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제2대 대구 대목구장. 세례명은 제르마노. 한국명은 문제만(文濟萬). 1876년 9월 19일 프랑스 루아르(Loire) 대교구의 생 랑베르(St. Ramber)에서 태어나 1895년 9월 파리 외 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1900년 6월 22일 졸업과 동시에 사제로 서품되어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 프랑스를 출발하여 10월 9일 한국에 도착한 무세 신부는, 임시로 서울의 주교관에 머무르면서 한국어와 풍속을 익히던 중 1901년 4월 27일 제주도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5월 10일 제주도에 부임한 그는, 제주 본당의 사목을 담당하고 있던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와 합의하여 한논(大沓, 현 서귀포시 好近洞) 본당의 사목을 시작하였으나, 그 무렵 교 · 민(敎民) 사이에서 발생한 신축교안(辛丑敎案)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그 경과를 자세히 보고한 후 프랑스 함대의 구조를 받아 4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목포(木浦)로 피신하였다가 그 해 10월 말경에 귀환하여 황폐해진 한논 본당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1902년 4월 20일 마산(馬山, 현 완월동) 본당의 2대 주임으로 전임되어 부임 초기부터 성당 신축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창원(昌原) · 진주(晋州) · 충무(忠武) · 거제(巨濟) · 밀양(密陽) · 문산(文山) · 함안(咸安) 등 경남 여러 지역에 공소를 설립하고 성무 집행 및 전교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교세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어 1910년 9월에는 교육을 통한 복음 전파와 계몽 및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마산 본당 부속 건물에 성지(聖旨)학원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을 개설하였다.
1911년 4월 8일 조선 대목구에서 대구 대목구가 분할 설정되면서 그 해 7월 3일 초대 대구 대목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에 의해 재정 담당 신부로 임명된 그는, 재임 중 주교관 내에 루르드(Lourde) 성모당을 건립하였고, 1915년 10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대구 수녀원이 설립되자 초대 지도 신부를 겸임하여 1939년까지 약 24년 동안 수녀원 및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에 많은 후원을 하였다. 이와 함께 대구 지역의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1924년 11월 19일 해성(海星)학교가 남자부와 여자부로 분리되자 여자부의 운영을 맡아 야간제를 주간 4년제로 승격시켰으며, 이듬해 5월 15일에는 이 학교를 효성(曉星)여자보통학교로개명하여 6년제 초등 교육 기관으로 설립 인가를 받은 후,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학급을 증설시키는 등 학교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1928년 5월 6일 무세 신부는 대구 대목구 부대목(副代牧)으로 임명되어 약 10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계속해서 교육 사업에 관심을 가져 1926년 계산동(桂山洞) 본당 부설로 개원된 성모유치원이 1932년 6월 17일 교실 및 사무실을 신축한 후 효성유치원으로 개명됨에 따라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38년 2월 9일 드망즈 주교가 사망하자 그 해 12월 13일 제2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이레네폴리타노(Irenepolita- nus) 명의(名義)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5월 7일 대구 계산동 본당에서 '바위에서 흐르는 꿀' (Mel de Petra)을 사목 표어로 주교 성성식을 가졌다. 그는 일제의 교회 탄압이 격화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대목이었던 1938년 중엽에는 재단 법인 대구 천주교회 유지 재단의 설립 인가를 받았고, 대목구장 재임 중인 1939년 말에는 교구 유지 재단 부동산 등기 수속을 마침으로써 교구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또 교세 확장을 위해 교구 내 군청 소재지에 적어도 본당 하나는 세워야 한다는 방침을 세워 이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1938년에는 거창(居昌) 본당과 화원(花園) 본당이, 1939년 5월 에는 고성(固城) 본당이, 그리고 1940년에는 밀양(密陽) 본당이 각각 신설되었다.
그러나 외국인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교구장을 일본인 성직자로 교체하려는 일제 총독부의 획책에 의해 1942년 7월 7일 교구장직 사임 의사를 표명하여 8월 30일자로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사임을 정식 통보받았다. 그 해 9월 10일 교구 내 성직자 및 신자들에게 교구장직 사임을 발표한 후 물러났으나 이후에도 계속 교구 사목에 많은 관심을 가진 무세 주교는, 그 후 거처를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로 옮겼고, 1951년 10월 26일에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80세 때인 1955년 1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50여 년 이상 한국 교회의 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공로가 인정 되어 최고 문화 훈장인 레종 도뇌르(Légion d'honeur) 기 사장을 수여받았고, 1956년 9월 24일에는 문교부 장관으로부터 종교적 · 문화적으로 많은 공헌을 한 데에 대한 감사장을 받기도 하였다. 1957년 6월 8일 심장성 천식증이 악화되어 82세를 일기로 서울에서 사망하였으며, 유해는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 대구 대교구 ; 마산교구 ; 완월동 본당)
※ 참고문헌 《가톨릭 사전》 <가톨릭 시보> 171호(1956. 9. 28), 2면/ 《경향잡지》 1043호(1955. 2) ; 1063호(1956. 10) ; 1072호(1957. 7)/上智大學, 《カ 卜 リ ック 大辭典》 5, 東京, 富山房, 1954, p. 110/ 天主教 釜山教區, 《教區年報》, 韓國敎會史研究所, 1984/ 천주교 대구대교구 사 편찬위원회, 《大邱本堂百年史》, 대건출판사, 1986/ 천주교 대구대교구 편, 《교구 총람》, 대구대교구 홍보국, 1986/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한국 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00년사》,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1/ 한국교회사연구소 편, 《뮈텔 주교 일기》 I, 천주교 명동 교회, 1986. [李裕林]
무세, 제르맹 Mousset, Gemmin(1876~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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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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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 주교 서품식장 입구(위)와 서품 축하식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