저지를 수 없다는 가정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올리비는 "로마 교회는 결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The Roman church has never erred)라는 교회법전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그런데 교회법학자들은 이 로마 교회를 신심 깊은 모든 이들 전체로 생각한 데 반해, 올리비는 개인인 교황의 실패 없는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루가 복음 22장 32절을 그리스도가 "교회의 한 사람" (in the person of the church) 즉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설명하여, 보편 교회의 불패성(不敗性) 교리는 무류적 교황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간다베의 헨리코와 둔스 스코투스 : 올리비가 교황의 무류성 개념을 형성한 지 40년이 지난 후, 이 교리의 발달에도 균열이 생겨났다. 14세기 초 탁발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의 오래된 논쟁,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일어난 영적 권위와 현세적 권위 사이의 갈등에 자극받아, 교황의 힘에 관한 많은 새로운 글들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런 글들은 교황의 무류성 문제를 무시했는 데, 그 이유는 교회와 국가의 갈등에 있어 교황의 영향력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Giles of Rome, Henry of Cremona, James of Viterbo, Alvarus Pelagius, Augustine Triumphus 등)도 이전 교황들의 모든 결정들이 무류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1280~1320년 사이에는 교황 무류성 이론에 관하여 어떤 주요 논쟁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계시된 진리의 근원으로서의 성서와 교회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은 1300년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하나의 용해될 수 없는 전체 안에 '함께 내재하는' 것으로 여겼던 계시의 두 근원(성서와 성전)을 분리되고 병렬적인 권위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일반 학자였던 헨리코(Henicus Gandavensis, 1217~1293)와 프란 치스코회 철학자였던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5~1308)의 글에서 이런 경향이 가장 잘 입증되는데, 헨리코는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반면에, 스코투스는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계시의 중요성과 기록되거나 혹은 기록되지 않은 모든 신앙의 진리에 대한 해석자로서 교회의 오류 없는 권위를 강조하였다.
헨리코는 성서 이후의 계시를 참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교회 가르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신학자들의 역할도 중요하게 보지 않은 것이 헨리코 교회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헨리코는 성서의 불변성을 언급하면서 '힘의 열쇠' (key of power)는 교회의 통치자에게 속하고, '지식의 열쇠' (key of knowledge)는 박사들에게 속한다고 기록하였다. 특히 교회의 불패성과 무오성에 대한 헨리코의 해석은 아주 과격하다. 그에 따르면, 참된 교회는 성서에 충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교회는 결코 참된 교회가 아니고 단순히 배교자들의 집단일 뿐이라고 여겼다. 중세의 이단자들 중 일부도 이런 생각을 가졌었지만, 헨리코는 이것을 정통적 · 학문적 교회론의 본줄기에 끌어들인 최초의 인물이었다. 프란치스코회의 거장 스코투스는 헨리코와 가장 정반대의 입장을 지녔던 사람이다. 그는 교회를 성서상의 계시와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그리스도교 계시의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안내자로 되풀이하여 제시하였는데,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어떤 소수의 숨은 집단이 아니라 교황과 공의회를 통해 말하는 제도적 교회였다. 스코투스는 '보편적 계시' (general revelation)는 성서와 더불어 끝났으나, 신약성서에서 발견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도 들이 쓰고 가르쳤던 것과 또 교회가 계시를 통해 배웠던 것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도들이 물려주지는 않았으나 교회는 성령의 명령으로 제정한 많은 것들도 보존하며 가르쳐야 한다" (Lectura, I,d. 11 n. 17)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신적 진리 자체는 변하지 않으나, 하느님이 끝없이 인간에게 진리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부여하시는데, 이 통찰력은 교회의 권위를 통해 신앙의 진리로 확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성전(聖傳)은 하
