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외적인 모든 억압, 즉 정치적 계급 투쟁 및 정치적 조직, 규율, 권위 등을 부정하면서 자율적인 개별 의지의 기초 위에서 공동 생활의 재건을 계획하는 이념과 행위를 표방하는 운동. 인간은 정부 기구나 국가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근간을 이룬다. 이 용어는 지배자의 부재(不在) 혹은 정부의 부재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안 아르케' (60-0-30m)에서 유래하였다.
〔다양한 주장〕 프랑스 대혁명은 자유 · 평등 · 우애라는 항구적 원칙에 근거하여 국가를 건설하였지만, 혁명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노예 제도 · 사회적 불평등 · 계급 투쟁은 사회 내에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프랑스 대혁명이 개인을 근본적인 하나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모든 정치적 · 사회적인 제도는 그 개인의 완전한 발전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규정한 데서 기인한다. 최초로 무정부주의적인 주장을 제기한 프랑스 혁명가 바뵈프(Gracchus Babeuf, 1760~1797)는 '동등한 사람들의 일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평등을 '실체적 평등' 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즉 그는 "부자와 빈민, 강자와 약자, 주인과 하인, 정부와 피통치자 사이의 차별을 사라지게 하자" 고 주장하였다. 또한 무정부주의 운동에 이론적인 기초를 제공한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프루동(P.J.Proudhon, 1809~1865)은 자신의 저서 《소유란 무엇인가?》(Qu'est ce que la propriété, 1840)에서 "나는 무정부주의자이 다" 라고 선언하였다.
철학적 이론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헤겔(G.W.F. Hegel, 1770~1831)의 일원론적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포이어바흐(L. Feuerbach, 1804~1872) 바우어(B. Bauer, 1809~1882), 슈티르너(M. Stirner, 1806~1856) 등과 같은 헤겔 철학의 신봉자들은 이 일원론을 보다 혁명적인 의미
로 해석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들은 모든 이원론 혹은 모든 형태의 소외를 배격하였으며, 개인의 독자성을 억압하려 위협하는 추상적 집산주의(集産主義)의 속박에 근거하는 종교적 소외, 즉 교회와 맞서 대항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소외인 국가와 인간적 소외인 인문주의(humanism)에 대항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헤겔, 포이어 바흐, 마르크스(K. Marx, 1818~1883)를 연결시키는 연관 관계, 말하자면 절대적 관념론에서 출발하여 기계론적 유물론을 거쳐 역사적 · 변증법적 유물론에 이르는 철학적 진화를 역설하였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헤겔 철학으로부터 파생된 모든 소외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는데, 이는 헤겔의 '절대 정신' 에 내재성을 부여하면서 도달하게 되는 절대력을 지닌 단일한 자아의 희생물이라 할 수 있다.
종교적인 억압 역시 무정부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프루동은 진정한 덕은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투쟁이라고 주장하였고, 바쿠닌(M. Bakunin, 1814~1876)은 종교가 없다면 국가는 존재하지도 또 존재할 수도 없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들의 공격 대상은 종교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도화된 교회였다. 그 이유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사제의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며, 미지에 대한 인간의 경외심과 공포를 이용하여 체념과 순종의 논리를 주입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교회는 개인의 가치 판단과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을 가로막는 모든 권위의 원천이며, 세속적인 권력과의 결탁을 통해 국가의 행위를 합법화시키는 정치의 시녀(侍女)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인간을 노예화하는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이자, 세속 권력의 대행 기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신론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무정부주의는 순수하게 종교적인 또는 그리스도교적인 반향을 견지한다. '하느님의 신비' 를 완전히 반대하였던 프루동은 이 정의를 역설하면서 종교적 초월성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는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시오.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리시오"(마르 12, 17)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면서 그리스도교의 비정치적 성격을 강 조하였다. 그는 또한 "예수의 가르침은 완전히 사회적이지만 비정치적이며 비신학적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슈티르너는 자신의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세속적인 국가를 지양하였던 예수의 태도와 일치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였다. 또한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를 지녔던 무정부주의자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L. Tolstoi, 1828~1910)는 "예수의 이념은 개인적 생활을 위협하는 불가피한 소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기회를 준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근거 위에 존재하는 무정부주의는 언뜻 보아 모순적인 경향 속에서도 극도로 세분화되어 있다. 즉 슈티르너, 프루동, 톨스토이 등의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 와 바쿠닌으로 대표되는 '집산주의적 무정부주의' , 그리고 크로포트킨(P. Kropotkin, 1842~1921)에 의해 주장된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 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무정부주의' 와 '공산주의' 는 상호 모순되는 개념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사실 양자는 상호 보충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동시에 적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전자가 개인 · 자유 · 공동체 · 자발성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계급 · 권위 · 국가 · 조직체를 강조한다. 