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의 만물은 고정적 · 실체적인 자기〔我〕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 불교의 근본 교의인 삼법인(三法印) 즉 제법 무아(諸法無我) · 제행 무상(諸行無常) · 열반 적정(涅槃寂靜)의 하나이다.
〔의미와 무아설〕 무아는 팔리어(Pali) 안앗탄(anattan)이 원어인데, 이 말은 '영혼이 아닌' (notasoul) 또는 '영혼이 없다' (without soul)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두 가지 의미를 굳이 구별하자면, 전자는 비아(非我)로, 후자는 무아(無我)로 번역된다. 그런데 팔리어 불전(佛典)보다 후대에 작성된 산스크리트어 불전에는 안앗탄에 상당하는 안아트만(Anātman)보다는 '무아' 로 번역되는 니라트만(nirātman)에서 유래한 나이라트미야(nairātmya)를 주 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산스크리트어 불전을 번역함으로써 '무아' 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었다. 따라서 무아 개념은 그것이 구사되는 원전에 따라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낳을 수 있다. 이는 특히 아(我)의 의미가 다의적(多義的)이라는 데에 기인한다. 즉 불전에서는 이 '아' (attan, atman)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① 자기 자신의 것(one'som), ② 자기 자신, 정신과 육체를 모두 포함하여 '사람인 것' 즉 인격(personality, ③ 미세한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self) 또는 영혼(soul)
흔히 '무아' 라고 말할 때의 '아' (아트만)는 이 중에서 ③의 의미로 간주된다. 이에 의하면 무아란 영원 불변하고 자율적인 실체로서의 '아' 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음을 뜻한다. 이러한 무아는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로 나뉘는데, 이 가운데 '인무아' 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5온(五蘊, 色 · 受 · 想 · 行 · 識)이 임시로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므로 항상적이고 독립적인 주체〔我〕가 없다는 것이고, '법무아' 는 일체의 법은 인연(因緣)에 의해 생겨난 것이므로 그 자체에 고유한 독자성이 없다는 것이다. 소승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인무아' 를 주장하며, 대승 불교에서는 '인무아' 와 함께 '법무아' 를 주장 하고 있다. 그리고 석가가 이와 같은 의미로 무아를 설파하였다고 이해한 데서 불교의 근본 교리인 무아설이 성립하였다.
이처럼 무아설은 석가의 가르침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유래한다. 여기서는 영원 불변의 실체를 철저히 부정하는 취지로 무아의 교설을 이해하였고, 이런 이해가 정설화하여 현상 세계를 구성하는 온갖 존재 및 그 요소의 불변 상주성(不變常住性)까지도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러한 것은 정통 바라문교의 유아설(有我說) , 즉 '아' 를 인정하는 입장과는 반대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아설은 사상적으로 불교 고유의 특성을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무아설의 원류와 배경〕 팔리어로 전승된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의 <무아상경>(無我相經)은 무아설의원류와 배경으로 중시되고 있다. 이것은 석가가 정각(正覺)을 성취한 후 그의 제자들에게 행한 설법으로, 여기서 석가는 '아' 가 있다면 그것은 자율적인 것인데, 그런 것은 발견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육신〔色〕은 '아' 가 아니다. 육신이 '아' 라면 육신은 고통에 지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은 항상 변화를 겪고 있으며, 따라서 항상 불행과 고통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자율적인 자아일 수는 없다. 이와 같은 내용은 인격의 다른 측면들, 즉 감각〔受〕 · 지각〔想〕 · 의지〔行〕 · 판단
〔識〕에 대해서도 반복된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 가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보아야 하며, 이 모든 것이 자아가 아님을 깨달을 때 그것들로부터 등을 돌려 욕구를 단절하고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내용의 설법에서는 '아' 에 대한 부정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행위를 경험하는 개체로서의 '나' , 즉 '아' 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항구적인 성질을 주장하는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개체를 물질과 정신의 복합체로 보고, 물질과 정신의 요소로 이루어진 것은 무엇이든 거기에는 항구적인 성질을 지닌 어떠한 것도 발견되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색(色)이라는 물질적인 요소는 변화하며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이라는 정신적인 요소도 그러하다. 육신이 영원한 실체라면 그것은 병이나 죽음에 지배될 수 없을 것이며, 그 자신의 성질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감각 또는 감정 〔受〕도 명백히 영원하지 않고 독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독자적인 성질이나 존재를 갖지 않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실체나 영혼을 구성할 수 없다. 또 감각 기관이 받은 것에 대해 정신적으로 반응하는 지각[想]도 그 자신만의 존재를 갖지 않으며, 영원한 실체를 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지각의 반응을 재구성하고 성찰하는 의지(行)도 영원한 자아를 형성할 수 없는 비항구적인 것이다. 이와 함께 식별 또는 판단(識)도 그것들을 낳는 인상처럼 무상하며 역시 영원한 영혼의 성질에 속할 수 없다고 분석하였다.