느님이 물려주신 것이고, 새 전통도 오랜 전통만큼이나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1300년경에는 교회의 무오성과 교황의 무류성 사이의 격차가 상당히 벌어졌다. 스코투스와 도미니코 수도회의 신학자 나탈리스(H. Natalis, 1250/1260~1323)와 팔루의 베드로(Peter de la Palu, 1277~1342)는 교황 무류성 이론에 접근하였으나, 교황의 무류성 이론이 건전하지 못하고 방어할 수 없는 이론으로 여기고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았다. 교황의 무류성 이론은 교황과 교회의 나머지 부분과의 관계에 관한 일련의 가정들에 달려 있다. 현대 신학자들이 말하듯이, 교황의 무류성은 교회의 무류성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따라서 무류성 이론에서는 그리스도가 처음 확립한 교회의 구조-그리스도, 베드로, 사도들 그리고 신자들-를 설명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14세기 초에는 이것과 관련된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되었다. 공의회 우위설(conciliarismus)을 주장하던 이들과 주교들은 베드로가 모든 사도들과 힘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론적 토대를 신약에 의존하였고, 도미니코회 수도자들 중 극단적 교황주의자들은 같은 구절의 성서에서 그 반대 결론을 끌어냈으며,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완벽한 복음적 청빈의 실천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교회 내에서 사도적 삶의 지속성과 사도적 계승 이론에 대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였다. 더욱이 이 논쟁들은 1320년대에 시작된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새로운 고찰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교황 요한 22세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 : 교황 요한 22세의 재임 기간(1316~1334) 동안 올리비의 교황 무류성 교리가 활발하게 재개되었다. 이 교리의 재주장은 올리비가 처음 그것을 형성하였을 때처럼, 프란치스코회의 청빈에 대한 복잡한 투쟁 중에 나타났다. 교황 요한 22세는 프란치스코회의 생활은 그리스도가 사도들에게 계시한 완전한 삶의 방식이라는 프란치스코회의 주장을 담아 니콜라오 3세 교황(1277~1280)이 1279년에 발표한 교황령 <엑시잇 귀 세미낫>(Exit qui seminat)의 규정을 1322년에 폐지하고, 그 이듬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청빈에 대한 새 교의를 교황령 〈쿰 인테르 논눌로스〉(Cuminter nonnullos)를 통해 발표하였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회 지지자들은 <엑시잇 귀 세미낫〉에 들어 있는 교리는 본질적으로 고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교황 무류성 이론을 발전시켰다.
'지식의 열쇠' 교리는 13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교황의 무류성 이론과는 특별한 관련이 없었다. 교회법학자들은 오로지 '힘의 열쇠' 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교황의 '지식의 열쇠' 가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관념은 1324년 5월에 발표된 <작센하우젠 탄원서> (Sachsenhausen Appellation)의 부록을 작성한 어느 프란치스코회 수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는 교황 무류성 이론에 대한 새로운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교황 무류성에 관한 토론을 가톨릭 교회론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데 있다. 정통적인 학자들과 교황들은 이러한 혁신적인 교리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더디었지만, 1324 년부터는 교황이 개인적으로 무류적일 수 있다는 개념이 가톨릭 교회론에서 결코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교황 요한 22세에게 있어 지식의 열쇠와 힘의 열쇠 중 하나만으로 만족해야 한다면, 본질적인 열쇠는 힘의 열쇠이다. 교황 요한 22세는 통치적 입법자로서 그의 선임자의 어떤 교령도 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을 뿐만 아 니라 결코 이 주장을 철회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1324년부터 그는 신앙의 조항에 대한 선임자의 어떤 교령도 취소하지 않았다. 이렇게 태도가 변한 이유는 명백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교황에게 무류적이고 따라서 개정할수 없는 교의적 선포의 힘을 부여하는 모든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것은 결국 로마좌에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거 30년 동안 공의회 우위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신앙 문제에 있어 교황은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교황 개인의 잘못을 자주 강조하였던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교황 요한 22세와 프란치스코회 사이의 논쟁의 마지막 단계는 수도회 총장이었던 체세나의 미카엘(Michael di Cesena)이 주도한 몇몇 고위 간부들의 공공연한 반역에서 정점에 달하였다. 이것은 미카엘이 참된 교황은 과오 없는 '지식의 열쇠' 를 소유하였다는 이론을 재천명하여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점과 1327~1328년 사이에 영국의 신학자 오컴(William of Ockham, 1285?~1349?)과 함께 활동하였다는 점이 교황 무류성 이론의 발달에 중요하다. 오컴은 중세 후반의 교회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교황이 언제 무류적이며, 언제 이단적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가 물려받은 과제였다.