이러한 차이는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 와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 의 경향에서도 나타난다. 즉 첫 번째 경향은 사유 재산을 유지함으로써 개인적인 자유를 보장하려는 것인 데 반해, 두 번째 경향은 오직 공동 재산제만이 개인적 발전에 불가피한 조건인 사회적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집단의 권위나 사적 소유를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부정할 것인가 하는 의견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무정부주의는 전통적인 경제주의자들이 강조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 자아 상실에 근거하는 집산주의라는 이중적 유혹을 수용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후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아닌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가 진정한 무정부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 발전되었으며, 이후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입장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는 노동 조합의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1914년 이전의 생디칼리즘(syndicalism), 10월 혁명 직후 우크라이나 남부의 농민 대중을 결집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 점령군 및 백군에 대항하였던 네스토 마크노(Nestor Makhno)의 운동과 스페인 전쟁 중 이베리아 무정부주의자 연맹의 활동을 고무시켰으며, 이후 이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는 현대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폭력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적 무정부주의가 지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정치적 개념〕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권위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에서의 질서와 정의는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체결되는 '계약' 에 그 근거를 두며, 이러한 계약의 조항들은 또한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준수된다. 무정부주의에서의 이 계약은 루소(J.J. Rous-seau, 1712~1778)의 《사회 계약론》(Du Contrat Social)에서 언급되는 계약과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프루동은 그의 저작 《19세기 혁명의 일반적 관념》(ideé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au XIXe siècle, 1851)에서 루소의 계약론은 사회적 존재와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모든 민주주의자들이 결국에 귀착하는 국가 관리론에 의한 속박이 발생하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프루동이 추구한 계약은 정치적 추상의 결과와는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으며, 계약 당사자들이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마침내 합일점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 관계가 변화할 경우 계약 역시 변화 가능하다. 이는 사회 생활의 복잡성을 무시하는 단일적인 계약이 아니라 개인의 수많은 요구에 가장 잘 부응하는 것으로, 결국 계약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단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 소가 사회 계약론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공동체가 각기 나름대로 소유하고 있는 권리를 통해 상호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완전한 소외"를 주장한 반면, 프루동은 계약을 정의하면서 각각의 계약 당사자는 자신이 주는 것만큼 받아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계약의 조항들에 근거하여 엄격하게 한정된 의무의 경우만을 제외하고 그 계약은 완전한 자유와 절대력을 지속적으로 향유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계약의 다양성은 기존의 중앙 집권적 국가를 대체하기 위한 체제로 계약과 이해 관계가 지배하는 자치적 지역 사회 및 산업 연합체들의 연방으로 나타난다. 이른바 기존의 집단들 사이의 평형을 지속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하는 무정부주의적 연방제는 모든 형태의 정부, 특히 중앙 집권적인 정부 형태를 절대적으로 거부 한다. 연방제 아래에서는 법원이 아닌 중재가 채택되며, 노동자들의 관리 경영이 관료제를 대체시키고 이론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인격 교육을 실시하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사회 질서가 끊임없는 압제의 모태가 되는 혼돈에 불과하다면, 프루동은 자연 그대로의 사회 공동체를 지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앙 집권적 국가에 대한 적대감은 프랑스 혁명 원칙에서 비롯된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특히 자코뱅(Jaco-bins)주의와 관련하여 드러난다. 슈티르너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舊體制)으로부터 프랑스 혁명에 의해 생성된 주권 국가로의 이행은 종속의 심화를 야기하였다고 주장하였으며, 프루동은 프랑스 혁명이 계급 투쟁을 초래하였다고 비난하였다. 프루동의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토대로 바쿠닌은 1793년 코뮌(commune)에 대항한 로베
스피에르(M.-F.-M.-I. de Robespierre, 1758~1794)의 투쟁과 제1 인터내셔널이 지니고 있던 연방제적 개념에 대항하였던 권위주의자들과 국가 관리주의자들의 투쟁을 상호 대조하기도 하였다.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저서 《빵의 정복》(La conquete du pain)에서 자유로운 공산주의 세력의 연합인 혁명적 사회 공동체를 주장하였다.