또한 <무아상경>에는 석가가 무아설로 지칭되는 교의를 설한 목적이 처음으로 암시되어 있다. 그의 관점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불행은 남을 해치면서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자아의 기만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영구적인 자아를 설하는 교의에는 진실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만약 전적으로 인과율의 지배를 받는 현상적인 존재에게 이 인과율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자아가 있다고 한다면, 윤리적 생활은 그 지향점을 잃을 것이다. 자아에 집착함으로써 야기되는 자기 중심주의는 세상에 불행을 낳는 근원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자아라는 생각이 사라질 때 내 것' 이라는 생각도 사라지고, 그 사람은 '나' 와 '내 것' 이라는 관념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아설은 석가가 설한 다른 모든 가르침처럼 도덕적 완성을 그 목적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무아설의 전개〕 무아설은 비록 도덕적인 관점에서 출발하였지만 그것이 영혼과 같은 불멸의 실체를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거나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 만큼, 교리상의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불멸의 자아 또는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설이 그런 실체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윤회설과 상충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는 영혼[我]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업과 윤회의 관념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유아설을 견지하는 다른 학파로부터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난점을 해소하기 위한 노력은 일찍이 인도 불교 내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이 노력이 불교 사상의 조류를 형성해 왔다고도 말 할 수 있다.
부파 불교(部派佛敎) 시대의 여러 부파들은 무아설을 견지하면서도 윤회의 주체를 대신할 수 있는 원리들을 상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경량부(經量部)는 무한의 과거로부터 존속하여 화합하고 있는 일미온(一味蘊)을 인정하였고, 독자부(犢子部)는 인아(人我)라고 번역되는 푸드갈라(pudgala)를 상정하여 그 본체는 5온과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원리를 부정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5온의 상속'(santāna)이라는 관념을 내세워, 이것이 과거 · 현재 · 미래에 걸쳐 생멸하면서 연속적인 흐름을 형성하여 하나의 통일성을 지닌 인격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관념들은 용어가 다를지라도 실제로는 '아' 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석가의 본지를 벗어났다는 강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대승 불교의 중관(中觀) 철학은 연기 · 중도 · 무아라는 근본 교설을 공(空)이라는 개념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전의 견해가 그릇된 것임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런데 중관학파의 공 개념은 자칫하면 불교의 교설을 허무주의로 오해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이런 오해를 불식하기 위해 대승 불교의 유식(唯識) 철학은 '알라야식' (ālaya-vijñāna, 阿賴耶識)이라는 원리를 상정하여, 무상(無常)의 세계가 생성 · 변화 ·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모든 정신 활동〔識〕의 근원으로서, 개체의 중심이요 개인 존재의 주체이며, 나아가서는 윤회의 주체이고, 신체 속에 존재하는 미세한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유식 철학 역시 무아설을 견지하여, 알라야식은 본래 찰나마다 멸하는 것으로서 실체적인 '아' 와는 본질을 달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알라야식은 '아' 와 매우 유사하다. 한편 대승 불교의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대아(大我)를 설하는데, 이것은 불성(佛性) 혹은 열반과 동일한 것으로 여래장(如來藏)이라고 불리며, 여래장 사상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 불성이나 여래장도 인도의 정통 철학에서 말하는 '아' 와 서로 구별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유사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상과 같은 사상의 추이를 접하게 되면, '무아' 교설의 근본 취의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경우 '아는 없다' 라는 무아의 원어가 사실은 '비아' (非我)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 쟁점으로 부각되며, 그 결과 무아설을 인도의 유아설, 즉 자아 사상의 일종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등장하였다.
〔무아와 비아의 쟁점〕 무아에 대한 반론 : 무아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초기 경전의 '아' 와 무아에 대한 모순되는 듯한 기술을 모두 무아설로 통용한 데에 기인한다. 무아의 본래 의미가 '비아' 라는 견해는, 초기 불교의 경전에 '아' 를 인정하는 문구가 많이 발견된다는 점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따라서 무아설에 철저하려면 문제가 되는 이 문구들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그간의 교리학적 전통에 의하면 이 문제는 두 가지 관점에서 해명되었다.