오컴 : 보나벤투라의 보편 교회의 무오성에 대한 가르침, 헨리코의 불패성 교리의 전개, 올리비의 참된 교황의 무류성 주장 등 과거의 이론을 오컴은 새로운 양식으로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오컴의 교회론은 가톨릭 사상의 두 가지 주된 전통을 새롭게 종합한 것이었다. 즉 첫째는 교황을 포함한 어떤 가톨릭 신자도 이단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보편 교회의 불패성을 강조한 고전적 교회법학자들의 전통이고, 둘째는 교회의 무류성과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리스도교 진리의 점진적 계시 그리고 새로이 계시된 진리의 승인자로서의 교황의 역할을 강조한 프란치스코회 신학 전통이다. 오컴은 교회의 무류성과 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교회의 우두머리로서 교황에 의해 발표된 교황령의 불개정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의된 교황 무류성 교리의 필수적 요인들이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발생하는 이단의 추세에 반하여, 가톨릭의 건전한 정의들을 수립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한 오컴은, 자신의 논문 <90일 간의 일>(Opus nonaginta dierum)에서 과거의 참된 교황들의 정의는 불변적이고 개정할 수 없으며, 그것들이 모든 시대의 가톨릭 진리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그의 주장은 모든 신적 진리는 성서에 포함되어 있고, 보편 교회의 가르침은 실수 없이 성서 본문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하느님은 교회를 통해 성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는 신앙의 진리도 계시하신다고 주장하였다.
오컴은 교회에 의해 정의된 모든 신앙의 진리는 성서적 계시 혹은 성서 외적(extra-Scriptual) 계시에서 나와야 한다고 하였다. 교회의 결정은 이미 존재하는 진리에 새 정의를 부과할 수는 있으나, 새 진리를 만들어 넣지는 못한다. 중세 신학자들은 교회 통치부의 어떤 기관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물었고, 현대 신학자들은 제도적 교회의 어떤 선포가 특별히 무류적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오컴은 참된 교황의 정의는 신앙의 진리를 불변한 것으로 확립하나, 모든 교황의 정의가 참되지는 않다고 하였다. 문제는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다. 오컴의 주장은 참된 교황의 선포가 불변의 가톨릭 진리를 확립하였다면, 잘못된 선포를 한 교황은 분명히 참된 교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컴의 논지는 가톨릭 진리는 불변하게 존재하였고, 확실히 그 진리를 규명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는 참된 교황의 선포에 의존할 수 있고, 교황의 어느 선포가 참된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성서와 '오류를 범할 수 없는 보편 교회' 의 교리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성서와 교리의 정의에 대한 참된 해석을 해줄 안내자를 찾느냐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오컴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오류 없는 로마 교회만이 보편 교회라는 생각과, 공의회는 교황보다 우월하기에 신앙 문제에 있어 교황을 단죄할 수 있다는 것은 14세기 초 교회법 학자들의 생각과 일치하지만, 오컴은 이단으로 기소된 교황에 대한 반발을 정당화하기 위해 공의회에 호소할 필요가 실제로는 없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일반 공의회가 보편 교회를 적절하게 대변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 통치부의 모든 다른 기관들처럼, 공의회도 신앙에 있어 잘못을 할 수 있다고 오컴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의 생각은 그 시대의 일반적 견해와는 다른 점이었다. 이것은 과거의 두 교리-보편 교회는 참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교 리(교회의 무류성)와 교회는 단 몇 명의 성원으로 줄어들더라도 살아 남으리라는 교리(교회의 불패성)-를 새롭게 결합함으로써 도달한 결론이었다. 오컴은 신앙의 진리는 어떤 한 구성원도 그것에 이견이 없을 때만이 확실하게 확립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오컴은 가톨릭 교회의 모든 개인은 자기 신앙의 지식의 빛에 의해 교황 선언의 정통성을 판단할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고 하였다. 결국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 신앙에 있어서의 성(unity in faith)을 주장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극단적 분파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끝났다.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교황의 어떤 선언이 무류적인지를 스스로 결정할 의무와 권리를 지닌다면, 교황의 무류성은 교회적 권위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 되는 셈이다.