무정부주의는 보통 선거를 위험한 환상이라 간주하여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반민주적 성격을 갖고 있다. 무정부주의 이론가들에 의하면 보통 선거는 이중적 폐단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보통 선거가 유권자들을 종종 정치가의 위선과 협잡에 의해 결정되는 수준으로 만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유권자들은 보통 선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무정부주의가 '투표 기권주의' 의 성향을 갖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이 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를 공격한 것은 국가란 본래 약자를 착취하려는 강자의 욕구에서 비롯된 것 이라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즉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는 첫째, 사회 구성원 전체의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강제적인 실체이다. 둘째, 국가는 결국 계급성을 반영하는 각종 법규와 제도를 통해 다수의 생존권과 욕구 충족의 기회를 박탈할 수밖에 없는 착취적인 실제이다. 셋째, 국가는 인간의 세계관을 편협하게 만드는 각종 수단을 이용하여 사생활을 규제하고, 개인의 자율과 개성의 신장을 가로막는 파괴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강제성 · 착취성 · 파괴성을 지 닌 국가가 존재하는 한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실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무정부주의자들의 주장이다.
〔사회적 개념〕 무정부주의는 사회적 유토피아의 이미지를 강조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슈티르너가 격찬한 바 있는 '협동 조합주의' 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유일자(唯一者)와 그의 소유》(Der Einzig und sein Eigentum, 1845)에서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와 '조합'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설정하였다. 프루동은 사회라는 범주 속에서 개인의 자율권을 옹호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해서는 자본이라는 압제적이며 반도덕적인 권력에 대항하여 투쟁해야만 하였다. 그는 자본을 매개체로 한 사회 · 경제적 생활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통화(通貨)의 중지와 무이자 신용 대출을 주장하였고, 이를 토대로 프루동은 무정부주의적인 '상호 부조론' 을 역설하였다. 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 상호 부조를 위한 조합이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프루동은 사유 재산을 비난하기는커녕 소유는 개인적 자유의 기본을 형성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는 자영 농민과 독립적인 장인들로 구성되고, 노동자 연합체가 공장과 공공 시설을 운영하며, 이 모든 요소들이 인민 은행의 상호 신용 체계에 의해 조화를 이루는 경제 공동체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재산이란 부정 (不正)을 통해 생성된 것으로 또 다른 부정을 야기한다고 주장하면서 사유 재산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적 · 사회적 평등은 국가의 개입이 아닌 혁명적 자발성에 의해 얻어진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사회주의자들이 약속하였던 "각각의 개인에게
노동에 대한 완전한 수입" 대신, 공산주의적 무정부주의자들은 "삶을 위한 권리, 안락함의 권리, 모두를 위한 안락함"을 주장하였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은 설사 노동 시간을 감축한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 생활을 보장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쿠닌은 프루동이 주장한 노력에 상응하는 분배에는 동조하였지만, 제한된 소유권의 개념은 비현실적이므로 생산 수단의 공유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크로포트킨의 경우, 인구가 농업 생산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다는 맬서스(T.R. Malthus, 1766~1834)의 이론에 반대하면서 수입을 무제한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는 과학에 신뢰를 갖고 있었다. 그는 생산 수단의 공유뿐만 아니라 모어(T. More, 1477~1535)의 《유토피아》(Utopia, 1516)에 나타나는 공산주의적 분배 방식을 주장함으로써 바쿠닌의 집산주의적 주장을 넘어섰다.
〔도덕적 개념〕 무정부주의는 사실상 방종으로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개인을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무정부주의의 윤리는 개인의 책임이라는 의식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1914년 이전의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들이 끊임없이 내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노동을 통하여 개인적 해방을 이루려 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더욱이 무정부주의는 사회적 범주 내에 개인적 자율권을 결부시키려 노력하였는데, 이는 개별적인 모든 자유를 순순하게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개인적 자유란 사실상 다른 사람의 자유를 거부할 때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연대성은 자유로 향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된다. 따라서 무정부주의적인 개혁은 인간에 반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에 밀접한 것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동의를 통하여 사회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억압하는 국가라는 추상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때문이다.
결국 무정부주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라기보다는 사회적 · 윤리적 신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는 현실 세계를 평가하는 이상이며, 개인의 절대적인 가치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꿈과 노력의 단적인 표현으로서의 유용한 역할을 현재에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 (→ 생디칼리즘)
※ 참고문헌 H. Arvon, L'Anarchisme, Paris, P.U.F., 1951/ H. Arvon, 《EU》 2, pp. 283~285/ G. Labica, Dictiomaire critique du marxisme, Paris, P.U.F., 1982/ G. Jacquemet, 《Cath》 1, pp. 508~510/ 김은석, <아나키즘>, 《서양의 지적 운동》, ,지식산업사, 1996. [邊琪燦]
무정부주의
無政府主義
〔라〕anarchismus · 〔영〕anarch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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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주의를 제기한 바뵈프.