첫째 유아설이든 무아설이든 모두 미혹한 범부(凡夫)를 구제하기 위해 제시된 방편이므로, 그 어느 것도 진실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진실한 의미에서 '아' 는 존재하지 않으나 세상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아' 를 인정하기 때문에 현실에 따른 '아' 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유아설은 세속적 혹은 실천적 의의를 지니긴 하지만, 진정한 진리는 무아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무아설에 대한 반론은 첫째의 관점이 초기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고, 둘째의 것은 소승 불교에서 무아설이 정설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절충적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리고 무아설의 전반적인 경향을 "불교에서는 실체적 원리인 '아' , 예를 들면 영혼과 같은 것을 상정하기를 거부하며, 대상적인 무엇인가를 '아' 혹은 '나의 것' 이라고 집착하지 않는 것을 실천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초기의 불교 및 대승 불교의 후기에는 그것을 '진실한 자기 의 실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러한 반론은 결국 무아설의 기본 입장이 불변하는 실체적 원리를 부정하면서도, '진실한 자기' 라는 실천적 차원의 '아' 를 인정한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의하면 '아' 는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와 함께 초기의 불교 경전에는 무아설이 세 단계에 걸쳐 전개되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무아설이 '아' 를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먼저 제1 단계는 주로 운문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아' 를 승인하고 있으며, 이때의 '아' 는 '진실한 자기'라고 이해된다. 제2 단계는 초기의 산문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아' 를 부정하지 않는 '비아' 로 표현되며, 이런 표현은 아집을 버리는 실천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이해된다. 제3 단계는 후기의 산문 부분에 나타난 것으로 여기서는 '아는 없다' 라는 무아의 맹아(萌芽)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초기의 불교 경전안에는 아직 명확한 무아의 관념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초기 불교의 무아설이란 끝까지 '비아' 로 표현되는 것이며, 이런 표현의 의의는 실천의 주체로서의 '아' 즉 자기를 인정하는 데 있다고 하였다.
비아에 대한 반론 : 이상과 같은 고찰에 의하면, 무아설의 본래 취지가 '아' 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견해는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견해를 따르면, 비아보다 더욱 뚜렷하고 많이 언급되어 있는 무아와 관련된 내용은 모두 석가의 진의를 누군가가 자의적으로 부연한 것이 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무아설의 대표적 전거인 <무아상경>에 적용하면, 석가의 무아 교설은 '아' 를 전면적으로 부정한 것이 아니라, '아' 를 전제하고 추구한 가르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불교의 입장에서는 비아의 표현이 결코 '아' 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는 비아라는 표현에 함축된 의미를 주목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영원하고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고서 그것을 '아' 라고 칭하지만, 그것의 실상은 5온의 어느 하나 혹은 그 전부일 뿐이다. 그런데 5온 혹은 5온의 낱낱은 모두 항상 변화하는 무상한 것이므로 '아' 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석가는 5온을 '아' 가 아니라고 말하며, 이 밖에 따로 '아' 에 상당하는 것을 세우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은 결국 '아는 없다' 즉 무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비아' 라는 표현이 결코 다른 '아' 를 상정한 것은 아니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 는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 즉 언어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이 비아라는 표현에 암시되어 있고, 비아로 표현되는 가르침 역시 무아설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들은 또한 세부적인 논의에 앞서 불교 사상사 전반의 흐름을 내세워 무아설의 본래 취의를 비아에서 찾는 입장을 일축하였다.
위와 같은 입장을 견지하면, 무아설에 '아' 의 존재를 인정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경전에 역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불교를 인도의 정통 철학인 베단타(Vedānta) 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무아' 에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 설법에서 사용된 것은 "석가가 무아를 고수하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에게 활력적인 감화를 주기 위해 때로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긍정적인 언어적 상징을 사용하였다" 고 이해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무아는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불교가 영혼의 실체를 부정한 점은 세계의 여러 종교들 중에서도 매우 독특하다. 전통적 권위를 지니는 경전에 의하면, 무아가 영혼에 대한 철저한 부정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영혼에 대한 전적인 침묵, 그리고 우파니샤드에서 주장하는 영혼을 부정한 점도 경험적이거나 초월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불교의 목표는 모든 물질적 · 정신적 현상의 무상성을 깨닫는 것이며, 상주하는 불멸의 자아나 실체는 어떠한 것이라도 거부하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되고 스스로 충족되는 성격의 단순한 실체를 대신하는 무아는, 유동적이고 상관적이며 '어떠한 자아도 결여한' 물질적 정신적 복합체라는 의미이다. (→ 불교)
※ 참고문헌 Vishwanath Prasad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New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1973/ 中 村元, <イ ソ ド思想一般力丶ら見た無我思想〉, 《自我 と 無我》, 京都 : 平樂寺書店, 1963/ G.P. Malalasekera ed., Encyclopedia of Buddhism, vol. 1, The Goverment of Ceylon, 1961/ T.W. Rhys Davids · William Stede eds., The Pali Text Society' 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The Pali Society, 1921. 〔鄭承碩〕
무아
無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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