테레니 : 테레니는 그의 모든 저술을 통해 교황 무류성 교리가 당시 교황들의 권위를 방어하고 고양시키는데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를 시사하였다. 그는 교황 무류성, 가톨릭 교리의 원천, 성전과 성서와의 관계 등에 관해 너무도 '정확하게' 썼기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그가 다시 자신의 글을 읽더라도 단 한마디도 고칠 필요성이 없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한 원천으로 성서의 독특한 권위를 고집하면서, 교황의 무류성을 명백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합법적으로 선출된 교황의 공식적 가르침이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출발점에서부터 배제시켰다. 성령께서 교황의 정의가 선포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그 정의는 참된 신앙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겼다. 테레니가 교황 무류성의 주체를 가장 정확하게 정의 내렸다면, 무류성의 대상-성서적 가르침만이 아니라, 성서 외 전통-을 더 정확히 지적한 이는 오컴이었다. 테레니가 펼친 교리의 본질은, 교황이 공식적으로 선포한 교리는 무류적이며, 만일 그가 사적 견해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자신의 잘못을 공식적 정의로 교회에 부과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막으신다는 것이다.
16세기에는 가톨릭 신학에 교황 개인의 무류성 교리도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피기우스(Albert Pighius, 1490~1542)는 교황은 결코 이단으로 떨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고, 벨라르미노(R.F.R. Bellarminus, 1542~1621)는 교황은 공식적 선언에서는 확실히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아마 개인적 의견에서도 오류를 범하지 않으리라고 주장하였다. 수아레스(Fancisco Suarez, 1548~1617)는 '지식의 열쇠' 를 다시 한번 강조했고, 17세기에는 신학적 갈리아주의(Gallicanismus)가 교황의 무류성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였으며, 교황 지상주의(ultramontanismus) 신학자들은 교황은 개인적으로도 무류적이라고 더욱 강조하였다. 이때부터 교황 무류성 교리가 교황 지상주의 신학자들에 의하여 보편적으로 가르쳐지게 되었다. 교황의 무류성 교리는 13세기에 쟁점화되어,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끝없는 논란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의되었다. (⇦ 교황 무류성 ; 교황좌 선언 ; 성좌 선언 ; → 갈리아주의 ; 교도권 ; 교황 지상주의)
※ 참고문헌  H. Fries · J. Finsterhölzl, 《SM》 4, pp. 539~552/ G. Quell · G. Kittel · R. Bultmann, 《TDNT》 1, pp. 232~2471 F.A. Sul-livan, Encyclopedia Americans, vol. 15, p. 136/ AA.VV., Teaching Authority & Infallibility in the Church, Minneapolis, 1978/ F.X. Lawlor, 《NCE》7, pp. 496~497/ B. Tierney, Origins of Papal Infallibility 1150~1350, Leiden, 1988/ J. Gibbons, 장면 역, 《교부들의 신앙》, 가톨릭 출판사, 1993/ 정하권, 《교회론》 2, 신학 총서 19, 분도출판사, 1981/ L. Elders et al.,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해설 총서》 2, 성바 오로출판사, 1991. [徐炅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